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_프랑스에서 보물찾기)
1. 낭트칙령(1598)과 퐁텐블로칙령(1685)
2. 프랑스대혁명(1789)
3. 나폴레옹전쟁(1803~1815)
4. 드레퓌스 사건(1894)
5. 세계대전(1917, 1939)
6. 프랑스의 산업구조와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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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랑스대혁명(1789)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치인 민주주의와 다양성. 프랑스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자, 근대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역사에 드러낸 프랑스대혁명은 우발적 사건의 결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은 여러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게 됩니다.
첫째, 프랑스는 봉건제 사회로서 약점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이미 산업혁명을 거쳐 봉건제를 넘어선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영주들이 지대와 각종 권력을 이용해 농민들을 억합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프랑스는 신분제 사회로서 특권층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여전히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부를 계속해서 축적하지 못한 몰락한 귀족, 그리고 그 외 다양한 국민들로 구성된 ‘제3신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3신분은 상공업·금융 등을 통해 형성된 부르주아와 많은 농민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들은 특권층에게 지배받는다는 것에서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대혁명 과정에 단결한 제3신분은 혁명을 주도하게 됩니다.
셋째, 프랑스는 절대왕정 국가로서 늘 많은 돈을 필요로 했습니다. 왕권신수설을 기반으로 왕의 절대적 권력을 유지해야하는 절대왕정은 관료제와 상비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두 제도는 모두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는 국가재정을 악화시킨 큰 원인이었습니다.
절대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던 국왕은 당시 고등법원 등 여러 반대에 부딪혀 일반적인 방식으로 재정 적자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삼부회를 소집하여, 이를 해결하려 했으나 오히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관료제와 상비군>
관료제 | 상비군 |
복잡하고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정해진 규칙과 절차에 따라 전문적 · 체계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대규모 조직이다. | 전쟁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유지되는 군대. 정규군이라고도 한다. 근대적인 상비군, 즉 정규군은 국가 방위를 위하여 국가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정식 군대를 말한다. |
넷째, 프랑스에는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부르주아가 있었습니다.
비록 프랑스가 특권제·신분제 사회였지만, 경제적으로 정체되지는 않았습니다. 18세기 중반까지 농업생산 증가와 상공업 발전을 바탕으로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전체적으로 번영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부르주아들이 부를 축적하면서 힘을 키워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번영의 혜택은 빈부격차를 심화시켰고, 상공업 발전에 편승하지 못한 귀족들이 하층민을 더욱 압박하여 본인들의 손해를 만회하려 했기 때문에 농민-부르주아가 단결하여 귀족들에게 대항하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재정적자는 심화되어 새로운 세금(토지세)를 신설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서 삼부회가 소집됩니다.
1789년 5월 삼부회가 소집되었지만, 루이 16세와 제3신분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루이 16세는 기존 사회체제를 개혁하거나 민주화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세금 신설을 통해 재정적자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에 반해 제3신분은 각 신분별로 같은 표결권을 가진 표결원칙을 개혁하려 했습니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이 단합할 경우, 제3신분은 아무리 개혁을 주장하여도 2:1 로 뜻을 이룰 수 없었기에, 어떠한 결정보다도 이 개혁은 중요했습니다.
양 측 입장은 쉽게 조율될 수 없었고, 결국 국민 중 절대다수인 제3신분인 별도의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별도 헌법을 제정할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루이 16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소집하여 탄압하려 하자, 파리시민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이에 맞서기로 했습니다. 민병대는 무장을 위해, 무기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습니다. 비록 감옥에는 무기가 없었지만,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거한 이 사건을 계기로 파리에서는 왕정과 시민세력간 대결이 본격화되고, 지방에서도 농민봉기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국민회의는 봉건제 폐지(8월4일)와 인권선언(8월26일)을 잇달아 발표하였으나, 왕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점진적 개혁과 혼란이 이어지는 1791년 입법의회가 구성되어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 시대가 열리는 듯 싶었습니다. 이러한 프랑스의 급진적 절대군주제 폐지는 주변 왕국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결국 혁명이 대외전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패전이 이어지자 민중들의 불만은 왕실로 향했고, 루이 16세는 궁전을 점령한 민중들을 피해 의회로 피신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후 국민의회는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1792년 9월 21일 공화정을 선포합니다. 이후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됨으로서 프랑스내외 혁명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하지만, 국내혼란은 가중되어 인플레이션이 심해졌고, 유럽전쟁에서도 패전이 이어졌습니다.
이어지는 극심한 혼란 속에 의회를 장악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이어졌고,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를 몰아낸 테르미도르 반동 등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지만, 어느 정치세력도 공화정 초기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기나긴 대외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천재 사령관이 난세 영웅으로 등장하여 프랑스 민중의 지지를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합니다.
프랑스대혁명은 결국 나폴레옹이라는 또다른 황제를 탄생시켰고, 그 과정에 극심한 혼란과 무고한 희생이 이어졌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우선 여전히 중세 봉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유럽에서 산업화 영향으로 형성된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한 민주주의 혁명이 공화정 수립에 성공함으로써, 당시 전 유럽 민중들에게 큰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또한, 기나긴 대외전쟁에도 민주주의 공화정 원칙이 유지됨으로서 유럽 역사에 있어서 왕정-공화정 대결 구도가 본격화되었고, 이는 프랑스 역사, 나아가 세계사적 측면에서도 의회 민주주의가 중요하게 인식되는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3. 나폴레옹전쟁(1803~1815)
나폴레옹은 기나긴 전쟁에서 보여준 천재지휘관으로서의 역량과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대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민영웅으로서 권력을 장악합니다. 국민들은 나폴레옹이 헌법을 준수하고 혁명의 성과를 계승할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내가 곧 혁명이다’라는 말을 남겼듯이, 초반 프랑스대혁명 성과를 계승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토지개혁과 세금개혁을 실시하여 민중의 요구에 부응했으며, 행정개혁도 계속하여 중앙집권화를 꾀합니다. 이러한 개혁 속에 언론검열을 강화하고, 여성차별을 법제화하며, 정교협약을 통해 가톨릭을 국교로 재확인하는 등 보수적인 통치도 이어가지만, 빛나는 대외전쟁 승리로 인한 대외안정 속에 나폴레옹을 위협할 사람은 없어보였습니다. 집권 후, 1800년 마렝고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1801년에는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하였으며, 반프랑스 전선에 외로이 남은 영국과도 1802년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실로 오랜만에 프랑스에게는 대외평화가 찾아옵니다. 1804년,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됩니다. 사회적 평등을 보장하고, 대외전쟁에서 프랑스 자긍심을 되찾아준 나폴레옹 황제는 영원할 듯 했지만, 영국을 중심으로 한 반 프랑스 동맹은 대혁명 성과를 계승하는 황제를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동맹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유럽정복전쟁이 본격화되었고, 나폴레옹은 독일, 이탈리아를 연파하며, 유럽대륙을 장악했습니다.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은 후, 유일하게 제압하지 못한 영국의 상품 판매를 막기 위해 대륙봉쇄령까지 발표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통치는 곧 위기를 맞이합니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민족주의 전쟁은 진압되었지만, 전 유럽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륙봉쇄령은 영국의 상품을 수입하지 못하는 유럽 각국에도 큰 불편이었기에, 결국 1811 년 러시아가 영국과 교역을 재개합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이 1812년 직접 러시아를 침공하였으나,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어찌보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은 파멸을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사적으로 패했고, 50만명의 군사를 잃었습니다. 패배 후에는 더욱 강고해진 유럽 강대국 간 동맹을 상대해야했고, 1813년 프러시아에 대패한 후 1814년에는 모든 권력을 잃고 엘바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하지만, 야망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이듬해 파리로 돌아와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자유주의적 헌법을 약속했지만, 워털루에서의 결정적 패배로 백일천하로 끝나게 됩니다.
유럽을 지배하려는 나폴레옹의 야망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도전은 전 유럽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전파합니다. 가는 곳마다 봉건제를 폐지하였고, 혁명적 제도를 도입하였기에, 역설적이지만 독재자 나폴레옹의 활약으로 대혁명 정신은 널리 전파됩니다. 더하여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지역은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저항하려 했기 때문에 유럽에서의 민족주의가 성장한 계기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4. 드레퓌스 사건(1894)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의 민주주의 즉, 공화정은 불안하게 유지됩니다. 그 민주주의의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입니다. 뮐루즈 지역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드레퓌스는 뮐루즈가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고, 그후 장교로 성장합니다. 1984년 그가 독일에 간첩혐의를 받고 반역죄로 종신형 판결을 받은 후에도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은 변함없었습니다. 계급장이 공식적으로 박탈되는 순간에도 그는 “나는 무죄다! 프랑스 만세! 군대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 후 진범이 드러났지만 군 수뇌부는 사건을 은폐하였고, 드레퓌스의 가족들이 진범을 고발했지만 곧 무죄석방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1898년 에밀 졸라가 관련 논설을 발표하면서, 프랑스를 뒤흔드는 논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인권이냐 국가 이익이냐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면서 사건의 쟁점은 유죄, 무죄를 떠나 국가를 위해 개인의 인권을 박탈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로 이어집니다. 날조된 증거를 바탕으로 드레퓌스에게 다시 유죄가 선고되고, 날조된 증거를 제출한 사람이 자살하는 등 논쟁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1899년 여전히 유죄인 상태에서 드레퓌스는 특사로 석방되었고, 그 후에도 무죄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여 결국 1906년 최고재판소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군에 복직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사회는 분열되고 혼란에 빠지긴 했지만 결국 진실이 밝혀지고, 자유주의 지식인이 승리하면서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혁명의 국가 프랑스가 유태인에게 공격적 성향을 보이며 민주주의 이면을 드러냈다는 점과 지식인 에밀 졸라의 논설로 인해 촉발되어 결국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이 결집해 국가권력에 맞서는 논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프랑스 민주주의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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