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독일이 처한 상황은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1차세계대전 이후 연합국들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으면서
독일은 연합국들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는데,
딱히 방법이 없던 독일 정부는 자국 시장에 화폐의 발행과 유통을 순식간에 증가시키게 되고
이로인해 발생한 최악의 인플레이션은 그렇지 않아도 허약해진 독일 경제를 강타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 국민들은 종전 당시 빵 한 개의 가격이 0.5 마르크에서
5년만에 1000억 마르크가 되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반 인플레이션을 뛰어넘어 하이퍼인플레이션이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알짜배기 영토였던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게 할양하는 것은 물론
해외의 식민지 처리 역시 연합국에 위탁하게 되자
폭발 직전의 독일 국민들은 나약한 정부를 뒤로 하고, 나치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정권을 잡은 나치는 우선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열악한 경제 상황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독일 국민들에게
반드시 달콤한 희망과 비젼을 심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국민을 선동하는 방식을 너무나 잘 알았던 나치는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므로,
근면한 노동 이외에도 일상 생활의 여가도 일등 국민답게 즐길 수 있는
기회와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홍보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나치는 다양한 정책을 수립합니다.
전 유럽과 독일 사이에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도로를 건설하고,
그 위를 달릴만한 자동차를 저렴하게 생산하여
신속하게 국민들에게 공급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1933년 1월 총리가 된 히틀러는 이를 위해 먼저 아우토반의 건설을 지시합니다.
실업자 수십만명이 아우토반의 공사에 투입되면서 히틀러 집권기간에만
무려 4000㎞ (현재 총연장은 1만5000㎞)가 건설되었으며,
유사시에 활주로로도 사용가능하게 함으로서 또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초기부터 달콤한 정부 정책들은 오로지 국민들만 바라보고 이행된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어쨌든 당시 아우토반을 통행하는 모든 차량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고,
물류의 혁신을 통해 주춤했던 독일의 경제가 기지개를 켜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아우토반이 자동차와 운송산업을 비롯해
독일 경제의 전반적인 회복에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되자,
히틀러는 이제 독일 국민차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적임자를 물색합니다.
1934년 그는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에게
자신의 목표에 부합하는 국민차를 만들 것을 요청합니다.
포르셰 박사는 히틀러와 같이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바로 폭스바겐 1편에서 다룬 현재 유럽 최고의 자동차 회사 포르쉐의 창업주입니다.
천재적인 실력으로 활동 무대를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옮겨
여러 자동차 회사를 경험한 끝에 1931년 자신의 사업체를 차려
다른 회사들에 자문을 해주면서 나름 잘 나가던 경영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히틀러의 눈에 띄게 된 것은 당연했겠죠.
총 세 명의 기술자가 물망에 올랐으나 나머지 두명이 유태인이라
최종적으로 포르쉐 박사가 선정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에 히틀러는 포르셰 박사에게 다음의 요구 조건들을 친필로 적어 전달합니다.
“어른 2명과 어린 아이 3명을 태울수 있도록 공간이 넉넉해야 한다,
시속 100킬로로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차량 가격이 990마르크를 넘지 않으며, 유지 보수 비용이 저렴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친필이 적힌 메모를 받아 든 포르쉐 박사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당시 작은 모터사이클 가격에 해당하는 990마르크의 가격으로
차량을 제작할 수 있는 회사는 독일에 없었기에
천재 엔지니어로 이름을 떨치던 포르쉐 박사가 독일 정부의 염원을 담아 역사적인 총대를 매게 된 것입니다.
990마르크면 당시로선 혁신적으로 저렴하게 책정된 자동차 가격이었으나,
사실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독일 경제 상황에서,
이를 한번에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국민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치는 저축을 통해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제도를 고안했습니다.
일주일에 5마르크를 정기적으로 저축하고 저금 총액이 자동차 가격에 다다르면
누구나 새 자동차를 받아 몰 수 있다고 선전하며 가입을 촉구했습니다.
이 제도는 독일 국민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고 곧 약 34만명의 회원이 모집됩니다.
이렇게 저축된 자금을 사용하여 정부의 주도로 추진 된 모델이 바로 그 유명한 “비틀”입니다.
포르쉐박사는 나치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약 3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드디어 1936년 비틀 개발에 성공합니다.
공기 저항을 최소화한 유선형의 디자인에 냉각수 없이도 운행이 가능한 공냉식 엔진을
차량 뒷편에 위치시켜 공간을 극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포르쉐박사는 보다 효율적인 차량 생산 방식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디트로이트의 포드자동차 공장도 견학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제대로 자동차 공장이 가동 되기도 전인 1939년,
최악의 전쟁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34만명의 품에 국민차를 안겨준다는 히틀러의 원대한 꿈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며,
결국 제대로된 국민차 생산은 2차세계대전 이후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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