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AI 09. 안되도 해보는 거야! 갑을이 바뀔 때까지! -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 (2)
요즘에 "갑질"이란 용어가 우리 사회에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갑을관계란 부당한 처사를 당하는 을이 우월적인 위치에 있는 갑에게 경제적 혹은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얽혀 꼼작 못하는 굴종의 상태를 말하죠. 문제는 대개 "을"이 갑의 갑질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힘든 상황을 보내는 경우가 많지만 "갑"은 그 이해관계로 큰 이득을 취하면서도 이런 상태를 허물지 않고 더욱 공고히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갑과 을 중 과연 어떤 형태로 비춰지고 있으신가요?
갑을관계라고 하니까 저도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네요. 이전에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한 기업에 입사했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열정이 넘쳤던지 매일 아침 출근하면 책상에 적힌 좌우명을 외우면서 "내가 이 업계를 다 갈아먹겠다!!" 라는 일념으로 하루를 시작했죠.ㅎㅎ 그러길 몇 주 지나, 저희 회사에서 최고의 매출을 찍는 초 대형 갑 고객 회사로 인사를 갔었더랬습니다. 제 사수인 대리님은 저를 데리고 가면서 그 회사 담당은 이제부터 저로 변경되었다고 하더니 세상 홀가분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게 하나의 복선일 줄이야...
고객 회사에 도착하자 저는 그 회사의 담당 팀장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90도 칼각으로 인사드리며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쪽의 첫마디가 매우 충격적이었는데요, 자리에 여전히 앉아서 저를 잘 쳐다보지도 않고서는 대뜸 "신입사원 맞아? 왠 신입사원이 중고처럼 생겼어?"라는 한마디로 인사를 대신하더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그분 나름의 을회사 관리 전략이었습니다. 초장에 면전에서 강한 면박을 줘서... 기를 팍! 죽인 다음 매사에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죠. 그분이 우리 회사에 방문하는 날이라도 되면 모두가 눈치보기 바빴고 아침부터 사무실 전체에 묘한 긴장감이 돌던 기억이 납니다. 또 저는 그 회사와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조그만 일로 책 잡히지 않기 위해 일단 그 분들의 구두 먼저 가지런히 정리했었죠... 하얀색 발가락 양말만 좋아하시던 S모 팀장님!! 요즘 잘 지내고 계신가요? ㅎㅎㅎ
저도 역시 몇년의 짬이 찬 뒤에 드디어 그 회사 담당업무를 새로 온 신입사원에게 넘기는 날이 되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ㅎㅎ 저는 엄숙한 표정으로 신입사원에게 말했죠. "갑이란 원래 그런거야... 쫄지마!"
아마도... 초기에 포드와 현대자동차의 관계가 바로 이러한 갑을관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저야 짬이 되면 자동으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 포악한 갑 회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지만 현대자동차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설립 초창기에 그들이 원해서 어렵사리 포드와 협력을 시작하였고 또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산조립 라이센스 계약이라는 한계가 있었지요. 그래서 포드와 처음 협력을 시작할때 약속한 기술 이전을 받고자 현대측에서 여러차례 요청했는데도, 포드는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차일피일 실행을 미루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속내는 그저 현대자동차가 철저한 그들의 조립생산 기지로만 유지되기를 바랬었죠. 기술은 주지 않고 날이 갈수록 경영적인 간섭만 심해져가자 포드와 현대자동차 사이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포드는 왜 현대자동차를 거대한 아시아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서만 기능하기를 원했을까요? 그들이 한국의 제조업 실력에 의문을 가진 부분도 있었겠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초반 당시에는 전세계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두편으로 갈려서 극심한 냉전 상태에 있었죠. 그런데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전격 방문하여 세계를 깜작 놀라게 합니다.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 이후 미국의 중국 고립 정책으로 인해 그동안 어색했던 양국의 관계를 이른바 "핑퐁외교"로 회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두 나라가 친선을 하게 되고 분위기를 쇄신하는데 탁구라는 스포츠 경기가 큰 역할을 했었죠. 그동안 잠자고 있던 거대한 중국시장은 미국의 자동차 기업들에게도 무척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포드는 한국을 자동차 조립 하청기지로 삼아 중국시장을 공략하려는 계획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갑을관계에서 포드의 간섭과 압박이 얼마나 심했을지 예상이 됩니다. 포드와 현대자동차는 코티나를 비롯해 여러 모델들을 합작하여 생산하였으나 점점 포드가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을 요구하는 등 그 간섭이 도를 넘어서자, 결국 현대자동차는 1973년 포드와 결별을 선택하고 독자노선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현대자동차와 포드의 관계는 안타깝게 끝이 났으나 협력 기간 동안 개발한 모델들 덕분에 현대자동차가 충분한 조립 경험을 쌓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른 중형세단 코티나 이외에도 대형 고급세단인 20M, 그라나다, 대형버스인 R버스 등 세 개의 모델들을 추가적으로 생산했습니다. 특히 저는 그라나다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어린시절 아버지의 유학으로 인하여 영국에 거주한 적이 있는데, 길거리에 그라나다가 무척 많이 보였거든요. 영국에도 포드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라나다 실내에 안락하게 생긴 갈색 빌로도 재질의 의자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손으로 쓰다듬을 때마다 손길의 방향에 따라 햇빛에 반사되는 패턴이 달라져서 어린 마음에 무척 신기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영국은 뒤에 짐칸이 매우 넓은 왜건형 스타일이 인기가 많아서 주위 이웃들을 보면 짐칸에 커다란 애완견들을 많이 싣고 다녔던 것도 기억에 많이 납니다.
기술력이 전무한 신생 자동차 업체로서는 어찌보면 매우 큰 도박일 수도 있겠지만, 포드와 갈라서고서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그들은 첫 국산 고유모델에 집중하기로 하고 "포니 프로젝트"로 명명한 계획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술이 부족했기에 이번에는 일본의 미쯔비시 자동차와 협력을 시작하여 그들의 엔진과 플랫폼을 장착하고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인 스튜디오인 "이탈디자인"의 디자인을 도움 받게 되었습니다. 이탈디자인은 세계적인 자동차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1968년 설립하였고, 이후에 현대자동차는 이들과 엑셀, 프레스토, 스텔라, 소나타까지 다양하게 디자인을 협력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음에 제가 현대자동차의 디자인에 대해 따로 연재글을 올릴 때 더욱 자세히 다루어보겠습니다.
한편 현대자동차의 독자모델 개발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측에서는 이것이 탐탁치 않았나봅니다. 그래서 주한 미국대사까지 나서서 현대자동차를 회유하려고 했다하지요. 만약에 독자모델을 포기하면 미국 다른 자동차 회사들의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적극 돕겠다라면서요. 그러나 당시 미국 대사 리처드 스나이더와의 만남에서 정주영 회장의 답변은 명확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현대자동차가 독자모델을 추진하다가 그동안 벌었던 모든 자금을 다 날리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현대자동차의 이러한 노력들이 한국 자동산업이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될 수 있다면 자신은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고요.
정말... 정주영 회장은 상남자에 말도 멋지게 하지 않습니까?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하여 그 일화가 좀 미화되었을지라도, 냉전시기 서슬퍼런 미국의 각종 간섭에 노출된 상황에서 자신의 기업가정신을 흔들림없이 또박또박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미국 대사의 말을 듣고 다른 미국 자동차회사들과 연결되어 조립생산에 박차를 가했더라면 단기간에 더욱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텐데요.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에 정주영 회장과 같은 인물이 당시에 있었다는 것이 상당히 행운이었다고 봅니다. 당시 한국보다 경제적 요건이 좋았던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스스로 자체모델을 만들지 못하고 지금까지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의 단순 조립 생산기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 경영 목표가 부의 성공만이 아닌 국민과 국가를 위한 원대한 꿈에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침내 포니프로젝트가 끝을 맺던 1974년! 드디어 세계에서 16번째,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두번째 자동차 독자모델로서 포니가 출시되었고 그 두근거리는 도박의 결과는 결국 대박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포니는 그후로 1990년까지 약 14년 동안 약 66만대가 팔려나가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현대자동차가 점차 글로벌 진출이 가능한 업체로 도약할 수 있는 큰 자양분이 됩니다. 포니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것은 고 정세영 회장이었기에 그의 별명을 포니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기억에도... 집 밖을 나서면 포니 승용차와 초록색 택시들이 많이 보이던 것이 눈에 선하네요.
현대자동차는 포니의 성공적인 출시 이후 미쯔비시와의 기술 협력을 지속하면서 그들로부터 엔진을 들여와 스텔라와 엑셀 모델에 적용합니다. 이 시기에 벌어진 눈물나는 스토리들을 여러분들도 여러차례 많이 들어서 잘 아실거예요. 언젠가는 자력으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현대자동차의 임직원들은 일년에도 수십 차례 미쯔비시 자동차 공장과 본사를 방문하면서 눈을 부릅떴다고 하지요. 카메라로 찍어 올 수가 없으니 감시가 소홀한 틈을 나서 필요한 정보들을 눈으로 쭉쭉 스캔하고 머리에 저장하여 귀국 후 기술 모방에 이용했다는 전설적인 일화들이 전해집니다. 필요하면 다시 일본에 가서 암기를 해오고요.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 아닐 수가 없지요.
그러나 포니의 성공이 완벽한 성공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도 많았습니다. 자동차 내부에 들어가는 엔진, 트렌스미션 등의 핵심적인 부품은 미쯔비시 자동차에서 수입해서 장착을 해야했기에 포드에 이어 여전히 기술적인 굴종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현대자동차가 이처럼 선진 자동차업체들과 상당히 벌어진 기술 격차를 후발주자로서 단번에 뛰어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습니다. 나름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핵심적인 엔진을 스스로 만들지 못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미쯔비시 자동차에 대한 기술 의존도가 너무 높아져서 한때는 현대자동차 총 순익의 절반을 미쯔비시에 그대로 납부해야 했던 절박한 상황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미쯔비시 자동차 측에서 맘만 먹으면 언제 중단시켜버릴지 모를 상하 굴종 형태의 기술협력 관계가 현대자동차는 늘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이미 그러한 선례가 한국의 신진자동차에서 있었습니다. 1970년 초반까지 신진자동차가 일본 토요타 자동차의 코로나를 라이센스로 조립 생산하면서 국내 시장에서 선두를 달렸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신진자동차의 위세는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의 위치에 필적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중국시장을 목표로한 토요타 측에서 일방적으로 신진자동차와 협력을 끊어버리자 신진자동차는 더 이상 라이센스 생산을 하지 못하고 매출이 곤두박질 쳐버립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여 점차 국내시장의 선두를 현대자동차에게 빼앗기고 말았지요. 이후 간신히 미국의 GM 자동차회사와 협력을 이어가지만 원천기술이 부족했던 신진자동차는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자동차는 당시에 매우 특이한 기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그렇게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지만 척박한 국내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자적인 기술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포드와 미쯔비시 등 연이은 갑을관계에 지쳐버린 현대자동차는 한술 더 떠서 이제 스스로 엔진을 제조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기준 한국 자동차 기업들 중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일이었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현대자동차는 1983년부터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하게 되지요. 하지만 독자엔진 계획이 출발 초기 단계에 어이없이 좌초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 산업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하고자 현대그룹에게 자동차산업과 중공업 중 양자 택일을 요구합니다. 고심끝에 정주영 회장은 현대자동차를 살리고 대신 당시 현대그룹의 중공업 분야를 이끌었던 현대양행을 정부에 내놓게 되지요.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현대자동차를 살리게 된 정주영 회장은 당시 미국의 GM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던 이현순박사를 삼고초려의 설득으로 국내로 모셔와 엔진 개발의 리더를 맡기게 됩니다.
그리고 1984년 경기도 용인 마북리에 파워트레인 연구소를 건립하면서 엔진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은 현대자동차에서 설립한 최초의 기술 연구소입니다. 그런데 말이 연구소지 당시에 정주영 회장이 이현순박사에게 소개한 팀원은 단 5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현순박사가 원래 일했던 GM의 연구인력이 당시 2만5천명에 달했고, 또한 이현순 박사가 현대자동차로 오게 되면서 연봉이 3분의1로 줄게 되었다고 하니 그가 한국행을 택하게 된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회장의 비서실에서 매일 수십번씩 전화를 걸어 이현순 박사의 한국행을 설득했다고 하지요. 이후 정주영 회장은 크라이슬러의 한국인 엔지니어 이대운 박사도 불러들이고 영국의 엔지니어링 전문기업 리카르도에 엔진 기술 자문을 요청하면서 서서히 프로젝트의 틀을 잡아가게 됩니다.
초반에는 진정 "멘땅에 헤딩"하는 작업의 반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엔진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과 소재를 새로 제작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기를 8년여... 동시에 해외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의 고성능 엔진들을 모두 분해하여 장단점들을 분석하고 또한 시제품을 만들어 혹독한 테스트를 거치면서 우리만의 독자 엔진을 완성해나갑니다. 이처럼 수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현대자동차는 1991년 "알파엔진"이라고 명명한 독자엔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합니다.
한편 현대자동차가 독자엔진을 개발한다는 소식 듣고 다급해진 미쯔비시 측에서는 회장이 직접 한국에 찾아와서 회유를 했다고 하지요. 당시 미쯔비시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구보노미오 전 회장은 긴급하게 정주영 회장과 회동을 제안합니다. 둘만의 독대에서 구보노미오 전 회장이 내건 요구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엔진연구소장인 이현순 박사를 해고하는 조건으로 미쯔비시의 엔진 신기술을 라이선스해주겠다는 깜짝 제안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정주영 회장이 이 제안을 들어줄리가 없었습니다.
그후 알파엔진의 개발이 계속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국을 찾은 구보노미오 전 회장은 끈질기게 회유를 합니다. 새로운 제안은 이러했습니다. 이현순 박사를 경질하고 엔진 연구소와 엔진 개발을 포기한다면 현대자동차가 미쯔비시에 납부하는 기존의 로열티를 반값으로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당근을 제시합니다. 당시는 현대자동차가 미쯔비시에 납부하는 로열티가 최고조에 달한 상태로 현대자동차의 800억 순이익의 절반을 고스란히 미쯔비시가 가져가는 상황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생산하여 버는 돈의 상당액이 미쯔비시의 배를 불려주고 있었던 것이죠. 미쯔비시가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현대자동차의 독자 엔진 연구를 무마시키려 했으나 역시 정주영 회장은 이를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 여겼지만, 현대자동차는 자동차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엔진 개발과 완료를 결국 해낸 것입니다. 현대자동차는 알파엔진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공장을 1991년에 완공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이외에도 다양한 엔진을 스스로 개발해 나갑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뉴알파엔진, 베타엔진, 입실론엔진, 델타엔진, 시그마엔진, 오메가엔진 등을 개발해 내며 소형차부터 대형차까지 자체적인 엔진을 장착할 여건을 만들게 됩니다.
독자엔진 개발의 성과는 엄청났습니다. 2002년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세타엔진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자 미국의 크라이슬러나 미쯔비시가 역으로 총 5,700만 달러에 달하는 로열티를 현대자동차에 지불하며 그 기술을 구매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타엔진은 이후로 전세계에 약 2천만개 가량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이제까지의 엔진들보다 고성능에 정숙성과 저연비를 갖추어 친환경적인 엔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엔진 뿐만아니라 변속기 관련 기술도 한층 발전시키게 되어 이제 어엿한 원천기술 경쟁력을 갖추고 미국의 크라이슬러나 독일의 벤츠에도 자체 제작한 엔진을 수출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시 기술협력 때문에 현대자동차가 항상 눈치를 봐야 했던 미쯔비시 자동차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현재 미쯔비시 자동차의 일본 본사 사진을 아래에 보여드립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 치고는... 건물의 형태가 여러분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시나요? 미쯔비시와 현대자동차에 얽힌 흥미진진한 일화들이 아직 더 많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글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어보겠습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될 수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평생을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기를 즐겼던 정주영 회장의 한마디를 적어보면서 오늘의 글을 맺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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