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상 17] 당신에게 마음의 고향은? - 디트로이트 이야기 (1)
여러분들은 살면서 제2의 마음의고향과 같은 동네가 있으신가요? 비록 본인이 태어난 곳은 아니더라도 인생의 어떤 중요한 시기에 큰 영향력을 받았다거나, 무엇인가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곳 말이죠. 현재 주소에서 살다가도 애틋하게 가끔씩 떠오르는 그런 곳... 언젠가는 다시 가보고 싶은 그런 곳이요. 저에게는 그곳이 바로 미국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Detroit)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배우 곽도원씨의 연기를 참 좋아하는데, 알고보니 그분에게도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충무로에서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고, 공중파에도 가끔씩 얼굴을 내미는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렇듯 뜨기 전 젊은 시절에는 매우 힘들고 곤궁한 생활을 했다고 해요. 고등학교 졸업 후 10여년간 연극배우 생활을 했어도 계속 어려운 일만 겹치자,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경남 밀양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연희단 거리패"라는 극단에서 7년동안 연기에 대한 기초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연습하면서... 진정한 배우로서 재탄생될 수 있는 자양분을 길렀다고 하네요. 딱히 수입이 없어 배고프고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는 7년동안 미친사람처럼 오로지 연극만 보고 살았다고 합니다. 미투사건으로 불명예를 남긴 이윤택 감독 아시죠? 그분과의 불화로 극단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고 하고요. 지금은 유명해졌지만 실로 그에게 경남 밀양은 제2의 고향 같은 곳, 그리고 마음 속 한켠에 온갖 추억과 애증으로 버무려진 의미깊은 장소라고 할 만 합니다.
제가 물론 유명인은 아니지만 ㅎㅎ 디트로이트라는 도시는 저에게 있어서 다양한 감정과 또한 애증이 뒤섞인 곳이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현재에도 눈을 감으면 곳곳이 추억처럼 기억에 남구요. 현재 제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 주의 엘에이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무려 3천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죠. 그런데 지난 2000년도 후반에 처음으로 미국에 왔을 때 저를 맞이해준 곳이 바로 디트로이트였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몇년간 유학 준비를 했거든요. 한국 회사에서 20여명의 동기들이 함께 입사해서 끈끈하게 지냈는데, 몇년 지나지 않아 한두명씩 연이어 작별을 고하더군요. 다들 고시 공부나 재취업 등으로 좀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고자 그랬겠지요. 그 상황에 저도 마음이 좀 흔들려서, 기왕에 해보려면 제대로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미국유학을 몇년 준비했습니다. 한국 회사를 퇴사하고 그렇게 나름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설레는 마음으로 미국에 도착했는데... 하필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하기로 악명높은 범죄율 1위의 도시였던 것이죠~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하고, 도움을 주시는 분의 차에 올라타서 바라본 창밖의 모습들이... 제가 이때까지 상상해온 미국과는 너무 달라 놀랐습니다. 군데군데 불탄 집들... 그리고 사람이 떠나간 폐허 같은 집들 사이로 쓰레기들도 엄청 많고 무엇보다 도시 전체가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이 짓눌러진 그런 분위기더군요. 여러분들도 아래 유튜브를 눌러보시면 디트로이트 거리를 영상으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2CW38wi5OM
그런데...! 곧이어 고속도로를 타고 30여분이 흘러 도착한 도움주시는 분의 집, 그리고 그 동네는 완전히 딴판의 별세계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거리 안에 이리도 전혀 다른 두가지 상반된 환경이 존재할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지역은 평화롭고... 정말 미드나 영화에서 보던 울창한 숲 속에 새소리와 꽃향기가 그윽한 전원주택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도움 주시는 분의 집에서 며칠 지내며 적응을 하다가 아파트를 얻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제 아파트에 전기를 개통하는 것이었죠. 이게 전화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전기회사의 지점으로 가서 직접 신청하는데 마침 그곳이 디트로이트 도심으로부터 8마일 떨어진 지역이더군요. 주위 분들이 그곳에 갈땐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해서 덜컥 겁이 났지만, 사실 제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는 관계로 스스로 해결을 해야 했습니다.
잔뜩 긴장을 한 채로 운전을 해서 도착한 그곳은... 정말 황량함 그자체였습니다. 여기가 내가 알던 미국 맞나? 그동안 미디어에서 보아온 천조국 미국의 부유함과 풍성함과는 딴판으로 끝없는 게토가 펼쳐져 있는 모습이 정말 이질적이었죠. 그때까지 디트로이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래퍼 에미넴 주연의 2002년 영화 "8마일"에서 본 내용들 뿐이었어요. 개봉 당시 마셜님과 함께 종로에 있는 영화관으로 영화를 보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그런데 영화 속의 디트로이트 환경이 그나마 더 낫더라구요. 제 눈앞에 현실로 보여지는 전기회사 대리점 주변의 광경은 참으로 암울함 그 자체였습니다. 제 나름 산전-수전-공중전, 그리고 어려운 어린시절을 겪어왔다고 자부하는데,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디서도 듣도 보지도 못한 정말 "어나더레벨"이더라구요.
전기회사 대리점이 있는 쇼핑몰 안에는 소총으로 무장한 사설 경찰들이 순회를 돌고 있고, 한국의 남대문 동대문 시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낡은 간판들... 여기저기 창문은 깨져있다던지 아니면 나무 합판으로 못박혀 있는... 그 위에 어지럽게 스프레이로 낙서된 모습들... 환경은 그렇다쳐도 아무런 표정없이 주저 앉아 있는 사람들... 또한 간간이 들려오는 스피디한 랩처럼 너무 억양과 속도가 독특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대화들... 이런 상황을 뚫고서 대리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너무 깜작 놀랐습니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백여명의 눈길이 한꺼번에 저에게 쏠리는데 몸둘바를 모르겠더군요. 100% 흑인 분들이 자꾸만 저를 쳐다보시는데 ㅎㅎ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거기서 피부색이 다른 사람은 제가 유일하더라구요. 거기서 제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마도 제 인생에서 가장 느리게 시간이 가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ㅎㅎ 사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주눅이 들었나 싶기도 해요. 지금은 당연히 그렇지 않지만 그땐 모든 환경이 처음이라 더 그랬었겠지요.
학기가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수업도 시작되었고, 야간수업이 있는 날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가는데, 그런데 정말 조심해서 운전해야 하는 것이... 사람들이 신호등과는 아무 상관없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무단횡단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차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데도요. 하필 밤시간에 기름이 떨어져서 근처 주유소에 가는데, 주인이 있을만한 창구는 방탄유리와 쇠창살로 튼튼하게 장식이 되어 있고 갑자기 좀비처럼 눈이 풀린 사람들이 제게 다가와 구걸을 할때는 정말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내가 정말 못올 곳을 온 건가...미국 도시들은 다 그런건가...?? 호기롭고 청운의 마음을 담아 미국행을 준비해서 왔는데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더군요.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않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비가 유난히도 쏟아지는 어느 흐린 날 오후, 학교에서 행사가 있다고 해서 운전하고 가는데... 고속도로 가는 길 딱 중간에 계기판이 깜박이더니 이내 제 차가 그만 서버린 것입니다! 제가 지난 이전 글에서 소개한 돈다발을 마구 흔들고 샀다는 바로 그 차입니다.ㅎㅎ
( HYUNDAI 11. 스승의 흑역사는 제자의 교훈! -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 (4)) 뒤에는 차들이 빵빵거리고 빗줄기는 더욱 강하게 쏟아지는 그 상황 속에서 저에겐 너무 큰 패닉이 와서... 그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더라구요. 그저 깜박이만 켠채로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미국 와서 처음 겪는 일이라 아니 제 인생에 처음 겪는 일이라 정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거 정말... 도대체 어떻게 하지??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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