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AI 27. 품생품사(品生品死) 품질에 살고 품질에 죽겠다! – 정몽구 회장의 뚝심경영 이야기 (4)
여러분들은 살면서 "각서"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딱히 써본 적은 없습니다만... 주변에 사업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금 부족 등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썼다고 합니다. 이처럼 각서는 인생에서 정말 궁지에 몰렸을 상황이 아니라면 거의 쓸 일이 없는 것이죠. 보통 각서의 말미에는 본인의 책임감을 보여주는 설명이 붙기 마련입니다. 즉 정해진 시일까지 돈을 갚거나 서로 약속한 행위를 완료하지 못할 시에는 상대방의 어떠한 조처도 모두 감수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서명 혹은 날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999년 현대자동차가 라인업 강화 목적으로 트라제 XG 미니밴을 출시했었던 때의 일입니다. 유럽형 고급 스타일을 지향하며 부푼 꿈을 안고 미국에 수출했지만... 이 모델은 미국에서 6개월동안 무려 5번이나 리콜되는 품질불량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격노한 정몽구 회장... 그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합니다. 회사 내 모든 관리자급 사원들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회사 업무에 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끝에... 그는 과장급 이상 모든 직원들에게 담당 제품의 품질 이상 시 직접 그리고 무한하게 책임을 묻겠다는 품질 각서를 받아냅니다. 이전에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겠지만 각서 이후에 만약 품질관련 문제가 발생할 경우 엄중히 따지겠다는 것입니다.
정몽구 회장이 이처럼 특단의 조치를 취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앞편에서 서술한 것처럼 그의 북미 출장은 그에게 있어 최악의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현대자동차의 조악한 품질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이후, 정몽구 회장의 마음 속에는 승부사의 기질이 발동합니다. 아버지와 삼촌이 그동안 일구어 왔던 현대자동차가 도약하느냐 추락하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바로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와신상담. 그는 분석에 골몰합니다. 현대자동차 이전 그가 맡았던 현대 계열사마다 시장에서 단숨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그의 비결은 바로 냉철한 현실 분석에 있었습니다. 이에 정몽구 회장은 전문가 집단의 힘을 빌리기로 합니다. 미국에서 귀국 즉시 그는 미국의 JD파워에 연락을 취하고, 현대자동차가 품질과 관련한 컨설팅을 받도록 지시합니다. 그리고 컨설팅의 결과에 따라 품질 제일주의를 최우선 경영원칙으로 삼으면서 강력한 품질 경영만이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위기 의식을 사내에 불어넣습니다.
미국의 JD 파워는 1968년에 설립된 세계적인 마케팅 정보회사로서 미국 시장에 판매되는 신차를 대상으로 소비자 불만을 조사하고 초기품질지수(IQS : Initial Quality Study)를 측정하여 공표하는 회사로 유명합니다. 미국 시장에서 JD 파워의 영향력이 막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IQS에 따라 미국 시장 내 판매가 영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99년 당시의 상황을 예로 들어봅니다. 당시 JD파워가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선두 주자였던 토요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동차 천 대당 결함수가 130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는 천 대당 결함수가 250개가 넘었습니다. 이처럼 초라한 결과에 충격을 받은 정몽구 회장이 위기 의식을 가지고 품질 제일주의를 천명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드디어 JD 파워의 컨설팅 결과가 나왔습니다. 당시의 그들의 진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첫째, 제품기획, 설계, 생산 단계에 고객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 둘째, 고질적 품질 문제는 모델이 바뀌어도 재발하고 있다.
- 셋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책이 불완전하여 시장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 넷째, 차량 한대 당 문제발생 건수가 전체 브랜드 평균 대비 2~3배나 높다.
- 다섯째, 협력업체 품질관리가 부족하다.
정몽구 회장은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JD 파워의 충고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품질 혁신 드라이브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품질 전담 부서입니다. 2002년, 그는 현대자동차 내에 별도의 품질총괄본부를 발족하여 품질관련 업무를 전사적으로 한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시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서울 양재동 사옥 1층에 품질상황실, 품질회의실, 품질확보실 등을 마련했고, 현대와 기아 자동차를 모두 아우르는 품질 컨트롤타워를 가동시켰습니다. 이곳의 특징은 연중 쉬는 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서는 연중무휴 24시간 내내 국내와 국외 현대 기아 자동차와 관련한 모든 품질 문제와 하자를 접수하여 매일 새벽 품질정보보고서(QIR)를 작성하였고 이를 정몽구 회장과 임직원들에게 실시간 공유했습니다. 바로 이것은 JD 파워가 진단한 다섯 가지 사항을 개선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안이었습니다. 한편 양재동 사옥의 품질상황실 앞에는 JD 파워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액자에 적어 걸어놓았다고 하네요. 정몽구 회장은 회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늘 이 액자를 쳐다보면서 초심을 다졌다고 합니다.
이 품질상황실은 2007년 글로벌 종합상황실로 확대됩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당시 회사 내 전세계 12개 종합공장 및 반제품 조립 공장의 현황을 실시간으로 점검할 수 있도록 양재동 본사 2층에 이 본부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른바 현대기아자동차 글로벌 경영의 통합사령부로서 전세계 현대기아 사업장의 현황을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이를 토대로 본사에서 사업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한편 사원들 대상으로는 전사적으로 6시그마 제도를 도입하고 전사품질관리(TQC)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현재 세대에게는 6시그마가 생소하지만, 당시에는 효율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각광받았습니다. 그리고 2003년 5월에는 경기도 남양에 세계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 R&D 센터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몽구 회장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5년 동안 회사의 품질 분야 인력을 8배로 증대시키게 됩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임원들 사이에 "품질본부장"으로 회자될 정도로 그 스스로가 품질 개선의 선봉에 섰다고 합니다. 그는 매월 품질관련 회의를 직접 주재하여 임직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가지게 함은 물론, 신차가 출시될 때 마다 직접 차량을 운전해보면서 사소한 문제점들이라도 깨알같이 짚어냈다고 합니다. 정몽구 회장의 이러한 열정과 전문성은 그 스스로 부품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온 그의 오랜 경험에 있었습니다.
2003년 8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정몽구 회장은 신차종 참관 차 남양연구소를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는 오피러스의 주행 성능 검사였습니다. 그런데 오피러스를 직접 운전하면서 주행 시험장을 몇 바퀴 돌아본 정몽구 회장의 귀에 이상한 소음이 들렸습니다. 그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프로젝트 관련 임원들은 이 정도의 소음은 문제될 것이 없으며 이 소음을 잡기 위해서 개선 작업을 해야한다면 약속된 선적 날짜를 맞출 수 없다고 조언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몽구 회장. 그는 결국 폭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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