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승보다 더 기쁜 정관장포비아 탈출
2024년 11월 27일, 페퍼저축은행 배구단(이하 '페퍼')에게는 꽤 기쁜 날이다. 우선 시즌 첫 연승을 기록했고, 도토리 키재기이긴 하지만, 순위를 중위권으로 끌어올렸으며, 무엇보다도 한 때 17연패를 기록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밀렸던 정관장 상대로 승리하면서 공포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 중 팬으로서 가장 기쁜 건 정관장포비아 탈출이다. 물론 길지 않은 역사에서 페퍼가 정관장에게 전패한 건 아니다. 작년 시즌 정관장 상대로 1승을 기록했지만, 그 승리는 패배만큼이나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봄배구를 확정한 정관장은 주전을 모두 빼고 관중석에 앉히고 2진 라인업으로 경기에 나섰고, 그 게임마저도 페퍼는 원사이드 하게 끌고 가지 못하면서, 팀 수준이 타 팀의 2진급임을 자인하고 말았다. 프로 선수들이 일정이나 개인 컨디션 문제로 시합에 결장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관중석에 앉아서 밝은 표정으로 관광객처럼 게임을 즐기는 모습은 상대팀으로서 꽤나 불쾌했는데... 그래도 1승이 아쉬웠던 페퍼는 씁쓸한 승리나마, 추가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어제 경기 정관장 선수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어린아이 다루듯 했었던 페퍼의 거센 반격과 끈질긴 수비에 표정은 어두웠고, 범실을 연발했다. 지금까지 페퍼 팀에 가졌던 자신감이 반대로 부담감으로 돌아온 모습이었고, 모든 스포츠에 적용되는 기세싸움의 단면을 잘 보여줬다. 반대로 뭔가 될 것 같은 실마리를 잡은 페퍼는 약간 거칠어도 끈질긴 모습을 보여줬고, 결국 이 차이가 페퍼에게 3:1 승리라는 소중한 경험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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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상대팀 약점을 파고들 줄 아는 페퍼
정관장 선수들은 전반적으로 몸이 무거워 보였다. KOVO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정관장도 만만치 않게 주전 의존도가 심한 팀이고, 특히 최근 네 경기에서 풀세트 접전을 두 번이나 치르고도 1승밖에 올리지 못하다 보니, 주전들이 좀 지쳐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 컨디션은 수비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일반적인 리시브와 디그와 같이 약속된 플레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블로킹에 걸린 후 수비나 돌발상황에서는 흔한 말로 발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빈틈을 페퍼는 잘 파고들었다. 끈질긴 디그로 계속해서 상대방에게 플레이 반복을 강요했고, 체력과 집중력이 평소 같지 않았던 정관장 선수들은 결정적인 상황마다 범실을 하며 무너졌다. 조급한 상황이 되자, 정관장이 자랑하는 국대 미들블로커 정호영, 박은진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둘이 합쳐 0 블로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페퍼 상대로 예상치 못한 높이 열위를 기록했다. 상대가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지만, 이런 점을 물고 늘어져 점수를 내고 세트를 따오는 경험이야 말로 페퍼에게 가장 필요하고 부족한 것이었기에, 어제 승리는 정말 소중하고, 그 짜릿한 마지막 순간을 경험했던 어린 선수들에게는 진정으로 스텝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유일한 비교우위 - 리베로 한다혜
정관장이 페퍼 상대로 17연승을 달릴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심리적 문제만은 아니다. 전 포지션에 걸쳐 좋은 선수들을 보유한 정관장은 전 포지션에 걸쳐... 빈틈이 많은 페퍼와는 어찌 보면 가장 상성이 안 맞는다. 그런데 어제 경기를 치르다 보니... 잘하면, 앞으로도 적어도 이 번 시즌은 페퍼가 정관장 상대로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 보였다.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한 부분이 바로 리베로 쪽에서의 비교우위였다.
간단히 얘기하면 정관장 노란 보다 페퍼 한다혜가 디그, 리시브 모두 훨씬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노란의 기량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팬들 사이에서 나온 지는 제법 되었는데... 어제 경기가 잘 풀리지 않자, 고희진 감독도 리베로를 최효서로 교체하면서... 이제 노란이 부동의 리베로급 실력은 아님을 인정했다. 사실 스타팅 리베로가 목적타 서브를 두들겨 맞으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페퍼 팀에게도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든든하게 리베로 자리를 지켜주는 게 한다혜 선수이고, 해마다 빠짐없이 FA 영입에 나섰던 페퍼에게 어찌보면 가장 성공한 FA투자로 봐도 될 정도의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어제 경기에서 한다혜는 노란, 최효서와 큰 기량 격차를 보여주었는데, 적어도 이 리시브 불안은 시즌 중에 쉽게 해결될 부분이 아니다. 섣부른 기대지만, 앞으로도 한다혜가 잘 버텨만 준다면 정관장 전에서는 먼저 상대방 리시브를 무너트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이볼 장인 이한비
경기를 해설하던 캐스터는 외국인 선수 테일러와 박정아를 대신해 어려운 공도 척척 득점으로 연결해 내는 이한비가 대단해 보였는지, '하이볼 장인'이라는 표현을 쓰며 격찬했다. 실제로 그랬다. 55%가 넘는 공격성공률에 20 득점을 기록한 이한비 덕에 페퍼는 승부처에서도 한점 한점 도망가며 세트를 가져올 수 있었고, 정관장의 서브가 무디었던 것인지, 아니면 유독 컨디션이 좋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리시브에서도 잘 버티면서 정말 페퍼가 그토록 기다리던 공수겸장 에이스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팬으로서 스타팅 OH는 박정아, 이예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공격력이 다소 부족한 이예림이라도 기용해서 조금이라도 더 박정아의 리시브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경기력은 당분간 OH 스타팅 자리를 예약하는 느낌이었다. 이번 시즌 공격에서 확실히 성장한 느낌을 주는 이한비, 앞으로 리시브에서 조금만 안정적 모습을 보여주고, 공격에서도 특유의 강력한 스윙을 계속 보여주길 바란다.
최선을 다한 테일러, 19 득점, 3 범실, 공격성공률은 31.2%
지난 포스팅에서... 테일러 선수에게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고, 20 득점에 공격성공률 30%만 넘겼으면 좋겠다고 썼는데... 이리저리 애를 쓰면서... 비슷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가장 긍정적인 건 범실이 3개였다는 건데, 지난 경기에서 10 득점, 10 범실이라는 충격적 기록을 남겼던 걸 감안하면, 이 번 경기에서는 여러모로 좋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강타는 보기 드물었고, 후위공격 등 제대로 된 큰 공격도 기억에 남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박정아, 이한비의 부담을 덜어줄 수는 있다. 뭐 더 데려올 대체자원도 없다는데... 다른 팀 외국인 부러워해본들 소용없는 일이다. 장 감독도 이제 작전시간에 박사랑에게 대놓고 테일러 비었으면 테일러를 줘야 한다고 지적할 정도니... 이렇게 공격 지분에서 한 부분 차지해 준다면, 당장 페퍼가 가장 외국인에게 바라는 걸 해주는 셈이다.
경기를 계속하면 세터와의 호흡도 나아질 거라고 보고... 한 가지 신기한 건... 분명 OP으로 경력을 쌓아왔다고 들었는데, 네트에 뛰어들어와서 공격을 할 때, 꼭 네트 근처에서 러닝점프롤 하지 못하고, 정지 동작을 한 후 점프를 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또 이동공격 스텝은 자연스럽다... 언뜻 보면 OP보다는 MB에 가까운 스텝인데... 전체적으로 OP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스텝이고 안 좋은 습관이다. 가뜩이나 이원정/박사랑 모두 토스 안정성이 떨어지는데... 합을 맞추기가 좀 어렵겠다는 느낌이다. 여자배구 레전드인 장 감독이 이런 안 좋은 습관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리는 없고... 이미 적지 않는 나이 외국인 선수에게 뭘 가르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의지충만이 장점인 선수인만큼... 한 번 교정을 시도해봤으면 한다.
기분 좋게 원정에서 2연승을 챙기고, 정관장포비아도 옛말로 만든 페퍼, 이제 절대 1강 체제로 서서히 가고 있는 흥국생명을 상대한다. 에너지 넘치고 말 잘 듣는(?) 두 외국인 선수를 만나 이제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배구를 하고 있는 김연경과 아이들은 객관적으로 봐도 페퍼보다 한 수 위로 보이지만, 그렇기에 더 잃을 게 없는 경기이다. 신나게 연패기록을 늘려가던 시기에는 선수들만큼이나 정신줄을 놓은 것 같던 장 감독도 어제는 시의적절한 질책과 지시로 선수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인 만큼, 1위 팀 상대로도 감독도 선수도 준비한 것을 보여주는 경기를 하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정아 선수가 무회전 서브 리시브를 조금만 더 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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