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편에서 포르쉐 박사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것은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관계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 하기 앞서 포르쉐 가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즘 인기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막바지 종영을 향해 치닫고 있죠?
재벌집 막내아들의 순양그룹만큼이나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사이에 벌어졌던 스토리는 흥미진진한데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재벌가의 이야기들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포르쉐 박사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의 이름은 루이제와 페리입니다.
자녀가 태어났을 때는 포르쉐 박사가 자동차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었고, 아직 포르쉐 회사를 세우기 한참 전의 일이었죠.
루이제는 성장하여 포르쉐 회사에서 포르쉐 박사의 동업자이자 법률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변호사 안톤 피에히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가 바로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운명적인 관계가 점화되는 시점입니다.
왜냐하면 안톤 피에히가 포르쉐 박사의 사위가 되어 단순히 동업자를 벗어난 한 포르쉐 가문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족이 되면서 안톤 피에히는 포르쉐 박사 대신 폭스바겐과 포르쉐를 잇는 중책을 맡게 되고, 또한 포르쉐 박사와 안톤 피에히의 자손들로부터 폭스바겐과 포르쉐 두 회사를 경영할 인물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안톤 피에히는 포르쉐 박사처럼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처음엔 포르쉐 박사의 소송 변호를 맡으며 인연을 맺습니다. 그가 사위로 발탁되고 포르쉐 박사의 오른팔이 되어, 법률 부문으로 포르쉐 회사를 대표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비범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그는 2차세계대전 후, 포르쉐 박사가 프랑스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 * 자세한 내용은 VOLKSWAGEN 05 편을 참고하세요.) 같은 일행으로서 장장 20개월간의 옥살이에서도 함께 합니다. 그러니 포르쉐 박사가 신임을 할 수 밖에 없는 측근 중에 측근이었겠지요. 사실 안톤 피에히는 포르쉐 박사를 도와 2차세계대전 말기에도 폭스바겐의 공장장에 이어 사장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
프랑스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로는 새로운 회장이 이끄는 폭스바겐과 협약을 맺어, 이전에 포르쉐 박사가 폭스바겐을 위해 설계했던 비틀의 특허료를 받아내었고, 오스트리아 내의 폭스바겐 차량 판매권을 포르쉐가 소유하기로 하는 등 폭스바겐과 포르쉐 사이의 각종 상호 협력을 원만하게 이끌어냅니다. 이러한 협력으로 얻어진 자금은 종전 후 포르쉐가 정상화 되는데 큰 보탬이 됩니다.
루이제와 페리는 슬하에 각각 자녀들을 넷씩 낳습니다. 포르쉐 가문은 이때부터 친가쪽 포르쉐 집안과 외가쪽 피에히 집안으로 나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족의 구성원들이 많아지면 이견도 많아지고 권력을 둘러싼 분쟁이 생기기 마련인가 봅니다. 페리의 막내 아들이자 현재까지 포르쉐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볼프강 포르쉐와 루이제의 둘째 아들이자 2002년도까지 폭스바겐을 회장으로 이끌던 페르디난트 피에히 사이의 경쟁은 지금도 자동차 업계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재벌집 막내 아들과 재벌집 둘째 아들의 싸움!
과연 어떤 갈등 이었을까요?
포르쉐 박사의 1951년 사망 이후 포르쉐는 자연스럽게 아들인 페리의 주도로 경영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가 진두지휘하여 만들어낸 포르쉐356은 폭스바겐 비틀의 플랫폼을 이용한 포르쉐 최초의 양산차로서, 큰 인기에 힘입어 포르쉐가 유럽의 스포츠카 메이커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탁월한 경영자이자 스포츠카 매니아로 알려진 그는 이어서 1963년 포르쉐의 전설적인 스포츠카 포르쉐911을 내놓습니다. 세대를 거듭해도 초기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독특한 디자인 특성 덕분에 8세대에 이르는 현재까지 전세계 스포츠카 매니아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포르쉐의 간판 모델이죠. 한편 멋진 방패 모양의 포르쉐 로고는 페리가 1952년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뉴욕을 방문했을 때 미국 측 수입 담당 인사로부터 로고에 대한 질문을 받고 즉석에서 냅킨에 그린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고 스케치가 상당히 멋지죠? 선에 힘이 있는 것이 제가 보기에 많이 그림을 그려본 사람의 실력 같습니다. 페리 포르쉐가 디자인에도 능한 것을 보면 아버지를 닮아 상당히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포르쉐의 리더였음에도 불구하고, 개발하는 차량의 마지막 볼트까지 직접 점검하고 확인했다고 하니까요. 제가 학교에서 자동차 디자인 전공 당시 교수님들이 항상 말하기를 종이가 없으면 냅킨에라도 차를 그려오라고 그렇게 닥달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냅킨 자체가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침튀도록 강조하셨는데 말이죠. 또한 이러한 이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페리 포르쉐의 큰 아들인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는 포르쉐 디자인 스튜디오의 매니저가 되어 멋진 디자인을 뽑아냅니다. 그가 바로 포르쉐 911의 첫모델을 디자인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보면 포르쉐는 재벌가 가족들이 다들 능력자였던 것 같습니다. 누나인 루이제 역시 남편인 안톤 피에히의 사망 이후 포르쉐 경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유럽에 대규모 자동차 판매망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하네요. 포르쉐 박사는 두 자녀인 루이제와 페리의 능력이 둘다 출중함을 알아본 탓인지 유산을 정확히 절반씩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한편 페리 포르쉐와 1960년대에 크게 대립각을 세우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페리 포르쉐의 조카이자 루이제의 둘째 아들 페르디난트 피에히입니다. 본명도 외할아버지인 포르쉐 박사와 동일한 것처럼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포르쉐 박사의 자손들 중에서 포르쉐 박사의 성격과 천재성을 그대로 빼어다 박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동차 레이싱을 좋아한다는 점, 열정적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지리 않는다는 점들 말이죠. 그리고 윗사람과의 갈등, 억센 고집 이런 것들 조차도요.
스위스 취리히의 연방 공대에서 공학을 전공한 이후 1962년부터 포르쉐에서 경력을 쌓던 그는 1960년대 후반에 회사 내에서 큰 사고를 치게 됩니다. 바로 전설적인 레이스카 포르쉐 917의 개발 과정 때문입니다.
매사에 열정적이던 그는 1966년부터 포르쉐의 테스트 책임자로 일하면서 그가 손댄 레이스카마다 경주에서 우승을 하는 쾌거들을 이뤄냅니다. 그런데 그가 1968년부터 포르쉐의 개발 책임자로 직함을 옮기면서 회사와의 갈등이 깊어집니다. 당대의 경쟁 업체들을 이기고자하는 열망이 하늘을 찔렀던 그는 포르쉐가 한차원 높은 스포츠카 브랜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레이싱 대회에서의 더 많은 성공이 필연적이라고 보고, 당시 포르쉐의 사장이었던 삼촌 페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포르쉐 917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고 하죠.
아직 포르쉐가 자금이 넉넉한 대형 회사는 아니었기에,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회사의 발전을 더 중요시 생각하는 삼촌의 눈에 조카가 밀어부치는 일들이 못마땅해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르망24 레이스 대회에서 경쟁자인 포드와 페라리를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주위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고의 레이스카 개발에 몰두합니다. 수 많은 도전과 테스트 끝에 전설적인 포르쉐 917 25대를 만들어내었고, 결국 이것으로 1971년과 1972년 르망 24시 대회의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당시엔 오늘날 풍동 테스트나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이 당연히 없었기에 일일히 트랙에서 주행 테스트를 하고, 차량을 고치고 하는 작업들을 수없이 반복했고 이때문에 자동차 레이서들이 테스트 도중 사망하는 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비용도 많이 들었겠죠.
이러한 각고의 노력끝에 태어난 포르쉐 917은 50년이나 지났지만, 이 차가 가진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스타일링은 오늘날에도 전혀 부족해보이지 않는 큰 임팩트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포르쉐 917K 버전은 특유의 유선형 몸체와 하늘색 색상의 조합이 정말 최고라고 생각이 드네요. 포르쉐 917의 거친 숨소리를 생생하게 느끼고 싶으시면 스티브 맥퀸의 영화 르망 (LeMans) 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스티브 맥퀸의 남성적인 매력이 포르쉐 917에 기가 막히게 잘 녹아들었던 전설적인 영화이죠.
한편 맷데이먼과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2019년 영화 포드V페라리를 보면 1960년대 르망24시 경주대회는 포드와 페라리가 꽉 잡았다고 합니다. 그 아성을 비집고 포르쉐 917이 연이은 우승을 했으니, 당시 레이싱계에 큰 화젯거리였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무리한 개발 비용으로 인하여 페르디난트 피에히와 회사 사이의 갈등은 외가와 친가 가문의 경영권 갈등으로 비화가 되고 점차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포르쉐 박사의 자손들이 회사 내 여기저기서 역할을 감당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화합이 될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경영 정상화를 위해 결국 외가와 친가가 경영권 없이 전문 경영인을 들이기로 하면서 표면화된 갈등이 정리가 됩니다.
이후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포르쉐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1972년 폭스바겐 산하 아우디로 이직하여 경력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천재의 실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나봅니다. 포르쉐에서 쫓겨난 처지를 한풀이라도 하듯 그는 아우디에 재직하면서 엄청난 성과를 내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콰트로 사륜구동 시스템, TDI 디젤 직분사 엔진, 알루미늄 플랫폼 등이 모두 그의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과감한 도전끝에 그는 아우디를 평범한 브랜드에서 프리미엄 브랜드로 발전시킨 실력을 인정받아 1988년 아우디의 사장이 되었고, 결국 1993년 아우디의 모기업인 폭스바겐의 회장의 자리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가 폭스바겐의 최고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990년대 폭스바겐은 좋지 않은 실적의 연속으로 큰 위기의 상태였습니다. 강력한 리더쉽으로 위기의 회사를 구원해줄 걸출한 인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차를 잘 아는 전문가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총 책임자가 되면서 폭스바겐은 부활의 전기를 마련합니다.
먼저 그의 주도로 국민차 비틀을 부활 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그가 1994년 미국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뉴비틀 컨셉카를 전시하자 과거의 추억을 잘 되살렸다며 큰 감동을 받은 전세계 팬들로부터 무려 3만5천여 통이 넘는 전화와 편지가 회사에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이차를 시장에 내놓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되찾은 폭스바겐은 1998년 뉴비틀을 양산하면서 비틀의 전통과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한편 그는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회사의 체질을 개선했고, 람보르기니, 벤틀리, 부가티 등 다양한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들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하여 오늘날의 폭스바겐 그룹의 토대를 쌓습니다. 또한 폭스바겐 투아렉과 포르쉐 카이엔, 아우디 Q7 등 브랜드 간의 프레임과 부품 공유를 실시하면서 개발 비용을 크게 절감하여 자동차의 상품성과 생산성을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여 불안했던 폭스바겐의 경영상태를 흑자로 돌려놓는데 성공했고, 폭스바겐이 수많은 브랜드를 거느린 세계적인 거대 자동차 그룹으로서 재기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합니다.
그러면 태동 단계부터 긴밀한 인연을 이어온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호형호제 관계? 애증의 관계? 공생의 관계? 아니면 내밀한 관계?
저는 애증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폭스바겐이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반 허스트 소령에 의해 기사회생하게 되면서 재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포르쉐 박사가 개발해준 비틀을 양산한 덕분이었습니다. 반대로 포르쉐 박사와 아들 페리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 포르쉐가 정상화될 수 있었던 것은 포르쉐가 폭스바겐 비틀의 플랫폼을 가져다가 포르쉐356 등 다양한 차량 모델을 개발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스포츠카만 만들던 포르쉐가 1990년대 경영실적이 악화되자 폭스바겐의 투아렉 플랫폼을 이용하여 첫 포르쉐 SUV 카이엔을 만들고 기사회생하게 된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는 공생의 관계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돕던 그들은 이번엔 경영권 인수를 위해 한바탕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2000년대 들어 카이엔 등 연이은 자동차 모델들의 성공으로 큰 실적을 쌓게 된 포르쉐는 사내 보유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딴 생각을 품게 되는데요, 2005년부터 페리 포르쉐의 "재벌집 막내 아들" 볼프캉 포르쉐의 주도로 폭스바겐의 지분을 집중 매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2008년 폭스바겐 지분을 30퍼센트 이상 획득하고나서 자신감이 생기자 규모가 훨씬 작은 포르쉐가 몇 배나 큰 폭스바겐을 적대적 인수합병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성공을 하는가 싶더니 암초를 만나게 되는데요, 이때 마침 터진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상황이 급반전되게 됩니다. 인수 자금 중 상당액을 빌려서 충당한 포르쉐가 급격히 늘어난 대출 이자와 자금 압박으로 이를 갚지 못하고 순식간에 자금난을 겪게 되면서 큰 난리를 겪게 됩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포르쉐는 자신들이 인수하려던 폭스바겐에 긴급 자금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이미 폭스바겐의 회장에서 물러났지만, 폭스바겐 이사회 의장으로 막강한 실권을 휘두르던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주도로 반격을 당하게 됩니다. 반대로 포르쉐가 2010년 폭스바겐에 인수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약 50년전 포르쉐에서 쫓겨난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완벽한 복수라고 해야할까요? 꼼작없이 포르쉐는 폭스바겐의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항간에는 이것이 무늬만 인수합병이지 결국엔 포르쉐 가문의 승리이자 자기들끼리 짜고쳤던 고스톱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폭스바겐의 지분을 가장 많이 소유한 것은 포르쉐 SE라고 불리우는 포르쉐 지주회사로서 사실 이들의 정체는 포르쉐 가문이 100% 지분을 소유하고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는 회사라고 합니다. 폭스바겐에 의해 포르쉐가 인수당했지만, 그 폭스바겐을 조종하는 것은 포르쉐 가문이라는 것이지요.
인수 전쟁의 정확한 원인과 결과는 포르쉐 가문만 알고 있겠지만, 과정이 어찌되었건 두 회사는 힘들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서 서로 도와주니 그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습니다. 폭스바겐은 2021년 기준 전세계 자동차 생산량 2위의 초 거대 규모에, 전세계 유일의 상용차부터 스포츠카 소형차 브랜드 등 모든 차량 세그먼트의 브랜드들을 소유한 자동차 그룹이 되었습니다. 한편 2022년 포르쉐는 유럽 자동차 시장에서 폭스바겐보다 시가총액 기준으로 더 큰 회사가 되었으니, 갈등이 있었다는 겉보기와는 달리 내실면에서는 서로 윈윈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글을 읽어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재벌집 막내아들"의 순양 가문만큼 이들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다고 느끼지 않으셨나요?
과연 갈등의 주역 폭스바겐의 전 회장 페르디난트 피에히와 포르쉐의 회장 볼프캉 포르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에는 비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본뒤에 지난 2015년 전세계를 강타한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사건을 중심으로 두 주역의 근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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