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상 32] 세월의 흔적을 못 박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
이어폰 낀 채로 조깅을 하다보니 예상보다 너무 멀리 온 듯 싶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딴 생각을 좀 많이 했네요. 와이프가 일어나기 전 어서 집으로 들어가야 할텐데요 ㅎㅎ 요즘 조깅하면서 한국 감성가요를 들으면 무척 재밌더라고요.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에 서서 파란불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물끄러미 전봇대가 눈에 들어오네요...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전봇대입니다. 소문에 주로 소나무를 사용한다고 하던데...
캘리포니아 전봇대의 소재가 아직도 목재인 이유는 곧게 뻗은 나무들의 공급이 넘쳐나는 미국인지라 굳이 시멘트나 강철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인 것 같습니다.
오래되고 볼품없이 낡아보여 평소에 무심하게 지나쳤던 수많은 나무 전봇대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제 시선을 고정시키네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전봇대에 박힌 수많은 못들과 호치케스 심들 때문입니다...
도저히 몇 개나 붙어있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 입니다. 나무가 오래되어 짙은 갈색이 되는 동안... 못들과 호치케스 심들도 녹이 슬어 덩달아 동일한 색으로 보호색을 입었네요.
특히 나무가 연한 재질이다보니... 손쉽게 못이나 호치케스 심으로 광고판을 붙여놓기 안성맞춤이었을테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테이프보다는 확실하게 고정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요.
누군가 붙여놓은 광고 위에 또 다른 광고가 붙여지고 그리고 떼어지고를 도대체 얼마나 반복했을까요? 종이 광고들은 누가 떼어갔는지 전부 사라졌지만 미처 손대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구부러진 못들과 녹슨 호치케스 심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고스란히 세월의 흔적을 이루고 있네요...
미국 역시도 사람 사는 세상이 다 비슷한 것처럼 광고내용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집 세놓는 광고부터 구인구직, 신용대출... 그리고 잃어버린 사람이나 애완동물을 찾는 광고 등... 한국 전봇대의 광고들과 내용이며 정보는 대동소이하건만 딱 한가지! 과외광고는 미국와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ㅎㅎ
아주 오래전 저의 대학시절이 떠오릅니다. 소개받아 과외 가르치던 학생이 갑자기 관두는 바람에 제 스스로 새로 구해야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고심끝에 동네 전봇대마다 과외광고를 붙이러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행여나 사람들이 많이 보았을까 노심초사 제 연락처 담긴 오징어다리를 얼마나 떼어갔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하던 기억도 나구요 ㅎㅎ 인기가 많은 과외 선생이고 싶은 마음에 제가 제 연락처를 몇개씩 떼어내기도 했습니다 ㅎㅎ
당시 광고효과는 그닥 별로였던 것 같아요. 문자는 몇개 왔지만 조건이 안맞아 연결되진 못했고 결국 알음알음 친구의 소개를 받아 다시 과외선생 자리를 구했었네요. 제가 붙인 것은 그야말로 수많은 광고 홍수 속에서 그저 평범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며칠 뒤 가보니 전봇대 제 광고 옆자리에 다른 사람도 과외광고를 붙여놓았더군요... 헉! "서X대 법X대 재학중" !! 제 것은 그대로인 반면 그 분의 연락처 오징어다리는 거의 다 떼어갔더군요. 이게 세상의 현실인가... 얼마나 부러웠던지요 ㅎㅎ
나무 전봇대 아주 윗편. 사람 키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남은 단 하나의 광고는 역시나 돈관련입니다... 한국식으로 하면 "급한 돈 빌려드립니다...!" 인 것 같네요.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한눈에 들어오는 광고일듯 싶습니다.
반면에 사람 키가 닿는 높이에는 이렇게 집중적으로 못들이 박혀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광고들이 이곳에 붙여지고 떼어지고를 반복했을까... 마치 지나가는 세월의 흔적을 잡아서 고스란히 못으로 박아놓은 것만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 나무 전봇대가 쓰러지지 않는 한... 광고는 계속 붙겠지요? 생각해보니 못을 억지로 떼어내기보다는 이렇게 그대로 두는 것도 인상적인 것 같습니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낸 멋진 아트 콜라보레이션이 된 것 같아서요 ㅎㅎ 제목을 붙이자면 "세월의 흔적을 못박는다면?"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조깅 중 잠시 횡단보도에 서서 별 생각을 다해보네요. 계속 듣던 한국 감성가요 덕분일까요? 아차... 상상은 이제 그만하고 와이프 깨기 전에 얼른 집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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