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AI 21. 숙명의 한판승부...왕자의 난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8)
어제 미국 일상 글에서 제가 엘에이에 있는 "임페리얼 하이웨이" (Imperial Highway)에 대한 글을 남겼는데요, 이 160킬로미터가 넘는 왕의 길의 대단원이 끝나는 곳이 바로 엘에이 국제공항입니다. 엘에이 국제공항을 마주하는 앞면은 바로 태평양. 그래서 저는 임페리얼 하이웨이라는 이름이 고심끝에 지어진 것인 줄 알았어요. 왕을 향한 길 위에서... 수많은 경쟁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뒤 하늘과 바다를 향해 비상한다는 의미를 담지 않았을까?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태평양을 가득 품을 수 있지만 다른 길로 새는 순간 그 영광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마는... 저는 임페리얼 하이웨이라는 이름이 그런 식으로 탄생한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런 심오한 의미는 저만의 생각이었고, 임페리얼 하이웨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과거에 이 도로를 건설한 회사 이름을 따서 그렇게 지었다더군요 ㅎㅎ. 제가 왕의 길을 달리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오늘은 왕의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서 숨가쁜 경쟁 속에 살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 두 형제를 소개할까 합니다. 지금까지 20여회 현대자동차를 다루면서 한편으로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라는 소제목으로 7차례에 걸쳐서 연재를 하였죠. 그리고 그 안에서 정주영 회장의 여섯 아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소개해드릴 남은 두명은 바로 둘째 정몽구 회장과 다섯째 정몽헌 회장입니다.
앞서 현대자동차 연재글들 속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현대자동차는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최근 몇년 사이 폭풍질주를 하고 있고 2000년도 초반의 암울한 상황을 잊은지 오래입니다. 매출과 브랜드 가치 두 측면에서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죠. 그런데 만약 현대자동차를 이끄는 수장이 지금의 오너가 아닌 다른 이들이었다면 과연 현재 만큼의 빛나는 성과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저는 최근에 왕의 길을 달리며 그런 생각에 까지 미치더군요.
2000년도로 한번 되돌아가봅니다. 2000년 대에 들어오자 정주영 회장의 연세가 많아지면서 그는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경영 일선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됩니다. 재계와 체육계를 왕성하게 오가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끌던 이 위대한 거인도 세월의 힘을 거스를 순 없었던 것이죠. 말년의 정주영 회장에게는 1990년대 초반의 대선도전 실패 그리고 그 이후 현대그룹에 닥친 정치보복으로 인한 상실감 때문에 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199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남북 관계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다하던 정주영 회장은 이제 급격히 대외활동이 줄어들었고, 또한 후계자 선택에 있어서도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은 채 아직 선택을 미루고 있었죠. 이렇게 급격히 노쇠하게 된 정주영 회장의 상태때문에 형제 간의 긴장감은 날로 높아졌갔습니다. 현대그룹의 진정한 후계자를 놓고 아들 간의 갈등이 표면화가 되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나라에 두명의 왕이란 있을 수가 없죠. 두 명의 우두머리가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조금 더 파워가 센 쪽으로 나머지가 흡수되기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주영 왕회장 아들간의 파워게임을 "왕자의 난" 으로 부르며 궁중의 암투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조 왕자의 난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이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경쟁을 벌였던 사건이죠. 1차와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의 중심에 있던 이방원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마침내 왕위를 승계받게 됩니다.
세간에는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충돌을 양보도 피도 눈물도 없는 각자의 욕심으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들 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정도 이해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유년시절부터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눈에 더 들기 위해 형제간의 경쟁이 일상화 되었던 그들이었고, 각자의 역할을 맡아 회사를 이끌게 된 성인이 된 이후에는 그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도 생겨났을 테니까요. 자신의 몰락은 곧 그들의 운명과도 연결되기에 마치 과거 왕자들이 걸었던 숙명과도 같은 길을 따를 수 밖에 없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드네요. 또한 오랜기간 각자 기업을 운영해보면서 우량기업을 차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 2000년 당시에는 정주영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공동 회장 체제로서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원래 정몽구 회장이 현대그룹 단독 회장이었으나, 1998년 정주영 회장은 정몽헌 회장을 그룹회장으로 승진시킨 것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정몽구 회장이 사장단 회의등을 주재하면서 국내 경영을 총괄하고 정몽헌 회장은 해외 수출과 투자 건설 분야를 책임지는 역할을 기대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본심은 정몽헌 회장에 더욱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미 1998년 대북사업을 진행하면서 대북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아들에게 현대그룹을 물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정몽구 회장측과 정몽헌 회장 측은 별도로 대북 사업 플랜을 조직하며 준비하였고 정몽헌 회장측이 내건 파격적인 경협 조건에 북측이 호응하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북사업의 구도는 정몽헌 회장측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주영 회장은 정몽헌 회장을 더욱 신임하게 되지 않았을까합니다. 그러나 그 뒤로 한 그룹 안에 두명의 수장이 존재하게 되면서 그룹의 경영권을 두고서 두 사람의 관계는 골이 깊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둘중에 누구를 최종적으로 하나의 수장으로 낙점할지 고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2000년대 초반은 지금으로부터 벌써 23년전이니 현재와는 상황이 약간 다릅니다. 당시 현대그룹을 상징하는 간판기업은 어디였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현대자동차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당시에는 현대자동차가 아니라 대한민국 1위 건설사였던 현대건설이었습니다. 이때 정몽헌 회장은 현대건설과 현대증권, 현대상선 등 당시 현대그룹에 돈을 벌어다주는 알짜 기업들에 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삼촌인 정세영 회장에 이어서 현대자동차의 신임 오너가 된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 및 자동차와 관련된 계열사 부문에 영향력이 컸습니다.
당시는 당장 뭔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였죠. 결국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정몽구 회장은 금융부문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고자하는 명분으로 정몽헌 회장이 싱가포르 출장으로 국내에 부재시에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의 회장으로 인사조치하였습니다. 이익치 회장은 1969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하고 입사 6개월만에 정주영 회장의 비서로 발탁되어 정주영 회장과 정몽헌 회장 둘을 대를 이어 보좌하게된 최측근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해외에서 듣게 된 정몽헌 회장은 바로 다음날 이를 보류하고 곧이어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회를 통해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공동 회장직을 박탈함으로서 맞서게 됩니다.
이후 단 며칠동안 양측 사이에 숨가쁜 작전이 벌어집니다. 그룹 공동 회장직의 복귀를 허락해 줄 수 있는 인물은 정주영 회장이 유일하기에 정몽구 회장은 와병 중인 정주영 왕회장을 급히 접견하게 되고 회장직의 복귀 허락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장에서 돌아온 정몽헌 회장이 다시 정주영 회장을 접견합니다. 그리고 정몽구 회장에 대한 허락이 무효라는 결정을 다시 받아내게 됩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사람에게서 중요한 결정의 번복이 일어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정주영 회장이 고령에 와병 중이라 벌어진 일로 보입니다.
결국 그 해 3월에 정주영 왕회장은 정몽헌 회장을 단독 그룹회장으로 인정하게되면서 두 사람사이의 갈등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정주영 회장의 결정이 육성으로 흘러나오자 이에 따라야했던 것이죠. 더 이상 현대그룹안에서 버틸 힘이 없었던 정몽구 회장은 그해 9월에 현대자동차를 비롯 자동차 관련 계열사 10곳을 가지고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를 해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몽헌 회장은 정주영 회장에 이어 현대그룹의 중심인 현대건설과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 아산등 26개 계열사를 거느린 실질적인 2대 회장이 됩니다. 곧이어 다섯째인 정몽준 회장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등 중공업 계열로, 셋째인 정몽근회장은 현대백화점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그룹에서 완전히 분리됩니다.
어찌보면 정몽구 회장과의 싸움에서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듯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운명이 뒤바뀌게 됩니다.
글로벌 시장의 문제인지 아니면 경영 능력의 문제였는지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지만, 단 몇개월만에 현대그룹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Y2K로 대표되는 2000년대 초반의 경영 환경은 아주 매서웠습니다. IMF이후 재편된 한국의 경영 환경이 자리잡혀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인수합병을 거치게 되는데 정몽헌 회장의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국내 1위에 다양한 해외 수주에 빛났던 현대건설은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시작으로 2001년 8월엔 채권단의 소유가 되는 운명을 맞습니다. 현대그룹에서 전략적으로 키우던 현대전자 역시 IMF 당시 무리하게 인수했던 LG반도체를 제대로 정상화시키지 못한데다가 전세계적인 반도체 시장 불황의 타격을 입고서 채권단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2012년 새롭게 SK를 주인으로 맞이하게되면서 현대와는 완전히 관련없는 회사가 되지요. 새로운 사명은 하이닉스로서 그저 현대의 앞글자의 알파벳H가 남았을 뿐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정주영 회장이 2001년에 별세한지 2년만에 황태자 정몽헌 회장이 생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정몽헌 회장은 정주영 왕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대북사업에 공을 들이지만 5천억여원을 북한에 불법 송금했다는 이유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도중 자살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남북 합작의 개성공단이 착공된지 한달이 약간 지난 시점에 벌어진 이 일은 재계에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후로 현대그룹은 정몽헌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승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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