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조직이 비대하고, 업무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큰 정부 vs 작은 정부' 논쟁은 긴 역사를 가진 첨예한 대립이고, 한쪽이 옳다고 쉽게 결론 낼 수도 없다.
이러한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흥미롭게 바라볼 사건이 스포츠계에서 터졌으니, 바로 최근 있었던 여자배구 오지영 선수 트레이드(GS칼텍스->페퍼저축은행, 선수지명권 트레이드)로 인해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프로스포츠 표준계약서가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트레이드 발표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부속합의가 문제가 되었는데... 즉, 양 팀이 올 시즌은 오지영 선수를 두 팀 간 맞대결에서는 출전시키지 않는 것으로 사전합의한 것이다.
예전 축구에서 임대계약 시 볼 수 있었고, 한국의 경우 군입대 선수로 운영하는 김천 상무가 원 소속팀과 경기에 군복무 중인 소속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기도 했지만, 이는 모두 과거 이야기.... 시대 흐름에 따라 없어진 트레이드(계약) 행태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 구습이 되살아나며, 논란을 촉발시켰고, 결국은 이러한 출전불가 합의가 '프로스포츠 표준계약서' 조항을 위반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언론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비난이 쏟아지면서 결국 한국배구연맹은 프로스포츠 표준계약서를 행정규칙으로 고시한 문화체육관광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1월 23일 오지영 선수가 벤치에서 응원단장이자 코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덕인지, 시즌 1승에 불과하던 페퍼저축은행이 하필이면 GS칼텍스를 꺾고 2승을 달성했고, 사람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유권해석 결과가 어찌 나오던 다시는 어떤 팀도 이런 트레이드 조건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비난이 쏟아졌고.. 리그는 계속되어 올스타전까지 치르고 그렇게 이 사태는 잊혀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꺼져가던 관심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계기가 있었으니, 문광부에서 신속하게 한국배구연맹의 유권해석 요청에 대한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구단 간 경기 출전 배제 합의에 따른 선수의 출전 불가 사항에 대해서 명시적인 차별 금지 사유로 규정하지는 않으나, 선수의 권익이 침해되거나 구단 간 공정한 경쟁을 저해할 요소가 있다고 사료돼 연맹 규약 내 해당 사례 금지조항 신설 등 제도적인 개선 방안 마련을 권고한다'
'표준계약서 상 차별에 해당한다고 명확히 해당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게 안 하셨으면 좋겠네요.'라고 번역할 수 있는 위 문구는 그야말로 권고 역할에 충실했다.
여기서 생긴 의문. 도대체 프로스포츠 표준계약서는 무엇이고,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법적으로 표준계약서는 문광부에서 만든 행정규칙이다. 따라서, 지켜야 하는 법 조항이나 마찬가지이다.
(친절하게도 해설서까지 고시되어 있다.)
다만, 처벌조항이 없다. 애초에 표준계약서에 어긋난다고 처벌을 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의문이 생긴다.
전쟁과 같은 순위경쟁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프로스포츠에서 이 계약서를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결국 이 계약서는 법이나 마찬가지이긴 하나, 어긴다고 해서 처벌은 없는 선언적인 의미 혹은 장기적으로 개도하는 가이드라인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의문. 과연 이 표준계약서는 필요한가?
필요하다. 안타깝지만, 한국 프로스포츠(구기종목)는 연맹 혹은 팀 혹은 선수협 주도로 제도를 개선해 나갈 토양을 갖추지 못했다. 불과 3년 전 여자배구에서 일어난 비극이 이 표준계약서 도입의 계기가 된 것은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사실 관계가 다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계약관행이나 연맹 규약으로는 팀이 임의탈퇴를 선수압박용으로 쓸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이제는 문광부에서 법규정을 만들고, 표준계약서와 해설서를 도입하는 노력을 한 덕에.. 적어도 팀이 임의탈퇴를 통해 선수를 압박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또한 퍼블리시티권이나 선수 품위 유지 등 언뜻 상식적이지만, 운동만 한 선수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프로스포츠 계약상 필수적 부분에 대한 이해도도 많이 올라갔을 것이다.
다만, 이 모든 순기능을 알지만, 이 번 유권해석은 아쉽다.
생각해 보자 애초에 트레이드를 추진했던 GS칼텍스와 페퍼저축은행은 배구연맹에 출전불가 사전합의가 가능한지를 질의했고, 연맹은 문제없다는 답변을 했다. 하지만 비난여론이 들끓자, 결국 문광부에 유권해석을 받았고, 입장이 바뀐 것이다.
문광부의 유권해석은 일면 타당해 보이고, 그나마도 권고 수준에 불과하지만, 생각해 보자. 어찌 보면 배구연맹은 구단의 일 처리에 있어서, 정확한 판단으로 옳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린 셈이다.
애초에 잘못된 판단으로 트레이드에 불합리한 조항이 삽입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도 실수지만, 뒤늦게 정부에 판단을 받아 입장을 뒤집은 것은 더욱 문제다. 그럼 앞으로도 표준계약서에 대해 잘 판단이 서지 않으면 문광부에 계속 해석을 요구할 것인가?
솔직히 문광부에서 표준계약서를 만든 것도 필수불가결했는지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프로스포츠의 생리는 결국은 공정한 대결.. 거기에는 돈 싸움도 포함되고, 트레이드를 통한 전력보강도 활발하도록 장려되어야 한다. 그 와중에 출전금지라는 조건이 따라붙은 건 잘못되었지만, 뭔가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마다 문광부 해석을 받을 것인가? 이는 결국 연맹의 무능력을 자인하는 것이자.. 가뜩이나 약한 연맹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것이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프로배구연맹은 이번에 참으로 안 좋은 전례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차라리, 비난이 폭주하더라도 외부 법률 전문가에게 다시 의견을 요청한다거나, 재검토했다거나 등의 내부 일처리를 통해서 어떻게든 오판을 인정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문광부의 권고에 바로 입장을 바꿀 수 있었다면, 스스로 바꾸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유권해석은 이루어졌고, 연맹은 따르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또 소급적용은 어려워서 오지영 선수는 어쨌든 올 시즌 GS칼텍스 전에서 볼 수 없다. 배구팬으로서 불합리하다 생각은 들지만 뭐.. 벤치에서 응원단장이나 코치로서 역할을 하는 오지영 선수도 볼만하기에, 그러려니 넘어가려 한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이 김연경 선수가 은퇴하기 전에 연맹과 협회를 중심으로 배구가 발전하는 계기로 작용되길 바란다.
ps.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 하나.
표준계약서를 보면, '출신지역, 출신학교, 외모 등의 사유로.... 배제하는 등의 차별적인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되어있다.
그럼 만약에 출신지역 경기에 구름 같은 팬을 몰고 올 수 있는 출신 선수가 있어서, 엔트리에 넣었다고 하면, 엔트리에서 제외된 선수는 차별당한 것인가?
뛰어난 외모로 팬클럽을 몰고 다니는 선수가 있어서, 팬클럽이 운집한 경기를 앞두고, 팬서비스를 염두에 둔 가점을 얻어 교체출전 기회라도 얻었다면, 이 또한 차별인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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