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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모습 - 한국사 35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9

This was likely related to the absence of a large-scale collective farming system, given the mountainous geography of the Korean Peninsula, and bears comparison with some Middle Eastern civilizations such as ancient Palestine, as described in the Old Testament, where only the women and young children of defeated tribes were enslaved while the men were killed.   해석  이는 한반도의 산악 지형으로 인해 대규모 집단 농업 체..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8

More recent studies, however, have refuted this view by demonstrating that no was a common self-deprecatory expression at that time. In addition, in the absence of demand for slaves in agriculture, most prisoners of war resulting from the numerous battles that took place in the Korean Peninsula were either killed or obliged to pay tribute on a regular basis rather than enslaved until the seventh..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7

For a time, there was a tendency to interpret all instances of the character 'no' in the historical record as referring to slaves, and thus scholars perceived Silla to have been a slave society possessing an enormous number of slaves.   해석  한때, 역사 기록에서 등장하는 모든 '노' 자를 노예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신라가 엄청난 수의 노비를 소유한 노예제 사회였다고 여겨왔다.   한 마디   신라 관련 사료에서 '奴'가 등장하는 것 관련으로, 자세하진 설명하지 않지만 이를 노비(노..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6

The ancient times in Korean history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e Three Kingdoms (-668) and the Unified Silla periods (668-900). Neither era had significant numbers of slaves.  해석  한국 고대시대는 크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로 나눌 수 있다. 두 시대 모두 노예 수가 많지 않았다.   한 마디  지역을 막론하고, 분명 노예는 재산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부양의무가 있고, 박한 대우를 드러내면 반기를 들 수 있는 존재였기에 노예 수가 일정하게 늘어나기 위해서는 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음 또한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한반도 고대 시대에 노예 수가 많지 않았던 부분..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5

Yet, slavery was not so extensive that it defined ancient Korean society. The ancient times in Korean history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e Three Kingdoms (-668) and the Unified Silla periods (668-900).  해석  그렇지만, 노예제도가 고대 한국사회를 정의할 정도로 그렇게 널리 퍼져있던 아니다. 한국사의 고대시기는 크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로 나눌 수 있다.     한 마디   이제는 실패한 이념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역사의 시대구분을 정립했다는 것에서 여전히 맑시즘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맑시즘의 시대 구분에 있어서, 한국 고대 시대가 고대노..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4

Although the absence of further records makes it hard it to know whether such status was heritable, it is certain that slavery existed from the early stages of Korean civilization.   해석  더 이상의 기록이 없기에 그러한 신분이 세습 가능한 것이었는지를 알기는 어렵지만, 한국 문명의 초기 단계부터 노예가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absence : 부재, 결핍heritable : 세습 가능한civilization : 문명    한 마디   세습가능 여부를 중요하게 짚은 걸 보면, 사학자들은 연구에 있어서, 세습 여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듯 하다. 과연 그 당시에도..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3

This shows us that crimes comitted by free men were punished by reducing the guilty person to slave status.   해석   이는 자유인의 범죄가 유죄를 선고받은 자를 노예 신분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처벌되었음을 보여준다.   commit : (범죄 등을) 저지르다guilty : 유죄의, 죄를 지은reduce A to B : A를 B로 격하시키다, 전락시키다   한 마디   당연히 노예(slave)는 한국으로 말하면 노비와 같은 뜻이지만, 여전히 뭔가 좀 다른 느낌이다. 뭔가 당연히 존재하고, 친절한 주인 밑에서 자기 몫을 하는 노비가 등장하는 사극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걸까.    '영어논문 한국사'는 'The Cambidge..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2

The first documentation of the existence of slaves (nobi) can be found in legal records pertaining to the second and third centuries BCE, stipulating that those who steal from others shall be made nobi.   해석   노비(nobi)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3세기의 법률 문서에서 발견되며, 해당 문서에는 타인의 재물을 도둑질한 자는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documentation : 문서화, 기록stipulate : 명시하다, 규정하다pertain to : ~와 관련되다BCE (Before Common Era)..

영어 한국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1

The term nobi is a combination of no, reffering to male slaves, and bi, which reffered to female slaves.   해석   노비라는 용어는 남자 노비를 뜻하는 '노' 자와 여자 노비를 뜻하는 '비'자를 합친 것이다.   한 마디   한국 사람이라면 들어본 적이 없을리 없는 단어 '노비', '노(奴)'와 '비(婢)'가 각각 남자, 여자 종을 뜻한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영어논문 한국사'는 'The Cambidge world history of slavery' 중 한국의 노비 제도 변천을 다룬 'The early stages of Korean slavery up to the 1100s'을 번역해가며 ..

멀고도 험한 요약의 길 - 임시정부기념관 방문기 3개를 700자로 줄이기

글을 써달라고 부탁받은 적이 거의 없다. 지시를 받은 적은 많다. 물론 좋아서 쓴 글도 꽤 있다. 이 블로그에 쓴 글도 그저 내가 좋아서 쓴 것들이다. 그 낯섦 때문인지, 이미 포스팅했던 글을 요약해서 정리하는 것도 꽤 힘들었다. 포스팅 3개를 700자로 요약하려니 쉽지 않은 것도 당연하고, 아무리 엄청난 완성도를 요구하는 글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요청이기에 조금 더 부담이 되었다. 어쨌든 마감날은 다가오고, 계속 전에 썼던 포스팅을 보고 또 보면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과감하게 혹은 아... 내가 이런 글을 썼구나 생각을 하면서 글을 줄이고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결과물은 100%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분량도 많이 초과되어서, 편집자에게 고민을 안기지 않았나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

번아웃과 준비부족 사이 어디엔가 - 역사공부, 그 세 번째 챕터

지난 학기를 마치고 남긴 포스팅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정말 힘들었다고 써놓았네요.  지난 학기와 비교를 해보면, 이 번 학기는... 정말 그로기 상태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과는 역대 최악이었지만, 사실 스스로 많이 부족했기에 그래도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느낌으로 과제에 치여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 심정을 토로하는 제게 누군가 말하더군요. 거의 번아웃이라고... 뭔가 멍해지면서도.... 스스로 좋아서 택한 길인데.. 그렇게 말하는 것도 사치고, 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번아웃보다는 준비부족이 아니냐 스스로 꾸짖고 있는 것 같기도 했죠. 어쨌든 그 사이 어디엔가 비틀비틀거리면서... 또 한 ..

벌써 8년 - (여담) 독서모임에서의 대동법 이야기

독서모임에서 나눴던 대동법 이야기는 너무나 재밌었다. 대동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문답식으로 너무 떠들어대서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낸 것도 내게는 소중하기에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 내용을 블로그에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1. 이이가 사림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 조선의 성현으로 추앙받는 이이가 이토록 동시대 유생들과 관료들에게 집요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은 일면 새로울 수 있는 일이다. 선조 초기 이미 사림의 붕당 조짐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음에도, 이이는 끝까지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선비다운 본성을 믿었을 뿐 어떠한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거나, 한 쪽..

그리고 남은 몇 가지 이야기 - (여담)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기념관을 다녀온 후,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여운이 남아있다. 이제 곧 기억 속에서 잊혀갈 기념관의 울림에 대해서, 앞의 두 포스팅에서 미처 적지 못한 부분을 두서없게라도 남겨보려고 한다.  1. 운영주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닌 '국가보훈부' 박물관이 아니라 기념관이기에, 일면 당연해 보이지만, 아직도 조금은 어색하다. 그저 역사 속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아야 하는 존재로 '임시정부'를 생각했었는데, 이 기념관의 취지는 '보훈'에서 출발한 것이고, 정말 고생했던 선열을 기리기 위한 것임이 잘 드러나는 차이라 하겠다. 그 차이를 잘 살려서, 기념관에 계시는 학예연구사 분들을 중심으로 훌륭한 활동과 연구는 계속해서 폭넓게 이루어지고, 일반 대중들에게 임시정부에서 고생하셨던 분들을 기리는 작업이 계속해서 병행..

울림이 있었던 기념관 방문 - (방문 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가운데 훤칠한 외모에 거구의 김구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임시정부 인사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어두운 표정은 아니지만, 활짝 웃고 있지도 않은 이 사진은 해방 당시 임시정부 상황이 얼마나 어정쩡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애초에 교수님을 모시고, 젊은 대학원생들과 동행한 기념관 방문에서 좋은 사진을 찍으며 만끽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몇몇 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이상하게도 동문 연구원이 준 선물의 이 흑백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교수님께서는 울림이 있었다고 방문을 평하셨다.  4층으로 만들어진 적당한 크기의 기념관을 돌아보는 데, 다소 부족한 두 시간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임시정부에 대해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진중하게 생각에 잠겨본 건 평생 처음이다. 아니 사실 어떤 역사..

임시정부는 무엇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 (방문 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이상하다. 네이버에서 '임시정부박물관'으로 검색을 하니, 박물관 홈페이지가 뜨지 않고, 블로그의 방문 후기가 최상단으로 올라온다. 지도 등 이런저런 사이트를 뒤져서 공식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웬걸 정식 명칭이 박물관이 아니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이었다.   왜 박물관이 아니라 기념관일까? 임시정부에 대한 여러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전에 미국 워싱턴 D.C의 링컨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거대한 석조건물 안에 거대한 동상 하나를 세워두고, 누구나 둘러보거나 앉아서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사실... 뭔가 역사의 한 순간 혹은 인물을 기억에 떠올리기 위해서는 꼭 거창한 유물이나 문화재가 필수적인 건 아니다. 물론 이건..

한 걸음 내딛긴 한 것일까 - 역사공부, 그 두 번째 챕터

생각보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재미있었고, 함께 공부하고, 같은 주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행복하기도 했죠.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니, 저런 감정과 기억의 상당 부분이 소용이 없어지네요.  물론 절대적인 기준으로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제 욕심이 과했을 수도 있고, 제가 아직도 이 쪽 물정을 잘 모르는 초심자 오지라퍼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평범한 교훈과 함께 두 번째 챕터도 끝이 났습니다.   내 나름대로 더 애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상대방이 보기에 빈틈 없이 해야한다.  언제까지 제가 역사공부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2024년 7월 첫 날 느꼈던 이 패배감, 아쉬움을 정말 뼈에 새겨야겠습니다.    인공지능의 경영에의 활용  인공지능에 ..

북-러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 체결 - 조소우호협력조약 복원

지난 6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푸틴 러 대통령이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양국 관계를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로 격상시키는 조약을 맺었다. 대북관계가 매우 좋지 않은 요즘, 한국 입장에서는 북-러 정상회담 만으로도 반가운 소식이 아닌데, 북-러 상호간 유사시 개입이 약속되는 지금 상황은 한국에게 매우 곤란하다. 북-미 관계도 여러모로 소원하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국제정세를 봤을 때, 북한과 러시아 입장에서는 큰 출혈 없이 한국과 미국을 매우 괴롭히는 효과를 거둔 것은 명확해 보인다. 물론 더 중요한 건 한국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인데... 외교적으로, 안보차원에서도 빅뉴스였기에 다양한 전문가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반가운 이름도 몇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

동학운동인가 갑오농민전쟁인가 - 박태균 교수가 바라본 동학농민전쟁

몇 달 전 국방tv 방송 '역전다방'에서 갑자기 하차해서 시청자들에게 큰 아쉬움을 줬던 전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박태균 교수가 총선 직전 중앙일보에 기고를 했다. 제목은 '130년 전 동학농민전쟁이 부른 역사의 소용돌이'이고, 동학농민전쟁 그 사건보다는 그로 인해 촉발된 그 후 한반도 국제정세 변화가 얼마나 극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위정자들의 오판이 현재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130년 전 동학농민전쟁이 부른 역사의 소용돌이 | 중앙일보시모노세키 조약의 의미 시모노세키 조약이 중요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대만을 ‘영원히’ 일본에 할여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철수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고 www.joongang.co.kr 학자로서 한국근현..

벌써 8년 - 대동법과의 인연 #3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에 관한 작은 평전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조선의 개혁’이라는 큰 주제하에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 네 사람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삶과 이념은 물론, 그 시기의 정치 상황과 사건 전개, 인물 관계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비교적 생소한 세 인물과 잘 알려진 인물인 이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지금껏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 이들을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 이정철은 율곡 이이를 ‘개혁의 좌표를 설정한 인물’로 그려낸다. 사회제도적 측면의 경세론을 탄생시키고, 그 성과가 대동법으로 나타났다고 이야기한다. 오리 이원익은 묵묵히 개혁의 길을 걸어간 사람으로, 광해군의 비망기에서 논의가 시작된 공물 변통을..

벌써 8년 - 대동법과의 인연 #2 잠곡 김육 연구

잠곡 김육 연구(양장본 HardCover) - 저자 박병련, 곽진, 이헌창, 이영춘 출판 태학사 출판일 2007.07.16 벌써 8년 전 글이다. 왜 썼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2016년 8월 3일에 써두었던 글을 우연히 보니, 꽤나 정성을 들여썼구나 싶어서 한 번 놀라고, 시간이 참 빠르구나 실감하며 두 번 놀란다. 그 때 생각을 그대로 옮겨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여, 오탈자와 어색한 문장만 고쳐서 그대로 옮겨본다. 벌써 8년 - 대동법과의 인연 #1 역사저널 그날 그리고 조선 최고의 개혁 대동법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소에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용어를 사전으로 만드는 조선사학자 이정철의 『대동법 - 조선 최고의 개혁』. 조선의 500년간의 역사 george-m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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