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모습 - 한국사

울림이 있었던 기념관 방문 - (방문 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마셜 2024. 8. 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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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기념관 기념품)

 

 가운데 훤칠한 외모에 거구의 김구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임시정부 인사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어두운 표정은 아니지만, 활짝 웃고 있지도 않은 이 사진은 해방 당시 임시정부 상황이 얼마나 어정쩡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애초에 교수님을 모시고, 젊은 대학원생들과 동행한 기념관 방문에서 좋은 사진을 찍으며 만끽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몇몇 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이상하게도 동문 연구원이 준 선물의 이 흑백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교수님께서는 울림이 있었다고 방문을 평하셨다. 

 4층으로 만들어진 적당한 크기의 기념관을 돌아보는 데, 다소 부족한 두 시간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임시정부에 대해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진중하게 생각에 잠겨본 건 평생 처음이다. 아니 사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2~3시간에 걸쳐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적은 별로 없다. 대학원 과제를 위해 밤을 새운 적도 있지만, 그 쫓기는 듯한 사투가 진중하게 생각에 잠기는 경험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버스는 무더운 광복절 다음 날, 기념관 바로 앞 정거장에 정차했다. 너무나 공공 시설 같이 생긴 기념관은 정말 전시와 휴식, 관람객 맞이를 위해 설계된 듯 적당했고, 위치 또한 서대문 형무소와 독립문이 보이는 곳이라 절묘했다. 

 

(기념관 팜플렛의 층별 안내)

 

 층별로 군주의 날에서 출발해서 정부까지 다다르는 이 여정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온전히 임시정부의 힘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국민의 나라와 정부 사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 사람들의 스토리가 곧 역사이고, 그 역사를 알아야 임시정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되지만, 뒤집어 말하면, 결국 이 기념관에서 임시정부에 대해서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이 '사람들'이라는 뜻도 된다. 

 

 역사는 결국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고, 끝까지 독립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임시정부를 지켜왔던 걸 모르지 않는다. 다만, 이른바 정부라면, 시대적 한계로 정상적 활동을 하지못한 정부라 할지라도 당시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로서, 대한민국 헌법에 법통을 인정받은 독립운동 단체라면, 사람들보다는 무엇을 했는지가 더 우선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가 어려운 것이 역사적 사실이요. 냉엄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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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활동과 한인애국단 설명)

 

  그 엄혹한 시기, 끝까지 독립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기치를 들었던 것은 당연히 기억해야할 사건이며, 임시정부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것 또한, 미군정의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정부'라면, 그 활동이 제일 먼저 기억되어야 한다. 

 기념관도 이런 부분에 대해 소홀하지는 않아서, 위 사진의 군사활동 설명도 꽤 자세하고, 한인애국단에 대해서도 그간 연구성과를 잘 반영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교과서에서도 꽤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만, 해방직전 광복군이 임시정부 주도로 조직되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기념관을 통해 새로운 알게 된 사실로, 미국에서 이른 시기 한인비행단이 조직되어 공군의 모태라 평가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군사활동 들은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을까? 그다지 실효성이 없었어도 결국은 무장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분명 역사적으로 가치 있다. 그리고 한인애국단 의거를 통해,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조선인의 독립의지와 무장투쟁역량을 다시 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외 조직적 군사활동은 사실상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며, 광복군의 병력은 최대 564명이었고, 실질적으로 전투에서 활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OSS 침투계획도... 유일한 등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조선청년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조선 지배에 심대한 타격을 줄 계획을 짜고 훈련을 임했던 건 사실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시기...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훨씬 많은 수의 조선인이 일제와 직접 싸우고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된다. 결국 임시정부가 일본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것에 어느 정도 적극적이었는지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메스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당장 2차 대전 시기 프랑스의 드골 임시정부가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명분'이나 '역사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에 남아있었던 수십만의 군대 때문이었다는 것도 함께 가르쳐야 올바른 역사인식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공채 발행)

 

  애써 공채를 발행했지만, 일제의 의심을 받을까 두려웠던 조선인들은 공채를 사고도 바로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 당시의 처참한 현실이 와닿음과 동시에, 임시정부가 했던 다양한 활동의 바탕에 깔린 근본적 고민을 살짝 엿본 기분이었다. 어떤 활동을 하던, 결국 모든 것은 '돈'의 문제라는 걸 그 분들도 잘 알앗고,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했던 노력을 볼 수 있었고, 그 노력에 호응하여, 미래에 휴지조각이 될 공채를 기부하듯 돈을 주며 샀던 조선인들의 울분도 다시 한번 보였다. 

 

(서대문형무소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어두운 과거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됨을 강조하듯, 기념관 맨 위층 전망대에서는 서대문형무소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수많은 불령선인을 고문하고 죽였던 악명 높은 장소보다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건물은 훨씬 높이 서 있다. 2024년 현재 임시정부의 위상이 이렇게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사 그 실효적 활동이 부족했어도, 정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귀국으로 끝났어도, 활발한 연구와 관심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누군가에게 행동이 부족하다고 비난할 수 있는 건, 스스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한 사람이다. 생각만 가지고 있어도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 시기, 설사 엄청난 결과를 내지는 못했어도, 목숨을 내놓고 모두를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분들의 과거 행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에 뭐 대단한 이유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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