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상 18] 동심원이론을 아시나요 ? - 디트로이트 이야기 (2)
순식간에 고속도로는 제 차로 인하여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제 뒤에 위치한 차들이 앞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쭉 밀려버리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패닉 상태가 온 저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죠. 차 사고가 나면 바로 보험회사에 전화해야한다는 일반적인 상식이... 막상 외국에 나와서 환경이 바뀌니 통하지가 않더라고요.
그리고 머릿 속에 잠시 스치는 생각은... 집에서 출발할 때는 뜻밖의 비가 매우 미웠지만, 그때만큼은 너무 고맙더군요.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로 인해 고속도로 위 자동차들의 속도가 평소보다 높지 않았고, 이 때문에 위험한 상황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는 그대로 차에 들어앉아 속을 끓이고 있는데... 어느 소형차 한 대가 고속도로 중간 분리대 공간에 서더니 제 차의 창문을 노크하더군요. 그리고 자기가 차를 밀어줄테니까 자기 차 쪽으로 핸들을 움직이라는 겁니다. 외모가 아마도 중동 쪽 이민자 청년이었던 것 같은데... 저를 대하는 매너가 정말 상냥하고 나이스했습니다. 그렇게 비를 다 맞아가며 제 차를 안전하게 밀어준 뒤, 다시 와서 안심하라고 다독여주더군요. 그리고는 보험회사에 대신 전화해서 연락을 취해주고 한참을 저와 함께 있다가 갔습니다. 저를 안심시키려고 이것저것 말도 걸어주면서요. 알고보니, 제 차가 멈춘 지역이 특히 중동의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사는 동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치 한 명의 "착한 사마리아인" 같았습니다. 갈길이 바쁜 상황 속에서 그것도 비를 맞아가며 선행을 베푼 그 분 덕분에 저는 어찌어찌 그날 저녁 집으로 되돌아올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런 극한의 상황을 한번 견디고 보니, 그 뒤로는 초보 미국 거주자의 긴장했던 마음도, 조금 불안했던 마음도 서서히 풀려가더군요. 또한 겉으로 보여지는 동네의 모습들과는 달리 세상 어디에나 선량한 사람은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여유가 좀 생겼다고 할까요? 그때까지는 이상한 사람들과 길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는데, 좀더 담대하게 마음에 평정심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한결 편해진 뒤로 여기저기 운전해서 쏘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위험한 동네 그리고 안전한 동네 가릴 것 없이요. 이 덕분에 디트로이트 시내에서 북쪽을 향해 운전하고 가다보면 반경 약 30킬로 안에 온갖 형태의 환경들이 다 모여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한번의 운전으로 최악에서 최고의 환경을 모두 "감상"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혹시 "동심원이론"이라고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어요. 아마 사회학을 전공하신 분들이라면 살짝 기억이 나실만한 내용입니다. 1900년대 초반, 미국의 버제스라는 학자는 세계최초로 사회학과를 설립한 시카고대학교에서 연구를 수행하면서 동심원이론을 발표했어요.
그의 동심원이론은 1925년 시카고를 배경으로 연구되었던 것입니다. 시기가 거의 100년 전이니 현재와 같이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또한 각종 변수가 많아진 현재의 대도시들에 딱 맞게 적용되긴 어렵겠지만, 1960년대 이후로 도시 발전이 거의 멈춘 디트로이트는 제가 생각하기에 이 이론이 거의 들어 맞아 보이더라구요.
동심원이론의 요약은 이렇습니다. 도시가 발달할 수록 공장이나 일터와 가깝게 통근해야 하는 저소득층은 그대로 2와 3 지역 안에 남아 있는 반면에 도심과 거리가 떨어진 4와 5쪽 지역으로 상류층들이 점차 빠져나가 쾌적한 고급 주거단지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상류층은 차량을 여러 대 소유할 가능성이 높으니 1번 중심업무지구로 언제든 출퇴근에 무리가 없는 사람들이겠구요. 아래 디트로이트 사진을 한번 보세요. 동심원이론이 한번에 이해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번 중심업무지구 앞으로 2, 3번 지역에 해당할 곳들이 정말 휑한 폐허처럼 보이죠?
사실 시내 중심업무지구인 다운타운은 그렇게 위험하진 않습니다. 이곳에는 180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사이 디트로이트가 미국의 5대 도시로 매우 흥했을 때, 그 당시 건축된 아름다운 석조 건물들과 고층 빌딩들이 현재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문제는 그 건물들이 세워진 뒤 지금까지 특별한 보수나 변화가 전혀없이 그대로라는 점이지만요.ㅎㅎ 그리고 나름 시내 안에 모노레일도 다니고, 박물관 및 미술관 등 볼만한 곳도 많아서, 아기자기하면서도 그 나름의 멋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내 다운타운이 끝나가는 지점부터 보이는 2,3번의 폐허같은 지역들이 정말 위험한 곳들이죠.
디트로이트는 196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미국 자동차 빅3인 제너럴모터스, 포드, 스텔란티스(크라이슬러)가 태동한 곳으로 일찌기 자동차산업이 발달하여 모터시티(Motor City)로 불리웠던 곳이죠. 그리고 자동차공장의 인력들을 공급하기 위해 미국 남부 지역의 수많은 흑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들이 과밀하게 차지하게 된 지역에서 불편을 느낀 상위계층이 빠져나와 점차 교외로 진출하면서 도시의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저렴한 일본산 자동차 수입으로 인한 자동차산업의 불황, 1967년의 디트로이트 대 폭동 그리고 1970년대 오일쇼크 등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도시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죠.
디트로이트의 과거와 현재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디트로이트 중앙역이 아닌가해요. 이 건물이 지어진지 올해로 110년째인데, 1910년대에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 지어졌다는 것이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아래의 사진에 나오는 과거전성기 시절의 위용은 사라지고 안타깝게도 현재는 황폐하고 음울한 폐허로 남아있습니다.
혹시 지난 2015년의 기사를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제임스라는 디트로이트 지역의 흑인 남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실직으로 인하여 집에서 45킬로미터나 떨어진 새로운 금형공장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직장은 대중교통 노선이 너무 멀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도합 39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거리를 무려 9시간 동안 매일 걸었다고 해요. 자동차가 없어서 10년동안 이런 생활을 했지만 단 한번도 결근이나 지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다고 하고요. 특히 이 지역은 겨울에 눈이 아주 많이 오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주위에 그의 사연이 전해져서 모금 끝에 그는 근사한 승용차를 선물 받게 되었고, 지금 그의 출근 시간은 단 20분으로 줄었다고 하지요.
왜 그는 10년동안 그 먼 거리를 걸어야만 했을까... 그분의 사연은 좀 특별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어떠한 개선이나 변화를 전혀 꿈꾸지 못하고 그저 순응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소외된 계층을 대변하는 사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실제로 미국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차가 없이 출퇴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중교통마저 이용하기 어려우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그들은 건강을 위한 운동 목적이 아니라 정말 경제력이 안 되서 순전히 교통수단으로서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동심원이론은 현지인들 뿐만 아니라 유학생들에게도 적용되더군요. ㅎㅎ 디트로이트 지역에서 처음 유학 당시에는 대부분 이곳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보통 위험한 시내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지만, 학년이 올라갈 수록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동네로 이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저도 디트로이트에서 8마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갈 수록 안전하고 쾌적한 동네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학년이 되자 이사를 감행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떠나보니 왠걸 정말 경치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동네가 수두룩하더군요. 보통 아래 지도처럼 동서로 쭉 뻗은 8마일 길을 기준으로 도시의 상황이 많이 바뀌는데 바로 이 8마일 길이 바로 디트로이트 시와 주변 위성 도시들과의 지리적 경계이자 심리적, 사회적인 경계입니다.
시내에서 떨어져 북쪽이나 서쪽으로 갈수록 정말 아름답고 괜찮은 위성도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트로이트가 미국 전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탑을 찍는데 반해 몇십킬로 떨어지지 않은 주위 위성도시들은 미국에서 가장 살기좋은 동네 순위 안에 항상 든다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지요. 디트로이트 서쪽에 앤아버라는 동네는 미시간대학교 등 유명한 학교들이 위치한 평화로운 도시입니다. 최근에 검색해보니 미국 US NEWS가 2023년도에 뽑은 미국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 14위, Business Insider가 뽑은 11위에 들었더라구요. 디트로이트와 완전 딴판의 좋은 환경이라, 디트로이트 생활이 답답하고 허전할 때 가끔씩 가서 커피도 한잔하고 저녁도 먹고 오는... 그지역 유학생들에게 하나의 힐링 포인트가 되는 지역이지요.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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