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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22. 대북사업을 전담한 다섯째 아들 정몽헌 회장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9)

꿈꾸는 차고 2024. 2. 27.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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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22.  대북사업을 전담한 다섯째 아들 정몽헌 회장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9)

 

혹시 서울 중구 계동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계동은 가히 임금의 터라 할 만합니다. ㅎㅎ 주변이 온통 궁전이에요. 좌측에는 경복궁이 위치해 있고, 우측에는 창덕궁이, 남쪽에는 운현궁, 남동쪽에는 종묘, 그리고 북서쪽에는 청와대가 위치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곳을 지날 때마다 무언가 기품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몇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북촌한옥마을 주변에 갔었는데요, 한복 가게, 각종 특이한 카페, 악세사리 가게도 많고... 정말 멋진 관광명소가 되었더군요.   

 

바로 이렇게 기품이 살아 숨쉬는 계동 초입에 현대그룹의 사옥이 있습니다. 저는 생각해볼 수록 이 사옥의 위치가 절묘한 것 같아요. 그 주변의 궁궐들이 조선 초기, 왕조의 영원을 기원하며 고심끝에 정해졌을 텐데 말이죠. 그러니 현대 측에서는 굳이 명당 위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을 듯 싶습니다  ㅎㅎ 각종 궁궐들과 옛 사적들이 사방에 위치한 이 곳이야로 이미 수백년 동안 최고의 명당이 되어왔을테니까요. 
 

 


 

현대그룹 계동 사옥 위치 (출처 : 구글맵)

 
 


 
 
현대그룹 계동 사옥의 역사는 고 정주영 왕회장이 1976년에 이곳의 부지를 사들임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그 터에는 휘문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1970년대 말에는 마침 휘문고등학교가 다른 강북의 명문고들과 함께 당시 논밭 투성이던 강남으로 이사를 하였던 시기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그 자리에 그룹을 총괄 지휘할 본부를 세우고는 그곳이 세계적인 경제의 중심이 되었으면 하는 큰 기대를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건물이 세워진 때는 현대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한창 뻗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룹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이 장소를 중심으로 현대그룹의 수많은 기업 전략이 기획되고 실행되었습니다. 현대그룹의 총본산이다보니, 현대그룹이 분리되기 이전인 1996년 당시에는 현대의 오너 일가들이 모두 이곳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정주영회장의 집무실은 가장 높은 15층, 정몽구 당시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 14층,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12층,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11층, 요즘에 말이 매우 많아 유명해진 정몽규 당시 HDC그룹 회장과 그의 아버지 포니맨 정세영 HDC그룹 명예회장은 8층에 근무했었다고 하고요. 그야말로 정주영 회장 밑으로 서열 순이었던 것이죠.
 

 

 

 

현대 계동 사옥 (출처 : hr.wanted.co.kr)

 
 

 


주변이 궁궐들로 둘러싸여 딱히 높은 건물이 없기에 이 빌딩의 전망은 정말 좋다고 합니다. 커튼을 열고 큰 창 밖을 바라보노라면 정말 큰 포부가 생길 것만 같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지척의 청와대를 바라다보며 대권의 꿈을 키웠을 것이고, 그의 아들들은 서울 시내를 바라다보며 기업의 주도권을 향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겠지요. 어렸을 때 부모님과 9시 뉴스를 볼라치면, 한국 대기업 관련 내용엔 여지없이 위의 한자로 씌여진 커다란 표지석이 등장하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육중한 바위가 마치 저돌적인 현대의 기업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 빌딩에서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3년 8월 새벽,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바로 이곳 12층 집무실에서 투신하여 그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집무실 탁자 위에 단촐하게 남겨 놓은 것은 자신이 사용하던 안경, 시계, 그리고 흰 편지봉투 세 통에 담긴 유서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전도유망한 현대가의 황태자로서... 한창 일할 나이에 이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정몽헌회장 투신 관련 뉴스 장면 (출처 : 케이비에스 뉴스)


 

 


정몽헌 회장의 개인사를 살펴보기 앞서서 현대그룹의 대북관련 사업을 총괄하던 현대아산에 대해 같이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정주영 회장은 평생 소원이던 남북통일이 시간이 지날 수록 요원해지자, 기업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998년 6월, 소떼 방북이라는 놀라운 발상으로 대북사업에 대한 물꼬를 트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정주영 회장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목표로 현대아산을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현대아산의 초기 자본금은 1000억원 정도였는데 이후 지분 40%와 1800억원의 출자금을 보유한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의 8개 계열사들로부터 2000년까지 5차례의 유상증자를 통해 총자본금 4500억원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금강산 관광을 위해 관광객들을 태우고 출항한 현대아산의 금강호 (출처 : raythep.mk.co.kr)


 

 


정주영 회장의 꿈은 원대했습니다. 현대아산은 이러한 자본을 토대로 총 규모 14억달러에 달하는 대북투자에 나섭니다. 여기에 정주영 회장 특유의 저돌적인 성격이 드러납니다. 일단 금강산 사업 대가로 북한에 지급한 금액이 4억9천만 달러, 호텔, 스키장, 골프장 등 금강산 주변 관광시설 건설에 3억8천만달러를 투자하기로 합니다. 관광뿐이 아닙니다. 전력 및 통신사업, 철도사업, 통천비행장 건설, 임진강 댐, 금강산 수자원 사업, 백두산, 묘향산, 칠보산 관광사업을 포함한 7대 SOC의 30년 독점 사업권 대가로 5억달러, 개성공업지구 투자에 3천3백만달러 등 자본금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하였습니다. 
 
또한 서해안 공단 조성사업, 해주와 남포 등에 자동차 조립공장 설립, 중소기업들의 임가공 공장 유치 등으로 연간 44억 달러의 수출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저렴한 북한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원산 지역에서 20만톤 규모의 낡은 선박의 해체 사업을 추진하고 중동지역으로의 해외건설 공동진출 사업도 모색 한다는 청사진을 내놓았습니다. 마치 머지 않은 미래에 통일이 곧 오기라도 할 것 마냥, 현대아산의 시작은 이처럼 온통 장미빛이었습니다.

 

 

 

2003년 6월 개성공업지구 착공식 장면 (출처 : 현대아산)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가 않았죠. 앞편의 글에서 설명했다시피, 2000년대 초반은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입니다. 아버지로부터 현대아산을 물려받아 대북사업을 추진하던 정몽헌 회장은 바쁜 일정 속에서 큰 형님과 그룹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 현대아산의 상황 역시 썩 좋지가 않았습니다. 원칙과 신뢰가 부재한 공산 독재국가와의 사업협력은 항상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일 수 밖에 없는데 특이나 남북 경협 사업은 경제 외적인 정치적 여건들에 크게 좌우되는 면이 컸습니다. 의욕이 과했던지 선박 운행으로 시작한 금강산 관광사업은 곧 적자가 불어나기 시작하였고, 다른 사업들도 남북 관계의 상황에 따라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영변의 핵시설 모습 (출처 : voakorea.com)


 

 

 

 

대외적으로도 시기가 좋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 때문에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급랭되었습니다. 2002년 북한이 원자로를 재가동하자, 당시 미국의 부시대통령은 대북 군사적 옵션도 테이블에 있다며 적대감을 드러냈던 적이 있었죠. 불확실성이 큰 사업의 특성 상 현대아산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당시 한국 정권이었고, 당시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극비리에 추진 중이어서 돈줄인 현대그룹이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동시에 떠앉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대북 송금이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비자금은 현대의 계열사들을 통해 조성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몽헌 회장은 현대아산의 책임자로서 이 일들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입니다. 이에 정몽헌 회장은 2002년 9월부터 검찰로부터 대북 불법 송금 관련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사가 시작된지 일년여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죠. 정주영 회장의 총애를 받았던 황태자의 죽음은 정재계를 막론하고 큰 충격이었습니다.

 

 

 

 

정몽헌 회장과 현정은 회장의 신혼 시절 사진 (출처 : 서울 경제)

 

 

 

 

 

정몽헌 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다섯째 아들로서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75년에 현대중공업에 사원으로 입사하였습니다. 그후 현대건설에서 근무하다가 현정은 회장을 만나 결혼합니다. 그리고 1979년에 미국 뉴저지의 페얼리디킨슨대학의 경영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부부 동반 유학의 길을 걷습니다. 이 유학 시절 덕분에 영어로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고 하네요. 그리고 정주영 회장의 아들들 중 아버지와 가장 외모가 흡사하지만 성격은 반대라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매우 통이 크고 저돌적인 리더형의 스타일이었다면, 정몽헌 회장은 학창시절 별명이 촌색시나 촌닭으로 불릴만큼 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성적인 부분과는 별도로, 차분하고 합리적인 성격에 세밀한 부분을 지니고 있어서 이것이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는 1981년 현대상선의 사장으로 부임하여 임원의 길로 들어섰고, 특히 1980년대 중반 현대그룹이 전자산업에 진출할 때 큰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현대전자의 임원으로 일하면서 전자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현대전자를 세계 5위권의 반도체 회사로 키워냈던 것입니다. 현재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는 한때 삼성, 엘지, 대우와 더불어 전자4강에 해당하는 종합 전자회였습니다.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지만 현재 정치인이 된 안철수 씨가 광고로 나오는 퍼스널 컴퓨터도 제조했었고, 핸드폰 초기시절 "걸리면 걸리는 걸리버" 라는 광고를 히트시키면서 핸드폰도 많이 팔았었죠. 

 

 

1990년대 중반 현대전자 컴퓨터 광고, 백신 전문가 안철수를 모델로 함 (출처:마일모아)

 

 

 

 

 

그리고 정몽헌 회장은 워낙 성격이 격식이 없어서 권위를 따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항 티케팅이나 호텔 체크인도 수행원 없이 혼자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정주영 회장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은 만큼,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남북경협사업을 꼭 성공시키겠다는 그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 현대아산을 운영했는데, 비록 회사의 자금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북한과 약속된 송금일자는 반드시 지키고 또한 북한 금강산 지역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적인 관광단지로 개발한다는 구상을 토대로 사업에 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과 같이 저돌적인 리더가 추진했던 사업들이... 세심하게 관리하는 스타일의 정몽헌 회장이 컨트롤하기에는 너무 방대했던 것일까요? 정주영 회장이 낙점한 후계자 정몽헌 회장과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독립한 정몽구 회장의 운명은 완전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는 창사 이래 가장 좋은 실적을 기록하고 품질을 극복해나가는 드라마를 연출한 반면에,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은 정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대북 사업이 시작된 1998년 이래 2000년 상반기까지 현대그룹 계열사를 통해 북한에 투입된 자금 규모는 무려 2조5000억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정몽헌 회장이 반드시 이루고 싶었던 대북 사업은 대내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고 머지 않아 현대건설을 포함 현대그룹 전사적으로 유동성 위기가 번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대전자 (하이닉스반도체)와 현대건설의 경영권은 결국 채권단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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