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AI 08. 해보기나 했어? 도전의 아이콘! -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 (1)
과거 오래전에...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선발해서 동유럽 인근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현지 본부와 공장으로 파견 연수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름 경쟁을 뚫고 선발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부푼 꿈을 안고 현지에 도착한 저와 동기 친구는 정말 난감했는데요, 주어진 과제가 당시 저희로선 정말 쉽지 않은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지역 다른 브랜드의 자동차 딜러샵들을 (자동차 대리점) 일일이 직접 방문하고 인터뷰하여 실태 조사를 하고, 현대자동차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될만한 다양한 방안을 제안하라는 것이었거든요. 둘다 운전도 잘 못하지... 영어도 잘 안 통하지... 이 생면부지의 지역에서 좌충우돌 며칠간 엄청 헤멨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엔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요. 그러나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저 무작정 딜러샵들을 계속 방문할 수 밖에 없었지요. 한국에서 온 학생들이라고 소개하니 어떤 곳에서는 일없다고 문전박대도 당하고, 어쩔 때는 마치 껌팔러온 사람들처럼 들어가도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문 열고 들어가다가 좀 반응이 아니다 싶으면 가슴이 철렁해서 바로 다시 나온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당시에 케이팝이나 한류만 있었어도! 정말 좋았으련만...ㅎㅎ 한국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라 멀때같은 동양의 대학생 둘을 환영해주는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며칠간 무시를 당하다보니 그에 비례하여 점점 저희들의 안면이 두꺼워지더군요. ㅎㅎ 나중에는 동기도 저도 거의 전문 보따리 장사꾼마냥 변신해서 당당하게 돌아다녔습니다. 관계자들을 만나면 자기소개도 거의 외우다시피 자동적으로 나오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두유 노우 코리아? 두유 노우 태권도? " 이렇게 들이대보기도 하고... 만약에 그쪽에서 현대 직원 아니냐고 의심스러우니 신분증 좀 보자고 하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며 능글맞게 넘어갈 정도가 되었었지요. 같이 다녔던 대구 출신 동기의 말빨이 한 몫을 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초반에 욕먹고 혼나고 다니다보니... 이후에는 점차 저희들만의 창의적인 방법이 생겨서... 말빨이 좋은 동기가 딜러샵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틈을 타서 저는 얼른 카메라로 내부 사진을 찍는 등의 전략을 동원하기도 했었습니다.
연수의 막바지에 이르자... "맨땅에 헤딩"식의 이러한 교육의 원리가 점차 이해되더군요. 만약에 각종 좋은 지원을 처음부터 받았었더라면, 그리고 프로젝트가 사무실 안에서만 해도 되는 것이었다면, 우리의 몸은 편했겠지만 우리는 무언가 더 해보려하지 않고 정말 안주했었을 것 같습니다. 누군들 쉽고 편안한 것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스스로 이겨내고 터득하면서 생생한 현장을 몸으로 배우라는 주문이었죠. 현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단 부딪혀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음을 회사측에서는 미리 알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저희는 지역 딜러샵들을 일일히 방문하고 현지인들과 질의응답하면서 그 나라의 자동차 문화를 배울 수 있었고, 현대자동차에 대한 현지인들의 생각과 실감나는 실시간 반응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발주자로서 현대자동차가 지역 시장의 최전선에서 점유율을 확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두 눈으로 확인을 할 수가 있었지요.
정말 일은 이렇게 터프하게 하였지만, 직원 분들은 저희들을 얼마나 따듯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셨는지 모릅니다. 본부장님을 비롯하여 공장장님, 그리고 일반 직원 분들도 저희들을 항상 격려해주셨죠. 발표 전날 그동안 저장한 자료들이 절반 이상 날라가서 사무실서 친구와 밤새며 다시 작성하느라... 발표 시간 직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고요. 그리고 연수가 다 끝났을 때 환송회도 열어주시고, 한국에 복귀하기 전에 그냥 가지 말고 현지에서 여행이라도 좀 하고 가라고 일정도 며칠 일찍 끝내주시고, 금일봉도 전달해 주실 땐 정말 눈물날 뻔했지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연수가 긴장되고 불편하다고 처음에 포기해버렸으면 어쩔뻔했나 정말 아찔해지더군요. 결과를 떠나, 무엇보다도 정말 시도라도 해보았던 것은 와... 내 인생에서 정말 좋았던 선택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뒤로 제 스스로가 이전보다는 좀더 적극적으로 성격이 변했던 것 같습니다.
"이봐! 해보기나 했어?"
여러분들은 이 말을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로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이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이라고 하지요. 어찌보면 저와 동기는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그 한마디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셈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측근들에게 이렇게 해보기나 했어? 라고 자주 되물었다고 하는데요, 가끔가다가는 눈을 부라리면서 그말과 함께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 한마디가 상대방의 잘못을 질책하는 일갈이었다가보다는... 직원들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기업가정신으로 매사 업무에 임해주길 바라는 따듯한 애정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찌보면 이 한마디에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도전정신"이 녹아있다고도 할 수 있을텐데요, 그리고 그 도전의 열정이 현대그룹의 정신으로 계승되어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오늘날 세계적인 분야로 뻗어나가는데 뒷받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가 지난 글 속에서 현대자동차의 미국 진출기를 기업의 초기 역사보다 먼저 서술하였던 것은 그들의 도전정신과 위기 관리 능력이 가장 돋보였던 시기가 바로 미국시장 진출 과정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자랑하는 그 뚝심과 과감함은 어떻게 형성이 되었고 또한 어떻게 현대자동차의 DNA로 이식되어 온 것일까요? 이번 글에서는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로 돌아가서 그 부분들을 짚어보기로 합니다.
우선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회장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순서가 될 것 같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한국 현대 경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보적인 인물로서, 흑수저 무일푼에서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된 입지전적인 인생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자주 소개됩니다. 그가 국내에서만 유명했을 거라는 시각도 있지만, 진정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1995년 세계 10대 부호 중 무려 9위에 든 적도 있었고요, 또한 1980년대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정주영 회장을 가리켜 "기업가정신"의 산증인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경영자들은 자국이 가진 거대한 시장과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성공한데 반하여, 정주영 회장은 도저히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참담한 배경 속에서 오직 기업가정신 하나를 가지고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었다는 것이죠. 그가 정확하게 본 것이, 정주영 회장은 강원도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학업보다는 농사를 권유하는 아버지를 피해 가출하여 부두 노동자, 건설 인부, 쌀 도매상 배달원 등의 다양한 일을 거치면서 자기사업의 꿈을 키웠고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현대그룹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애초에 가진 것 없이 무일푼이었기에 그의 경영은 항상 위기와 도전의 연속이었다고 하지요.
정주영 회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1940년, 서울에서 아도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정비소를 창업하여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 차량을 운전하거나 정비소에 차량을 맡길 정도면 보통의 권력이나 부를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겠지요? 꽤나 돈좀 굴린다는 부자들과 세도가들의 고급 수입 차량들을 대상으로 정비를 하면서 정주영 회장은 미래의 큰 꿈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경쟁사에 비해서 확실하고 신속하게 정비를 해주는 대신 더 많은 서비스료를 받는 전략을 바탕으로 꽤 경영이 잘 되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심화되자 일제에게 강제로 기업 운영권을 반납해야했고, 그후 업종을 변경하여 트럭 운송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다행히 해방 이후에는 다시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여 자동차 정비업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정주영 회장의 기업들은 "현대"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게 되지요.
현대자동차는 한국이 전쟁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해 힘차게 도약하고 있었던 1967년 설립되었습니다. 경영 일선에서의 정주영 회장이 다른 경영자들과 달리 특별했던 점은 "기업가정신"이 남달랐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직접 자동차를 조립하는 회사를 만들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 발전을 위해서 그저 외국 브랜드의 하청을 받아 조립하는 수준으로 머무르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로서 공학적인 전문지식은 전무했지만, 그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자신감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걸음씩 이를 현실로 이루어갑니다. 그리고 그의 신속한 판단력은 위기 때마다 빛을 발하여 현대자동차를 비롯하여 현대그룹의 규모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저도 학창시절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을 여러번 읽으면서 그의 도전정신과 기업가정신에 매료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의 근현대 경제 발전사에서는 그의 존재 없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숨가쁘게 전개되었던 격동의 과거 시절을 배경으로 한국의 정치 혹은 군부를 소개하는 드라마에서도 빠짐없이 그가 등장하는 걸 보면 알 수가 있지요. 이전에 "영웅시대"라는 드라마에서는 배우 차인표를 앞세워 정주영 회장의 다양한 일화들을 소개했었지요. 그가 일궈낸 업적들을 보면 이것들이 과연 한 리더의 지휘 아래 이룩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어마무시합니다... 그럼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가 일군 업적들을 한번 되짚어 볼까요?
우선 그는 정부의 저명한 인사들도 모두 반대한 경부고속도로를 1970년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 완공하여, 그동안 서울과 부산 사이 수일이 걸리던 운송기간을 반나절로 줄이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이 일일생활권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해외 수출입 및 물류의 혁신을 이룰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는 울산에 조선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조선소도 없이 유조선을 수주했다고 하네요. 여기에는 정말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는데요,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기 위해 도움을 줄만한 영국의 핵심 관계자를 찾아갔는데 그는 조선소 건설이나 배 건조 경력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면전에서 딱 잘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물러서지 않고,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보여주면서 한국은 영국보다 먼저 300년 전에 세계최초의 철갑선을 만든 나라라고 설득하여 결국에는 차관에 필요한 추천서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2년 3개월이라는 초단기간에 조선소를 완공하면서 동시에 26만톤급 유조선 2척 건조를 동시에 끝냈는데 이것은 세계 조선사에 유일무이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또한 1980년대 유조선으로 물살을 막아 서산 간척사업의 공사기간을 3년 단축하고 공사비 290억원을 절감했다고 하는데요, 사람들은 이러한 천재적인 발상을 두고 "정주영 공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경영 관련된 업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국위선양을 위해서도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981년에는 올림픽 추진 위원장을 맡아 다른 나라들보다 뒤늦게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5개월만에 1988년도 올림픽 유치권을 따낸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전두환 정부의 능력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서, 어찌보면 정부에서 정주영 회장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맡게 된 일이라고 하는데... 국민들을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다며, 정주영 회장은 이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대면서 해외 관계자들과 기업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이뤄낸 성공이라고 하는데요,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통받고 있는 한국이야말로 전세계가 양 편으로 나뉘어 극한 대립해온 냉전 상황을 종결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외에도 정주영 회장의 뚝심과 현대그룹의 신속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들은 많지만... 아마 그 중에 최고는 1976년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아닐까 합니다. 이곳에서의 공사는 당시에 세계 건설업계에서 "20세기 최대 역사"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고난도였다고 합니다. 저가수주로 밀어 붙인 끝에 현대그룹은 이 공사를 따냈지만, 곧 이어 큰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저가수주를 하였기에 확실한 비용 절감을 하지 않으면 공사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공사에 필요한 모든 건설 기자재를 한국 울산공장에서 직접 만들어 배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나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우디의 공사에 필요한 거대한 철제구조물은 높이가 36미터에 무게가 550톤으로서 거의 왠만한 건물 크기와 비슷한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큰 구조물을 바다에 띄워 장거리 운송을 한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미쳤다고 했고 실패를 장담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철제구조물 89개를 19차례에 걸쳐 배로 운송하였다고 하죠. 참고로 울산과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간 거리는 1만2천킬로미터로서 배로 35일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특히 적도 부근에는 폭풍과 태풍이 많은 험난한 지역임에도, 이러한 척박한 날씨를 뚫고 실패없이 운송을 마치고 이후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업적들은 단순히 한 기업가의 성공적인 경력에만 국한하여 칭송하기에는 좀 아까울 정도로 대단한 성과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도전적인 시도들이 현대그룹의 성장을 넘어서서, 한국의 경제성장에 적지 않은 파급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공사의 수주액만 당시 한국 연간 예산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하니까요. 또한 당시에는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액이 3천만달러 정도였는데, 현대그룹이 중동에 진출한 초기 3년간 한국에 송금한 금액은 자그마치 9억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의 불확실하고 위험한 기업환경에서 정주영 회장을 필두로 한 현대그룹이 각종 대형 사업들을 앞장서서 이끌어나감으로서 다른 국내 기업들도 이를 모방하여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죠. 이렇게 하여 한국의 경제 환경이 좀 더 탄력적으로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다시 자동차 이야기로 돌아와봅니다... 1960년대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시절입니다. 폐드럼통을 손으로 직접 두드려 미군의 지프 스타일을 따라 만든 "시발자동차" 가 1955년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이래, 1962년 박정희 정부는 자동차 진흥 정책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근대적인 자동차 공업 발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합니다. 당시의 자동차공업보호법은 해외 자동차 기업이 한국에 진출할 때 반드시 한국의 업체와 협력기업을 세워야한다고 못박습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한국에는 다양한 자동차 기업들이 생겨나게 되는데요, 기아자동차의 전신이던 경성정공은 이전에 설립되었으나 일본의 마쯔다와의 기술제휴로 1962년부터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었고, 같은 해에 새나라자동차가 일본의 닛산자동차와 기술제휴로 설립되며 이후 1966년 신진자동차공업으로 변경됩니다. 그리고 1963년에는 하동환자동차공업이, 1965년에는 아시아자동차공업이 설립됩니다. 이렇게 보면 1967년 현대자동차가 제일 막내로서 늦게 설립된 셈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었죠?
현대자동차의 설립이후 현대그룹의 계열사가 점점 늘어나고 자동차 부문의 직접 관리가 어렵게 되자 정주영 회장은 그의 넷째 동생인 정세영에게 현대자동차의 총 지휘를 맡기게 됩니다. 원래 그는 큰형님인 정주영 회장의 지원하에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로서 한국 귀국이후 학계로 진출하기를 소망했던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실질적으로 집안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해온 큰형님 정주영 회장의 부탁을 거절하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결국 한마디 거절을 하지 못한채 형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그의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는 지난 2000년도까지 32년간 현대자동차를 맡아 이끌면서 현대자동차의 기본틀을 완성한 인물입니다. 자동차 불모지인 한국의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포니 독자 모델 개발, 독자 엔진 개발, 해외 및 미국 진출 등 그는 형과 함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일구어냅니다.
설립 초기 기술이 전무했던 현대자동차는 우선 협력할 대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마침 미국의 포드자동차는 당시 한국에서 협력할 업체를 찾고 있었던 중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현대그룹 자체가 건설이 주요 산업이었기에 처음에는 포드의 협상 리스트에 없었으나, 정주영 회장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첫째 동생 정인영을 시켜서 결국 포드를 설득해냅니다. 자동차 제조 경험은 없어도 경쟁업체들 대비 자본력이 우수했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는 포드의 라이센스 하에 모든 부품을 국내로 들여와서 국내 공장에서 차량을 조립합니다. 이렇게 하여 현대자동차는 1968년 국내시장에 첫 모델 코티나를 선보이는데 성공합니다. 이 모든 상황들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는데,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지 1년 안에 공장을 짓고 코티나의 조립생산까지 시작하였다고 하니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의 속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코티나는 당시에 선두주자이자 경쟁업체였던 "신진자동차"의 승용차 모델 코로나를 상대로 나름의 선전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동안 신진자동차가 일본 토요타자동차와의 협력으로 코로나를 조립생산하고 시장에서 판매 선두를 달려왔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현대자동차의 코티나가 보다 여유있는 공간과 좋은 출력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입니다. 한편 토요타가 중국과의 협력을 위해 일방적으로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끊으면서 상대적으로 현대자동차의 코티나가 더 특수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코티나는 1977년 "마크4 코티나" 까지 다양한 버젼으로 변신하며 현대자동차가 국내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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