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출처 : 한국도로공사 배구단 홈페이지>
0%와 1%는 다르다. 아니 0%와 0.1%도 다르다.
짧지 않은 한국 프로배구 역사에서, 결승전 리버스스윕 가능성은 0%, 즉, 단 한 번도 없었다.
강팀들끼리 격돌하는 결승전에서 그만큼 어려운 일이며, 분석에 분석이 거듭되는 좁은 한국 배구판에서, 두 번을 졌다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 게다가 홈앤드 어웨이 시스템에서 결국 마지막 게임을 1~2차전 승리팀 홈에서 치러야 하는 구조도 리버스스윕을 더욱 어렵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확률을 넘어서, 한국도로공사는 기어코 우승컵을 차지했다.
결승전에서 1~2차전을 모두 내주고, 3~4차전을 어렵게 따내며, 역전우승에 도전했던 한국도로공사가 5차전을 3:2로 따내며, 최종 우승을 차지한 것.
이제 한국도로공사 덕분에 한국배구계 기록은 많이 달라졌다.
남녀부 합쳐, 기존 총 33회 결승전 중 단 한 번도 리버스 스윕이 없었고, 마지막 게임까지 벌이는 혈투는 총 8회가 있었지만, 이 중 리버스스윕은 없었다.
도로공사는 1~2차전을 모두 잃어도 우승할 확률을 0%에서 2.86%로 만들면서, 그야말로 KOVO 역사 한 순간에 남게 되었다.
사실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아니 포스트시작 직전까지도 한국도로공사 우승을 예상하는 전문가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적함대 현대건설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고, 김연경을 중심으로 결승에 나서는 흥국생명은 딱히 도로공사에 뒤쳐지는 면이 없었다.
하지만, 역시 공은 둥글고, 단기전에서는 '기세'라는 예상치 못한 팩터가 크게 부각되는 법.
무적함대 현대건설을 간단히 요리하고 기세가 오른 한국도로공사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홈 김천에서부터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한 도로공사에 흥국생명을 누를만한 강점이 몇 가지 있었으니,
바로 첫번째는 '클러치 박'이다.
박정아 선수는 일단 키가 매우 크다. 월드클래스 김연경 선수를 제외하면, 187cm로 국내공격수 중 최장신인데, 근데 공격을 매우 잘한다. 키가 큰데 잘한다.. 이 간단한 조건을 충족하는 선수가 적어도 배구/농구에서 얼마나 위력적이지는 팬이라면 잘 알 것이다. 이 강점은 결승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그 장신으로 높은 볼이 오면 여지없이 대각과 직선으로 구석구석을 노리고, 낮은 볼이 오면 블로커 손을 보고 터치아웃을 노리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여우같이 차곡차곡 포인트를 따냈다.
위대한 김연경 선수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리시브를 면제받은 박정아 선수는 클러치 상황에서 공격 한 포인트는 언제나 책임져줄 수 있는 상수이다.
두번째는 변하지 않는 도로공사의 방패 '2인 리시브'이다.
리베로 임명옥과 OH 문정원 둘이 서브리시브를 책임지는 이 특이하면서도 올드한 시스템은 2017년부터 변하지 않는 도로공사의 시그니처 수비인데... 사실 성적이 안 좋을 때는 비난도 받는다. 이래서 박정아가 리시브가 늘지 않는다. 스피드 배구에 역행한다....
하지만, 어쨌든 가진 멤버로 최고 성적을 내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 이 체제는 꽤나 효율이 높다. 일단 박정아 선수 공격력을 매우 극대화할 수 있고... 박정아 선수에게 상대방이 무리한 목적타를 넣는다면 이 또한 나쁘지 않다. 그리고 리그에 강서브를 구사하는 선수가 매우 많지도 않다.
암튼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클러치박과 2인리시브는 도로공사가 늘 일정선 이상으로 무너지지 않는 창과 방패나 마찬가지이다.
예전 영화 '넘버3'에서 안석환(두목)이 한석규에게 했던 대사 중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 둘 다 에이스지. 에이스 원페어 받아놓고 포커 치면 돈 잃을 리 없을 거야."
공수 관련 에이스 원페어를 받아놓고 장기레이스를 나서는 김종민 감독, 외국인선수만 괜찮다면, 바로 상위권으로 도약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어쨌든 수많은 순간순간들이 더해져 도로공사 한시즌 끝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고, 팬들에게는 도로공사가 기적을 만든 강팀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에이스 원페어에 수준급 외국인 선수를 더하여, 기적 같은 우승을 연출한 한국도로공사는 이대로 왕조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아쉽지만 어려워 보인다. 이제 화려한 끝을 넘어 새로운 시작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단 FA가 가장 큰 변수이다. 이번 FA대상자를 살펴보자.
박정아, 전새얀, 문정원, 배유나, 정대영(B)
올해 여자부 샐러리캡은 18억 원, 이미 도로공사는 17억 원이 넘었다. 우승기여를 생각하면 주전선수들 연봉이 대폭 인상되어야 하는데... 이외에도 결승전 깜짝 활약을 한 이예은 선수 등 젊은 선수들 연봉도 신경 써줘야 할 텐데... 노장 정대영 선수가 은퇴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연봉은 8500만 원이니 숨통이 터지지 않을뿐더러... 당장 은퇴 후 센터진을 맡아줄 선수도 없다. 특히, 샐러리캡에 여유가 있는 페퍼가 단숨에 전력을 올리기 위해 달려든다면, 아무리 우승팀이라도 선수들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결국 박정아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셋 중 잘해야 둘을 잡을 수 있을 텐데, 만약 문정원 선수를 놓치면, 2인 리시브가 무너지고, 전새얀 선수를 놓치면, 박정아 선수 대체가 신인급이 된다. 배유나 선수를 놓치면 센터진은 그야말로 전면 리빌딩이다.
그렇다고 박정아 선수를 내보낸다면.... 뭐 완전 다른 팀이 될 수도 있다,
암튼 도로공사 프런트와 김종민 감독은 머리가 아픈 상황이겠지만... 박정아 선수 중심으로 계속 강팀으로 남을 수 있는 스쿼드를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FA와도 무관하지 않지만, 주전들이 전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것도... 장기간 리그를 지배하기는 어려워보이는 이유 중 하나이다. 당장 정대영 선수 은퇴설이 나오고 있고, 나머지 선수들도 이제 에이징커브를 직면할 나이라서... 상대적으로 젊은 흥국생명, 현대건설의 거센 도전을 어떻게 버텨낼지 궁금하다.
외국인 선수도 도로공사 장기집권에 여전히 변수이다. 대체선수로 들어와 결승전 믿기지 않는 활약으로 우승을 이끈 캣벨 선수. 우승 후 유쾌한 인터뷰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하지만, 당장 내년에도 함께할지 여부에 대해 김종민 감독은 고민이 많을 듯 하다. 올해보다는 낫다는 평인 외국인 트라이아웃 명단도 그렇고... 캣벨 선수가 안고 있는 무릎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올해 단기전에서 상대했던 두 팀이 외국인 포지션에서 역대급으로 불안정했다는 것은 도로공사에 큰 행운이었다. 현대건설은 몬타뇨 선수가 팀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고... 흥국생명은 엘레나 선수의 계속되는 기복에 마음 졸여야 했다.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한 뛰어난 공격과 블로킹, 그리고 허슬플레이를 보여준 캣벨은 도로공사 우승을 하드캐리했다.
외국인 의존도가 높은 프로배구에서 이 정도로 활약 정도가 갈린다면, 이는 큰 행운이라 봐야한다. 사실 외국인 포지션이 약한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이 어려운 게 정상이니... 내년부터는 수준급 외국인을 보유한 팀을 상대해야 하는 도로공사.. 올해 같은 행운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박정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할 도로공사.
그래도 그 전망이 어둡지는 않다.
공기업인 탓에 소극적인 경영을 할 것 같지만, 한국도로공사는 FA에서 해야 할 투자를 미룰 정도로 소극적이지 않다. 에이스 박정아 선수도 FA로 영입한 선수이고, 늘 영입할 선수는 영입한다라는 원칙하에 쓸 돈을 쓰는데 소극적이지 않다. 곧 있을 FA대전에서도 스쿼드를 새로 구성하는데 소극적이진 않을 것이다.
올해 외국인선수 교체에서도 보여주듯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향상'을 기조로 외국인 스카우트도 발 빠르게 움직여왔다. 캣벨이 아니라 카타리나 선수가 계속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여담으로 현대건설이 몬타뇨가 아니라 캣벨을 영입했다면 어땠을까?)
무엇보다도 배구팬으로서 박수를 쳐야할 부분인데, 올해 도로공사는 신인 지명에서 유일하게 5명을 꽉 채워서 지명하며 선수육성에도 의지를 보인 팀이다.
2군도, 그나마 남자부에 있는 체이서매치도 없는 여자부에서 신인지명은 곧 또 다른 선수 방출로 이어진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선수 가능성을 보고 더 투자하고, 더 육성하려고 노력하는 팀에게 더 많은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섯 신인 중 가운데 서서 당차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예은 선수가 결승전에서 오로지 서브만으로 흐름을 바꾼 것은 이 투자가 적어도 올해는 엄청난 성공이었음을 보여준 셈이다.
유일하게 신인 다섯을 지명하며 의지를 보여준 도로공사
수도권이 아닌 김천을 연고지로 운영하며, 지방 배구팬 갈증을 풀어주고 있는 도로공사
실업선수를 2년만에 우승팀 세터로 키워내며, 한국배구 저변에 메시지를 던진 도로공사
비록 우승의 기쁨은 이제 곧 끝나고, 곧 있을 FA 협상과 외국인/아시아쿼터 선발 등으로 팀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겠지만, 그래도 위 세 가지만큼은 배구팬들에게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다른 팀이 안 하는 걸 하는 정말 멋진 팀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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