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외교부 국가개황)
*VOLKSWAGEN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시려면, 아래 글을 클릭해주시기 바랍니다.
1. 종교개혁 1517
2. 30년 전쟁 1618 ~ 1648
3. 프리드리히2세와 7년 전쟁 1756 ~ 1780
4. 히틀러와 반유대주의 1933~1945
EU를 이끄는 강국이자, 두 차례 세계대전의 책임을 처절하게 반성하고, 짧은 시간에 다시 국제사회 리더가 된 독일. 하지만,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긴 시간, 독일은 유럽의 리더 역할을 하지 못했고, 영국과 프랑스 편에서 다루었던 ‘산업혁명’과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앞장서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독일이 어떻게 유럽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 것일까요? 근대 독일의 모습을 형성한 몇 가지 사건을 통해 독일의 역사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종교개혁(1517~)
종교개혁은 유럽의 모든 국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고, 제각각 그 영향이 달랐습니다만,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국가 중앙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독일에서의 교황의 사치스러운 생활 및 교회의 비리는 14세기 이후 극에 달했고, 사람들의 불만도 상당했습니다. 특히,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 성당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타락은 그 민낯을 드러내는 수준에 다다릅니다. 수도사 테첼이 사람들에게 돈만 내면 지금까지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면서 ‘면죄부’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판매한 것입니다. 국가의 공식행사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등 공공연한 권력을 행사했던 교회가 면죄부를 팔게 되자, 사람들은 당연히 강제적인 판매로 느끼게 되었고, 교회에 대한 불만은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작태에 앞장서서 이의를 제기한 성직자가 바로 마르틴 루터(1843~1546)였습니다. 그는 면죄부 판매를 통렬하게 비난하게 시작했고, 마침내 1517년 유명한 ‘95개조 논제’를 내걸고 신학자의 양심과 논리로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임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이 사건으로 독일에서 유럽 최초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사실 ‘95개조 논제’는 루터가 성직자로서 당시 교회를 논파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지만, 교회의 전횡과 비리에 시달려왔던 유럽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퍼져나겼습니다. 이러한 ‘95개조 논제’의 전파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큰 기여를 했는데, 이제는 지식이 인쇄되어 민중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루터가 먼저 당시 교회에 대해 논리정연한 비판을 가하자, 교황은 상처입은 교회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교서를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루터가 스스로 반성하고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관련인물을 모두 파문에 처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현재와 달리 중세 유럽에서 파문은 모든 공동체 생활의 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루터와 같은 성직자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 없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먼저 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우며, 사실상 교황의 권위를 부정했습니다. 결국 1521년 교황은 최종적으로 루터를 파문시켰고, 9개월 동안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는 훗날 독일인이 통일된 성서를 읽게함으로써 독일어 통일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인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는데 여생을 바칩니다.
이렇듯 당시 교회를 통렬하게 비난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 애썼던 루터이지만, 그 후 농민들이 착취와 탄압에 맞서 일으킨 독일농민전쟁(1525)에서는 농민이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농민들은 폭도라 간주하고 영주의 편에 섰습니다. 사회 안정과 질서를 중시했던 그는 농민전쟁은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민을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던 사회운동이었던 농민전쟁은 교회 중심의 사회질서를 비판했던 루터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루터 본인은 끝내 농민 편에 서지 않았던 점은 그 자체로 당시 사회개혁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영주군은 무력으로 농민군을 진압했습니다. 농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회 봉건적 요소는 산업혁명 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끔찍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루터파 교회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어서, 루터파 제후들의 생겨남으로서 종교의 차이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독일농민전쟁 후 루터파와 가톨릭파로 양분된 제후들의 갈등은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1555)’로 가라앉은 듯 보였지만, 진정한 의미 종교 자유가 허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지배자의 신앙이 지배지의 신앙이다'라는 원칙에 의거, 주민은 정해진 종교를 믿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각 제후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것에 불과했기에 독일이 중세 시대에 300여 개의 영방국가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분열은 약 60년 후 독일 전역을 더 큰 종교전쟁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자동차강국의 역사 WADI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VOLKSWAGEN의 독일 역사 02. 30년 전쟁 (4) | 2022.12.25 |
---|---|
RENAULT의 프랑스 역사 03. 세계대전, 프랑스 자동차 산업 (6) | 2022.12.08 |
RENAULT의 프랑스 역사 02. 프랑스 민주/민족국가의 완성, 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 (0) | 2022.11.11 |
RENAULT의 프랑스 역사 01. 거대한 종교전쟁의 시작과 끝 (2) | 2022.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