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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상 23] 도서관 책을 잃어버렸다면?

마셜 2024. 8. 15.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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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하철 유실물 안내 사이트)

 

 매우 피곤했던 더운 여름날, 출근길이었습니다. 

 독서모임을 하루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쫓기기도 했지만, 사실 이런 실수를 저지를 컨디션은 아니었어요. 평생 수많은 책을 봤지만, 이런 적도 없었죠. 

 그 날 아마 평생 처음으로 지하철에 읽던 책을 두고 내렸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공공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말이죠. 

 책을 잊어버린 걸 깨달은 건 환승을 위해, 한 10분쯤 다른 플랫폼으로 걸어가서, 2호선을 탄 후였습니다. 책을 두고 내렸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채, 가방을 열어서, 읽던 책 '생각의 지도'를 다시 찾았죠. 열차가 한 두 정거장쯤 더 갔을까... 아무리 찾아도 책이 없었고, 환승 전 3호선에서 읽던 책을 내가 어떻게 했지... 기억을 더듬자 겨우 떠올랐습니다. 내가 읽던 책을 좌석 무릎 옆에 껴두었다는 게요. 쏟아지는 졸음에 그렇게 책을 껴두고 몇 정거장을 졸다가, 환승해야 할 을지로 3가 역에서 화들짝 놀라서, 그대로 책을 두고 내린 거죠. 

 부랴부랴 유실물센터에 전화를 해봤지만, 방금 내린 것도 아니고... 앉았던 자리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도 아니어서... 신고하는 와중에도 점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결국 몇 시간 있다가 친절하게 전화를 주신 직원분께서는 해당 열차를 뒤져봤는데, 책은 나온게 없다는 답을 주셨습니다. 

 

 일단 다음 날로 다가온 독서모임 일정에 바로 다른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빌려서 급한 불을 껐습니다. 리처드 니스벳 교수의 이 명저가 베스트셀러라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다른 도서관에서도 여러 권이 구비되어 있더군요. 다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열독을 했는지 책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도서관 책에 이런 필기를...)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이런 메모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간이 크다고 할까요. 죄의식이 없다고 할까요. 아무튼 이 정도로 책을 엉망으로 만든 건 처음 봤습니다. 메모한 수준으로 봤을 때는, 열심히 학습하고자 했던 대학원생인 듯한데... 전 앞으로도 절대 이런 짓은 말아야지...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어쨌든 가까스로 다른 책을 빌린 덕에, 독서모임 일정에 맞춰 좋은 책을 완독할 수 있었고, 재미있는 책 이야기 끝에 또 다른 좋은 포스팅이 남았지만, 어쨌든 도서관 책을 잃어버린 나비효과는 거의 책을 망가뜨린 수준인 누군가 열공의 흔적을 보게 되는 특이한 경험까지 이어졌습니다. 

 

 

독서42 - 생각의 지도(2004, 리처드 니스벳)

고맙게도 독서모임 멤버들은 계속해서 다양한 책을 추천해주고 있다. 이 책도 내게는 전혀 관심 없는 분야에 해당하는데 추천멤버는 10년전 쯤 읽은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는 추천이

george-marshall.tistory.com

 

 독서모임을 잘 마무리하고 나니, 이제 잃어버린 책을 어떻게 하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결론은... 도서관 표시가 버젓이 붙어있는 헌 책을 누가 집어갔을까... 하루 이틀 걸리더라도 기다려보면 유실물센터에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며칠 기다려보는 걸로 기울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기다리는 사이에, 책은 연체가 되었고.. (하필 상호대차로 빌린 책이라 연장도 안되었습니다)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죠. 주말 오랜만에 지하철로 외출하던 날, 오늘은 해결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도서관에 전화를 했습니다. 사서 분의 친절한 목소리 앞에, 저는 괜히 죄지은 기분으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미 홈페이지를 통해, 같은 책으로 변상해도 된다는 사실을 파악했지만, 이 책은 워낙 베스트셀러로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탓인지, 인터넷 서점에서 확인한 ISBN 코드와 도서관 대여정보에서 표기되는 ISBN 코드가 달랐습니다. 

 

(대출정보에서도 확인가능한 표준번호 ISBN)

 

 여러 판본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책으로 반납을 해야하느냐는 질문에, 사서분은 친절하게도,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인터넷서점 링크를 문자로 보내주겠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고, 문자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 사이 저는 걸어서,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라딘중고서점에 도착, 책을 찾았습니다.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변상할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 정도 베스트셀러라면 다른 ISBN 코드를 가진 여러 판본도 중고로 팔리고 있으리라는 짐작도 있었죠. 다음 일정 때문에 문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대출정보에 있는 코드 8934914483 3300의 책을 사서 서점을 나서는 순간 문자가 왔습니다. 

 

(친절한 도서관 안내문자)

 

 반가운 문자의 링크를 바로 클릭해서 바로 코드를 확인했습니다. 하필이면, 받은 링크는 다른 코드더군요. 두 코드의 책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혹시나 불편한 상황이 발생할까봐 다시 서점으로 들어가서 환불 후 ISBN 코드가 일치하는 책을 구매했습니다. 5분 전에 샀던 중고책을 환불하는 아저씨가 이상했는지, 불퉁한 목소리로 환불 이유를 물었던 알라딘 직원분이 기억에 남네요. 

 

 어쨌든 이렇게 책을 구하고 나서 도서관을 방문했습니다. 칠칠치 못하게 책을 잃어버렸다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아서, 도서관에 잠깐 다녀온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지요. 요즘은 무인화가 워낙 잘되어 있어서, 사서 분들과 대화를 할 일이 없는데... 상호대차 이외 거의 처음으로 사서분께 상황을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문자를 보내주셨던 사서 분만큼이나 친절하신 사서분은 상황을 이해하시고 책을 확인하시더니, ISBN이 다르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책의 주민번호 같은 코드라면서... 이게 같은 책으로 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죠. 

 

(다시 공공도서관으로 돌아간 생각의 지도)

 

 제가 그 부분이 염려되어 사전에 전화문의를 했고, 문자를 보내주셔서, 그 링크에 있는 책과 같은 걸 구해왔다고 설명을 했더니, 문자를 살펴본 사서분은 그럼 문제 없다면서, 상호대차이니, 원래 도서관으로 책을 돌려보내고 반납처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대화를 나눴던 사서 분은 아침 출근 길에 가끔 마주치는 분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들고 도서관을 향해 길을 재촉하는 걸 뵌 적이 있죠. 그래서인지 왠지 무뚝뚝하시지 않으려나 했는데, 친절한 설명에 근무 중 CS마인드가 훌륭하시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골치아팠던 숙제를 한 것처럼 개운한 기분으로 도서관을 나섰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실물센터를 다시 봤지만, 접수된 책 중 제 것으로 보이는 건 없더군요. 그렇게 제게 왔던 '생각의 지도' 세 권 중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보냈고, 누군가가 엉망으로 만든 한 권은 며칠 머물다 제 자리로 돌아갔죠.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은 ISBN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 주고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무더위에 스트레스 지수가 높았던 탓인지.. 아니면 '가족 일-대학원 논문 고민-회사 일-독서모임' 이 모든 것이 주는 압박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소 잃고 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고, 앞으로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때는 꼭 두 주머니 중 안쪽에 단단히 넣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그래도 변상도 상호대차로 잘 처리되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절하게 처리해주신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남기면서... 혹시나 책을 지하철에 두고 내리신 이웃 분이 계시다면!! 꼭 즉시, 몇 분이라도 빨리 유실물센터로 전화하시기 바랍니다. 역무원 분께서 바로 열차에 타서 확인해 주시는데... 멀리 가면 갈수록 저처럼 못 찾을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출처: 서울교통공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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