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러치 박
참 멋진 별명이다. 늘 리시브를 지적당하면서도, 국가대표 경기에서 중요한 상황이 되면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박정아다. 그런 박정아를 좋아하는 팬들은 그녀를 '클러치 박'이라 부른다.
그간 페퍼에서의 박정아는 클러치 박과 거리가 멀었다. FA이적으로 최고 연봉 선수가 되었지만, 페퍼는 든든한 리시브로 박정아가 공격에 전념하게 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계속해서 안 좋은 사건이 이어졌던 팀은 박정아가 선배로서 안정화시키기엔 버거울 정도였다.
올 시즌 여러 면에서 전력이 보강된 페퍼저축은행(이하 '페퍼')이지만, 박정아의 고난의 행군은 계속되었다. 기대를 모았던 외국인 1순위가 부상으로 교체되고, (과연 부상이었는지 기량 미달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영입된 테일러가 미덥지 않은 공격력을 보이며, 박정아가 OH로 출전하면서도 공격을 주도해 온 것이다. 상대 블로커의 집중마크에 힘겨워하는 박정아의 모습에서 국대 팀을, 그리고 우승팀을 이끌던 클러치 박의 모습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2024년 마지막 시합에서의 박정아는 달랐다. 상대도 클러치 박의 피가 끓어오를만했던 1위 현대건설, 페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풀세트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두는 기염을 토했고, 그 선봉에는 클러치 박이 있었다.
27 득점, 공격성공률 38.7%, 범실 2개, 그리고 리시브 효율은 25.6%
아깝게 공격성공률 40%를 넘지 못했지만, 블로킹과 디그 모두 리그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현대건설을 상대로 27 득점을 따냈고, 그 과정에서 범실은 2개에 불과할 정도로 순도가 높았다. 또한 리시브 효율이 25%를 넘었으니, 적어도 어제 경기에서는 그냥 박정아한테 서브 때리면 알아서 무너진다는 단순한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이 정도 스탯에 승부처에서 올려주는 하이볼을 모두 매조지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최고 연봉 선수다웠다. 손끝을 보고 쳐내는 전략에, 블로커들이 손을 빼며 대응했지만, 박정아는 그런 대응을 비웃듯 엔드라인 쪽으로 계속 공을 때려 넣으며 시합을 주도했다. 매 경기 이런 모습을 보이기는 어렵겠지만, 확실히 보여줬다. 클러치 박이 컨디션이 좋은 날은 1위 팀도 그냥 힘으로 때려잡을 수 있다.
위기는 곧 기회, 박수빈의 발견
이원정이 아프다고 한다. 미우나 고우나 주전 세터로 시즌을 준비했던 이원정이 출전하지 못하는 건 페퍼에게 큰 마이너스인데, 이원정-박사랑 틈바구니에서 좀처럼 한 세트를 책임질 기회를 찾지 못했던 2년 차 박수빈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박수빈은 그 기회를 잘 잡으며 팀 승리를 이끌어서, 팀과 자신이 동시에 스텝업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고교 때부터 윙 쪽으로 긴 토스를 참 이쁘게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박수빈, 신장이 그다지 크지 않고, 공격적인 성향도 별로 없어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올 시즌 점점 출전시간을 늘려가며, 세터의 첫 번째 덕목은 안정감임을 리마인드 시켜주고 있다.
다만, 어제 이숙자 해설위원이 지적했듯이, 출전이 길어지자 상대방 블로커들이 속공 토스를 읽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박수빈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물론 현대건설 MB는 리그 최고 수준이긴 하지만, 장위의 높이를 딱 맞춰주지도 못하는데, 쿠세랄까... 뭔가 토스 폼이나 표정이 상대방 블로킹이 읽어내기가 쉽다면, 이는 매우 치명적이다. 물론 아직 경험이 짧은 2년 차 선수.. 경기를 거듭하고 복기를 계속할수록 나아질 여지는 많아 보인다. 예측하기에 팀 내 연습에서도 A팀을 이끌고 장위와 높이를 맞춰볼 기회는 없었을 터, 리그에서 가장 높은 장위의 이동공격과 속공을 조금만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단숨에 박사랑을 위협하는 위치에 설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한 테일러... 혹시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다시 교체라도?
12 득점, 공격성공률 36.4%, 범실 5개를 기록한 테일러. 이 정도가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한계치인 듯하다. 물론 시합 중간 박은서에게 자리를 내주고 웜업존을 지켰기에 출전시간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시원한 공격으로 감독에게 믿음을 줬다면 웜업존으로 갈 리도 없었을 게다.
유독 눈에 띄었던 건, 경기 중 선수들이 파이팅을 할 때도, 선수들이 테일러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냉랭(혹은 어색)해 보였다는 점이다. 작년 선수 간 괴롭힘 문제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페퍼가 그나마 활발한 성격이 가장 큰 장점인 테일러가 왕따를 당하도록 놔두진 않을 것이고, 그저 자기 역할을 못하는 외국인 OP에게 프로로서 웃으며 대하기가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혹시 구단에서 다시 교체 검토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사실 구단 차원에서 다시 외국인을 교체한다고 이상할 건 없다. 접전에서도 박은서에게 한 세트 정도 자리를 내주는 외국인은 사실 주전 OP로는 아쉽다. 많이 애를 쓰고 있고, 초반보다 좋아졌지만, 하이볼 상황이나, 후위공격에서 힘을 싣지 못하는 단점은 쉽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 윌로우나 캣벨 정도의 대체자원만 있다면 사실 교체 쪽을 지지한다. 다만, 그 정도 검증된 자원이 없다면, 교체 자체가 도박일 수도 있다. 이제는 조금씩 프로다운 모습을 보이는 페퍼의 배구에 장매튜 구단주가 지갑을 여는 걸 주저할 것 같지는 않은데, 위약금을 통 크게 지불한다면, 예상외로 반가운 얼굴이 페퍼 유니폼을 입고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는 추측일 뿐이고, 당장 페퍼는 어떻게든 부족하더라도 테일러 공격을 좀 더 활용해서 상대가 박정아와 이한비를 집중마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유연하고 기민해진 장소연 감독의 선수 기용
전에 페퍼는 5세트 가면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포스팅했었는데, 장소연 감독은 거함 현대건설을 상대로 그러한 우려가 기우에 불과함을 증명했다. 공격에서 자기 몫을 했던 박은서가 아니라 테일러를 기용하면서 높이라도 대등하게 맞췄고, 공격에서도 박정아-이한비-테일러를 최대한 분산시키며 가진 무기를 최대한 활용하며 끝까지 상대방을 물고 늘어졌다. 지난 풀세트 접전 5세트에서 박은서를 데리고 어떻게든 승리를 따내보려고 고집을 부리던 모습과는 달랐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승리경험을 통해 선수들과 더불어 코치진도 선수기용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이런 높이를 우선한 5세트 라인업은 상대에게 꽤 부담을 주었는지, 5세트 승부처마다 현대건설 공격범실이 나왔고, 모마도 평소보다 많은 전체 10개의 범실을 기록했다. 물론 이러한 5세트 테일러 기용은 박정아가 공격에서 1.5인분을 해줬기에 가능한 부분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성공은 성공. 테일러도 5세트에서 간헐적이지만 공격에 가세하면서 현대건설 전위 선수들을 꽤 교란했다.
좋은 경험을 한 박은서
공격이 막혀있던 시점, 투입되어 힘 있는 공격으로 활로를 뚫었던 박은서. 비록 9 득점에 불과하지만, 임팩트 있는 공격력을 보여줬다. 5세트는 OP자리를 테일러가 맡았는데, 승리 순간을 코트에서 만끽할 수 없었던 것이 박은서에게는 조금은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길게 뛰면서 지는 것보다는 한 두 세트 OP 자리를 책임졌지만, 팀 승리에 일조한 것이 아직은 어린 박은서에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신장열세, 아직은 부족한 공격스킬로 인해 상대 블로킹이 집중되면 여지없이 나오는 범실 등.. 단점도 분명한 박은서이기에 아직은 한 게임을 책임지기보다는 세트 단위로 투입되면서 이기는 게임을 더 경험하게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준 비극이 일어난 곳, 무안공항은 페퍼 홈구장에서 불과 40km 떨어진 곳이었다. 단일 시즌 최다승인 6승을 거둔 페퍼에게 2024년 12월 29일은 의미 있는 날이 되었지만, 한국사회에 엄청난 비극이 있었던 날로 기억되게 되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이런 사고가 없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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