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를 마치고 남긴 포스팅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정말 힘들었다고 써놓았네요.
지난 학기와 비교를 해보면, 이 번 학기는... 정말 그로기 상태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과는 역대 최악이었지만, 사실 스스로 많이 부족했기에 그래도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느낌으로 과제에 치여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 심정을 토로하는 제게 누군가 말하더군요. 거의 번아웃이라고... 뭔가 멍해지면서도.... 스스로 좋아서 택한 길인데.. 그렇게 말하는 것도 사치고, 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번아웃보다는 준비부족이 아니냐 스스로 꾸짖고 있는 것 같기도 했죠. 어쨌든 그 사이 어디엔가 비틀비틀거리면서... 또 한 챕터가 끝이 났습니다.
여전히 수업을 듣는 건 즐거웠고, 사람들과 활발히 이야기를 나눴지만, 마감을 못 지키기 일쑤였고, 배운 것들은 머리에서 복잡하게 뒤엉켰습니다. 다음 챕터에서는 꼭 이 엉킨 상태를 풀어내야겠다 생각해면서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난 왜 첫사랑이 아니라 재혼을 택했는가?
생각하는 논문 주제를 들은 교수님께서는 정말 가시밭길일거라며, 주제를 택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그 주제가 첫사랑이냐 소개팅이냐를 생각해 보라 일러준다 하셨습니다. 그 별 것 아닌 듯한 구분이 긴 공부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것이죠. 어찌 보면 많은 나이에 특이한 주제를 놓지 못하고 있는 제가 첫사랑을 제쳐두고 재혼을 선택한 특이한 사람으로 보였나 봅니다. 쓴웃음이 나왔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수님의 통찰력과 노련함에 감탄하면서... 올 겨울 과제로 설정해 두었습니다. 난 왜 재혼에 가까운 어려운 주제를 붙잡고 있을까요. 꼭 이에 대해 답을 정리해 봐야겠습니다.
역사교과교재연구 및 지도법
정말 힘들었습니다.
가르치는 것에 대한 도전정신과 열의가 넘치는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기에는 기본지식도 체력도 경험도 모두 부족했습니다. 수업이 끝나는 순간 내야하는 과제도 기억이 안 나고, 열심히 필기했던 것도 무슨 뜻인지 잊어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자주 했습니다. 꽤나 막막했는지, 수업을 같이 듣는 젊은 후배를 따로 불러내어했던 첫 질문이 '마인드맵이 뭐냐? 이게 교육학에서 어떤 역할이냐?' 였다더군요. 그런 질문을 한 것조차도 저는 기억이 나질 않고, 그 후배가 술자리에서 오픈하여 다들 환하게 웃는 안주거리가 되었습니다.
현직에 계신 교사분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를 하시는지, 그리고 그 준비에 따라 수업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 지를 배울 수 있는 건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다양한 수업방식을 배울 수 있었던 건 그저 덤에 불과했습니다.
서양 현대사 연구
2차대전부터 시작하는 서양 현대사 수업은 늘 시험에 들게 합니다. 수업을 따라가고 과제를 준비하는 건 그래도 예상범위 안에 있지만, 텀페이퍼라는 학기말 과제가 자유도가 큰 만큼, 자기 의심과 자기반성이 따라오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죠. 호기롭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련된 주제를 선택했고, 이를 텀페이퍼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교수님께서 문제의식이 좋다며 칭찬해 주신 것도 큰 위안이 되지 못했죠.
첫번째 발표에서 제 짐작대로 한 논문만 읽고 덜렁 발제문을 준비했던 것도 아차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전체 발표 중 첫 번째다 보니 큰 지적 없이 넘어갔지만, 사실 그것도 제대로 요구사항을 확인하지 않은 제 불찰이죠. 그래도 발표주제를 두고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며, 어떤 자료를 활용할지, 어떻게 범위를 더 좁혀갈지... 등등을 밤새 고민해 본 것은 제 자산으로 체화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박물관과 역사교육
박물관을 좋아하지만, 뭔가 정말 궁금해서, 전시물을 깊이 있게 감상하려고 박물관을 방문한 건 대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박물관과 역사교육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가장 크게 남은 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과 서소문성지박물관에 대한 강렬한 기억입니다. 역사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찾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그 첫인상부터 마지막으로 나서는 발걸음까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앞으로 임시정부가 한국에서 어떻게 기억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사이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다는 건 분명하겠죠. 그리고 어떤 논란이 있건 간에 임시정부가 그런 관심과 주목을 받을 만한 건 분명합니다.
학기말 과제로 호기롭게 택했던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엄청난 미적 가치로 주목 받지만, 그 스토리 또한 대단한 곳입니다. 과제를 위해 두 번이나 시간을 내어 방문했고, 사실... 그 전시물의 규모가 엄청난 곳도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더 알려졌으면 싶고, 색다른 의미가 배어 나오는 곳입니다. 두 번째 방문 때 노트북 앞에서 쥐어짜 내듯 과제 관련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면서, 장소가 영감에 주는 영향력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더 이상은 시간이 없었고, 그 시간 거기에 앉아 전시물의 매력과 박물관 방문 이유를 써내야 하는 사치 혹은 부조화가 오히려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게 만들었죠.
그런 절박함에서 만들어낸 '역사에서 '비정'의 의미 찾기', 그리고 '도서관에서 조선 후기 책 찾기'의 활동은 소소하지만 제게는 큰 진전이었고, 그나마 이 번 학기를 채워준 결과물이었습니다.
이제 절반을 지나 끝이 보이는 역사공부...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 정말 스스로 결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충분한 고민을 해야하지만, 그전에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 옳은 판단을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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