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모습 - 한국사

벌써 8년 - (여담) 독서모임에서의 대동법 이야기

마셜 2024. 8. 2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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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라딘)

 

 

 독서모임에서 나눴던 대동법 이야기는 너무나 재밌었다. 대동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문답식으로 너무 떠들어대서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낸 것도 내게는 소중하기에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 내용을 블로그에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1. 이이가 사림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 조선의 성현으로 추앙받는 이이가 이토록 동시대 유생들과 관료들에게 집요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은 일면 새로울 수 있는 일이다. 선조 초기 이미 사림의 붕당 조짐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음에도, 이이는 끝까지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의 선비다운 본성을 믿었을 뿐 어떠한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거나, 한 쪽 당파에 속하여 정국을 주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외로운, 그리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고, 당파적으로 이이는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2. 김육이라는 인물을 잘 몰랐는데, 성리학자 이황 보다 훨씬 와닿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많았다면 조선도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 김육은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크게 사랑받고 있지 못하지만, 역사교사들에게 '되살리고 싶은 인물'을 꼽으라면,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다. 그만큼 역사를 후세에게 가르치는 분들에게도 김육은 필요한 인물이요. 배울게 많은 인물이다. 갈수록 성리학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줄어드는 세상에서... 뛰어난 성리학자보다도 명재상 김육을 주목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가 많은 명재상을 낳았지만, 김육과 같이 정당성(정통성)을 가지면서도 뛰어난 실무감각과 정치력을 모두 가진 인물은 흔치 않다. 또한, 그들이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기도 쉽지 않다. 결국 이러한 인물이 많았다면.. 이라는 가정이  너무나 바늘구멍 같은 것기도 하고... 조선 지배층이 가졌던 경직성을 넘어서기에는 뛰어난 명재상 몇의 힘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3. 대동법, 왜 시행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공물을 쌀로 바꾸어 납부하는 게 누가 봐도 합리적인데 왜 쉽게 시행되지 않았을까?

 

-> 악행도 계속되면 악습이 되고, 악습이 계속되면 악법이 된다. 

 그 교통과 통신이 열악하고, 물산의 유통이 어려웠던 조선시대, 현지 특산물을 바치고, 그걸 한양까지 날라야 하는 이 어처구니 없는 조세 시스템은 근본적 의심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랜기간 악업이었디. 실제로 그 부작용이 견딜 수 없는 수준까지 터쳐나왔음에도 누구보다도 민생을 걱정했을 명재상들도 대동법보다는 '공안개정론'을 주장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 또한 대동법처럼 대대적이고 고통스러운 개혁보다는 현실적이고 즉각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공안개정론을 선호한 건 단순한 오판 혹은 기득권 옹호라기 보다는 그만큼 실질적 저항과 방해요소가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쌀로 납부를 하게 되면, 그만큼 장난칠 요소가 줄어들고, 그만큼 새는 세금을 파먹던 집단의 이익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이치. 그들의 저항은 실질적이었을 테고, 조선 후기 모든 왕들은 숙종, 정조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늘 이런 저항을 의식할 만큼, 왕으로서 권위가 약했다. 

 

4. 조선시대 사림의 이런저런 논쟁과 공방은 다시 봐도 한심하다. 민생과 전혀 무관한 일로 정파 간 다툼을 벌이는 모습이 지금의 후진적 정치판과 다를 바 없다.

 

-> 지식인의 정치투쟁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찌보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리고 어찌보면 중세 시기.. 권력다툼 와중에 민생을 앞세운 지배층은 있었어도, 그 방향에 대해 토론과 논쟁을 벌인 지배층을 찾기는 어렵다. 물론 성리학적 의례의 일면 사소한 부분 때문에 죽고 죽이는 옥사까지 일으켰던 조선시대 붕당이 지극히 정상적인 정치투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보다는 왜 이런 비대한 정치투쟁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너무 약했던 왕권, 대신이 주도하는 정치를 위해 설계된 정치체계에서의 대신의 부재 등의 조선시대 특수성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 왕권을 제약하는 대신을 제거하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왕을 포위한 사림. 세상의 권력은 분점될 수 없는 법.. 도덕성을 명분 삼아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누가 더 도덕적인가를 두고 서로간 격돌했고, 듣기만 해도 치사하고 머리가 아픈 '누가 더 도적적인가'라는 비교기준은 조선후기까지 사람의 최우선 기준으로 작용했다. 

 

 

5. 조선시대에 크게 관심이 없는데, 임용한 박사의 ‘조선국왕 이야기’를 통해 인종까지 역사를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잘 몰랐던 그  후 시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임용한 박사가 조선국왕 이야기를 썼다니, 버킷리스트에 추가해놔야겠다. 왕이 사림에게 본격적으로 포위되어 눈치게임을 벌이며 정치싸움을 벌이기 시작하는 명종 대부터 아직 책이 나오지 않았다니... 임용한 박사님이 너무 바쁘시거나... 조선 후기에 가까워지자 비판할 만한 왕의 행적이 너무 많아서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6. 이원익 이야기가 재미있다. 행적에서 감동을 받았다.  

 

-> 네 명재상 중 가장 신언서판이 딸렸다고 기록되어 있는 오리 정승 이원익에 대해 한 멤버는 행적이 감동적이었고 평했다. 다른 여러 일화는 굳이 필요없다. 임진왜란 발발 후, 빛의 속도로 신의주까지 도망친 선조 옆에는 이원익이 있었는데, 겁에 질린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치려 하자, 종친이자 시종신이었던 이원익은 일갈한다. 

 "사직을 버린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여기서 사직은 하늘신과 땅신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관념상으로 나라를 뜻한다고 볼 수 있었는데, 겁에 질린 왕에게 이 정도 직언을 할 수 있는 신하가 조선시대에 몇이나 있었을까?

 

7. 임용한 박사도 저술에서 대동법을 다룬 적이 있는데,  김육과 완전 시행에 200년에 걸린 것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 임용한 박사 책과 다시 함께 읽어보고 싶었는데, 시간문제로 그러지 못해 아쉽다. 

 

-> 나 또한 임용한 박사의 열혈팬이지만, 멤버 중 한 명은 스스로 '애제자'라 평할 정도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임 박사도 대동법에 대해서 다른 저술에서 주목했었고, 그 책을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대해 매우 냉정하게 평가하는 임 박사 답게 대동법의 시행과정에 대해서도 답답함을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학술적 가치는 없는 책이지만, 다시 한 번 도서관에서 찾아봐야겠다. 

 

8. 조선이 좀 더 발전하려면, 결국 시장이 열렸어야 하는데, 조선시대 역동성을 받아들이기엔 어렵지 않았을까. 고을별 형평성,  쌀 운송의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혔을 것이다.  

 

->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비교가 어려운 정도의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조선시대 내내 '쇄국'과 '폐쇄적 운영을 고집했던 조선은 답답하게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조선 지도층은 외교적으로 고립을 택하는 큰 오판을 했고, 그 대가를 호되게 치렀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역사를 공부하지만, 조선시대 지도층이 오판한 대가가 얼마나 컸는지 잊어서는 안되며, 역사수업에서도 계속 회자되어야 한다. 

 다만, 중국 중심 세계질서를 유지하고, 쇄국정책을 펼쳤던 판단은 지배층 그들에게는 합리적이었다. 가장 편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 바깥 사정을 외면하고 자신들이 편한 대로 판단했던 대가는 곧 '망국'이었다. 

 

9. 이이가 정승을 역임하지 못하고, 판서직에 머물렀던 이유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했던 탓이다. 결국 건강이 최고이고, 장수해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 48세에 세상을 떠난 율곡 이이. 좀 더 살았다면, 분명 정승직을 역임했을 것이다. 그가 정승직에서 일했다고 해도 곧 밀어닥쳤을 전란과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 어떤 족적을 남겼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개인사로 봤을 때 이 희대의 천재가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지 못한 이유는 노력 부족이 아니라 오직 건강 때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10. 사림이 주도한 붕당 다툼의 한심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이 추앙했던 조광조의 실체를 봐야하지 않는가.. 사림은 진정 한심한 사람들이다. 

 

-> 성리학의 정도만을 고집했던 사림은 현재 기준으로 판단하면, 분명 답답하고 비합리적인 판단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그 원인을 생각해보면, 폐쇄형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성리학이 자리잡은 채로 무려 500년간 지속되었다. 실제로 붕당이 본격화된 건 조선 개국 후 200년 쯤이 지난 시점.. 대체하거나 경쟁할만한 이념체계가 전혀 없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일본 지식인 층이 성리학에 영향을 받은 걸 생각해보면, 개국과 함께 정밀한 체계의 성리학 국가를 만든 조선의 선택은 참 빨랐고, 결국 더 이상 진화할 방향을 찾지 못한 정치이념으로서 성리학은 내부에서 권력투쟁을 위해 무의미한 분화만을 계속했고, 이는 일제시대부터 조선이 조롱받는 출발점이 되었다. 

 

11. 조선 전기에 화폐경제가 잘 발달했으면 어땠을까. 이 시기라도 세금을 화폐로 거둘 수 있었다면 획기적이었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다.  

 

-> 김육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했던 것이 동전유통이다. 1678년 숙종 4년이 되어서야 겨우 조선에 동전으로 상평통보가 유통되었다. 이렇게까지 화폐가 유통되지 못했던 데에는 많은 원인이 있지만, 당연히 한 멤버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 자체 잉여생산물이 너무 적었다. 여기 덧붙여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역사를 들여다보면, 매사 원인과 결과가 있고, 분석을 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도 한 순간, 그리고 일정한 짧은 시기 안에서는 개인 혹은 집단이 그려낸 방향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기도 했다. 

 조선 화폐경제 발달이 미진했던 것에는 많은 이유가 중첩되었으나, 조선 초 '지전' 유통 대실패, 조선 후기 일시적이지만 활발했던 '은' 유통 등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2. 성리학이 한국을 망쳤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많이 들었다.. 특히, 사농공상 등 경직된 사고관이 너무나 아쉽다. 

 

->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조선시대 경직된 사고관을 아쉬워 하겠으나... 중세시기 유연한 사고는 어디까지나 가능했을까도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유럽에서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시작된 자본주의 발달이 조선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더 중요하고, 그 원인 분석에 있어서 성리학이 꼭 메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

 

13. 조선시대에 최고위직을 역임한 관료는 능력치에서 육각형으로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었다.

 

-> 조선시대를 통틀어 대단한 재상 넷을 모았으니, 이들의 출중한 능력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이의 천재성, 즉각적인 상황 파악, 이원익의 성실성, 그에 기반한 중국어, 조익의 지식을 집대성하고 실무방안을 도출하는 능력, 김육의 정치감각과 끈기 등은 모두 현재에도 유효한 성공을 위한 덕목이다. 역사에서 육각형 능력치를 갖춘 인물을 만나는 건 참 반가운 일이고, 그래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반가운 책이다.  

 

14. 이이의 사망원인은 아마도 고혈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전문가인 멤버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졌다가 한 달 후 사망한 이이 사망원인을 고혈압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당뇨 등 다른 질병의 기저를 살펴보면, 고혈압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혈압 관리에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을 멤버들에게 당부했다. 

 

15. 만약 10만원권 지폐가 발행된다면, 김육이 화폐 인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아이디어... 이념을 떠나 끝까지 실용을 추구하고, 민생을 걱정했던 명재상만큼 화폐 인물로 적합한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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