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AI 19. 형제 간 우애도 뚝심있게!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6)
지난 글에서 정주영 회장의 첫째, 셋째 아들 이야기를 어떻게 읽으셨나요? 오늘은 바로 이어서 넷째, 여섯째 아들 두명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과 형제 간의 우애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넷째 아들 / 정몽우 사장
정몽우 사장은 1963년 오산고등학교 졸업에 이어 1967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합니다. 그 이후 현대건설과 고려산업개발에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경험이 쌓이자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배려로 현대건설에서 분사한 현대알루미늄의 사장을 1987년부터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경영에 잘 참여하지는 않았고 대신에 부인의 친오빠인 이진호 사장에게 모든 주요 경영을 일임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그녀의 부인 이행자 씨는 숙명여대 퀸카 출신으로서 정몽우 사장이 5년간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이처럼 끈질긴 목표의식과 섬세함을 가진 그가 정작 중요한 경영활동엔 참여하지 않았다니...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일까요? 뜻밖에 밝혀진 이유로는 그가 이전부터 앓아온 우울증 증세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볼때 아마도 그는 정주영 회장에게 매우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그 시대를 한 번 되돌아봅니다... 오늘날에는 각종 정신적인 질병들을 위한 다양한 치료법과 약물이 존재하지만 1970년- 8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정신병에 대한 인식은 요즘만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우울증이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오히려 정신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학교나 가족으로부터 소외받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윤택한 재벌가 집안에서만큼은 조금 상황이 달랐겠지요. 아들의 점점 심해져가는 우울증 증세에 보다 못한 정주영 회장은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팔을 걷어부칩니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의 유명 병원 방문은 물론 경기도 안양에 직접 정신병원을 설립하여 아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갖은 노력도 큰 효과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우울증의 정도가 심해져 갔다고 하네요.일설에 의하면 그는 고등학교 시절 다른 학교와 벌어진 패싸움에서 머리를 심하게 다친 뒤로 이러한 우울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가 졸업한 오산고등학교를 한 번 볼까요? 오산고등학교의 위치는 현재 한강이 훤히 보이는 서울 용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시절만해도 평안북도 정주가 원래 주소였지요. 그 시절 오산고등학교의 전신 "오산고보"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당대의 유명인들이 청년 시절에 거쳐갔던 명문학교였습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요람이 되기도 했었다고 해요. 한국전쟁 이후 지금의 위치로 옮긴 뒤에는 수영부, 사격부, 축구부 등 각종 운동부의 실력으로 또한 유명했었습니다. 그랬던 역사의 학교이니... 혈기왕성한 이곳 고등학생 청춘들이 어떠했겠습니까? 주변 학교들과 정말 바람잘 날이 없었겠죠?
거기에 정몽우 사장은 일찌기 어린 시절부터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에게 선보이고 인정받기 시작한 다른 형님들이나 동생들에 비해 딱히 자신의 능력이 두드러지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열등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 힘들어했다고 해요.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성인이 되어 한참 경영수업을 받을 때 다른 형제들은 이미 대형기업의 후계자로 인정을 받고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둘째 형님인 정몽구 회장은 현대산업개발과 현대정공을 셋째 형님 정몽근 회장은 현대백화점을 그리고 바로 밑에 동생 정몽헌 회장은 현대상선과 현대전자, 그 다음 동생 정몽준 회장은 현대중공업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결국 그는 우울증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그의 세 자녀들이 아직 어릴 때인 1990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일반인이 보는 재벌가의 부가 그렇게 찬란해보이고 또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나름의 고충도 다양하게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버지를 잃고 남겨진 세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재벌가 집안이니 하루 아침에 경제적인 타격이 있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남편의 빈자리가 그 가족에겐 크게 있었겠지요. 그런데 바로 둘째 형님인 정몽구 회장이 그 빈자리를 잘 채워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어린 조카들을 거두어 잘 보살펴주고 또한 후견인 역할도 도맡았다고 하네요. 집안의 제일 큰형님이 일찌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차남 정몽구 회장이 가문의 장남 역할을 톡톡히 한 셈입니다. 사실 정몽우 사장은 과거 성장 과정에서 둘째 형님인 정몽구 회장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얌전했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정몽구 회장은 운동도 열심히 했고 가는 곳마다 친구들을 이끌고 다니는 의협심 강한 리더 스타일이었다고 하죠. 정몽구 회장의 젊은 시절 체격만 봐도 일반인보다 훨씬 커보이는 것이 괜히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ㅎㅎ 정몽우 사장 역시 자신의 학교가 타학교에 당하는 상황을 보다 못한 나머지 학교간 싸움에 달려갔던 것을 보면... 두 형제들은 타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비슷한 성향을 나눈 사이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이외에도 정몽우 사장과 정몽구 회장 사이에서는 우애 깊은 스토리들이 많이 전해집니다. 말하자면 정몽우 사장에게 정몽구 회장은 뚝심있게 항상 한결 같은 형님이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정몽우 사장의 첫째 아들 정일선 사장이 갓 태어난 당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마침 정몽우 사장에게 사정이 생겨 병원에 있는 아내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때 한걸음에 달려와 수습해준 인물은 다름아닌 둘째 형님 정몽구 회장과 어머니 변정숙 여사였다고 하네요. 정몽구 회장의 이러한 애틋함은 정몽우 사장의 세 아들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정몽구 회장은 동생 정몽우 사장이 세상을 떠나자 남은 세 아들의 학교 졸업과 유학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정몽우 사장의 첫째 아들 정일선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장남 정의선 회장과 동갑인데다 둘다 고려대학교 동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몽구 회장은 본인의 장남 정의선 회장을 승진시킬 때마다 정일선 사장도 잊지않고 동일한 타이밍에 진급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정몽구 회장이 1996년 현대그룹의 회장이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의 사재를 털어서 정몽우 사장의 묘소를 정비했는데요, 이때 아예 묘소 주위의 토지를 구매하고 그 위에 도로를 만들어 유족들이 편리하게 차량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정몽우 사장과 그 가족의 소식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그의 부인 이행자 여사와 막내인 정대선 현대BS&C 사장이 종종 메스컴에 오르내립니다. 이른 나이에 남편 정몽우 사장과 사별한 이행자 여사는 안타까운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기업 경영활동에 나서며 관심을 끌었는데요, 이행자 여사는 원래 전업주부여서 경영활동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지난 2000년에 고려디자인이라는 가구업체를 설립하여 지금껏 순항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숙명여대 퀸카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배경답게 인테리어 디자인과 주방, 사무용 가구를 취급하면서 해외의 유명 가구 브랜드의 한국 사업을 대행하기도 했구요. 특히 선박에 들어가는 가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면서 매출이 크게 늘었다고 하는데요, 한국의 조선 수주 물량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데다가 현대가의 일원인만큼 현대중공업 조선소 선박에 필요한 각종 가구들을 납품하면서 사세를 키웠던 것입니다.
한편 이행자 여사는 제주도에 "본태박물관"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곳은 일본 출신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해서 유명세를 많이 탔습니다. 안도 특유의 모던하고 절제된 시멘트 벽면이 특징인 이곳은 아는 사람들은 제주도 방문할 때마다 꼭 들르는 꽤 유명한 곳이라고 하네요.
한편 이행자 여사의 막내 정대선 사장은 2000년대 초반 뉴스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을 오가며 큰 인기를 얻었던 노현정 아나운서와 2006년 결혼을 해서 큰 화제가 됐었습니다. 정대선 사장이 숙명여대 퀸카 출신 어머니 이행자 여사를 쏙 빼어닮은 외모 덕분에 선남선녀의 만남이라는 기사도 많았죠. 미국 버클리대학교 유학파 출신 정대선 사장은 여세를 몰아 본인의 회사를 HN INC라는 기업으로 확대시키고, 주택 건설 및 IT에 특화하여 적극적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난 2017년에는 범현대가에서 처음으로 가상화폐를 공개하여 비트코인을 발행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과는 다르게 최근 주택시장 불황으로 회사에 심각한 자금난이 불거지면서 결국 올해 초 법원에 법인회생을 신청하고 말았죠. 그러나 한순간에 기업을 잃게될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한 것도 잠시, 그에게 천군만마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정주영 회장의 여섯째 아들이자 정대선 사장의 작은아버지인 정몽준 회장이 정대선 사장에게 긴급자금 100억원을 전달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조카의 위험한 상황을 염려한 나머지 작은 아버지가 사재를 털어 도와준 것이죠. 사실 정대선 사장이 그동안 현대BS&C를 설립하고 사세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작은 아버지 정몽준 회장의 도움이 컸다고 합니다. 정몽준 회장의 기업인 현대중공업그룹에 각종 IT네트워크 사업권을 담당할 수있도록 배려해준 덕분에 가능했다고 하니까요. 사실 정몽준 회장도 정몽우 사장과 6살 차이 동생임에도 서로 우애가 남달랐다고 하죠. 세간에는 범현대가의 이러한 가족간 지원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서로가 어려울 때는 적극적으로 도왔던 이러한 뚝심있는 그들의 정서 덕분에 그동안 현대가의 기업들이 위기를 넘기고 골고루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섯째 아들 / 정몽준 회장
궁지에 몰린 위기의 조카를 적극적으로 도운 미담의 주인공 정몽준 회장! 조카의 회사가 공중분해되기 직전 현금으로 100억원을 쾌척한 상남자 정몽준 회장은 아마도 여러분들에게 매우 익숙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의 활발한 행보 덕분에 여러 형제들 중에서도 대외적으로도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구요. 그의 행동반경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세계적이었으니 현대가에서 해외에 가장 잘 알려진 국제적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신장도 매우 커서 존재감이 확실한데다가 서울대 졸업을 한 이력 덕분에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 살아 생전에 주위에 그렇게 아들 자랑을 많이 했었다고 하죠.
정대선 사장을 위기에서 구해준 고마운 삼촌 정몽준 회장은 정대선 사장과 노현정 아나운서의 2006년 상견례 자리에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습니다. 아버지를 어린 시절에 잃은 정대선 사장을 위해 아버지가 있어야할 빈자리를 잘 채워준 것이죠. 아래 사진을 보면 정대선 사장 뒤로 정몽준 회장이 서 있고 옆으로 정몽구 회장의 부인 이정화 여사, 본인의 어머니 이행자 여사가 앉아있네요.
정몽준 회장은 기업인이면서 정치인 그리고 국내외 스포츠 분야의 거물로 숨가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먼저 정치인으로서의 정몽준 회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약관 37세에 국회의원에 첫 당선된 이후 울산 동구와 서울시 동작을 지역구에서 8선에 성공했습니다. 비록 그가 물려받은 기업 현대중공업의 근거지가 울산이어서 편하게 지역구를 유지해온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겠지만 한국 정치판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던가요? ㅎㅎ 수많은 변수들과 상황들이 난무하는 여의도 정가에서 30년 이상 국회의원 생활을 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보다 국회의원을 많이 경험한 인물은 9선 출신의 김영삼 전대통령, 박준규 전의원, 김종필 전국무총리 등 단 세명 밖에 없는 걸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한때 아버지가 창당한 통일국민당에서 아버지의 대선을 도운적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대권도전에 실패하고 당이 사라진 후에는 한동안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2003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선에 나섰고, 이후엔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서울시장에 도전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현재 재산은 약 2조원대로 추정됩니다. 그는 이렇게 풍부한 자금력 덕분에 정치인 시절에도 굳이 뇌물이나 정치자금을 딱히 받을 필요가 없어서 ㅎㅎ 정치자금법 위반과 매우 무관했던 몇 안되는 정치인에 속했었죠. 이처럼 국내 탑 티어 수준의 갑부인 탓에 국회의원 시절 재산 공개를 할때면 항상 일등이었고, 정치인들의 재산 평균을 올리는데 공을 세운 분입니다. 그래서 그의 정치 생활 동안에는 재벌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붙었습니다. 2008년 한나라당 대표 후보 토론에서 상대방 후보가 "요즘 버스비가 얼마인가?" 묻는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이... 70원이라고 해서 크게 회자가 되었는데요, 사실 다른 정치인들도 요즘 버스비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정몽준 회장이 대답한 금액이 근사치가 아닌 너무나 적은 액수여서 문제가 되었었죠. 이때 실수의 충격이 매우 컸던 나머지 정몽준 회장은 이후에는 일반 서민 물가에 대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이와는 달리 스포츠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상당합니다. 그는 1983년부터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기 시작하여, 국제양궁연맹(FITA) 집행위원, 실업테니스연맹 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93년부터 2009년까지 16년 간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았습니다. 그의 축구협회장 재임시절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되어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에 큰 공로를 세웠었죠. 또한 그는 동아시아축구연맹 회장도 역임했으며 1994년부터 2010년까지 FIFA 부회장에 연속 4번 당선되면서 국내외 축구계에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 2016년에는 FIFA 회장 선거에서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과 맞붙었으나 아쉽게도 실패했었죠. 이 결과를 떠나 글로벌 스포츠계를 향한 그의 끊임없는 도전과 국내 체육계를 향한 애정어린 헌신은 정말 높이 살만합니다. 아버지 정주영 회장과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서 1988 서울 올림픽과 2002 한일 월드컵이 제대로 개최될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한국인들의 뇌리에 가장 깊게 박혔던 순간은 아마도 2003년도의 대선 때일 것입니다.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의 숨은 공로자로서 엄청난 축구 열기를 타고 단숨에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 실패했던 대선 도전의 꿈을 과연 아들이 대신 이뤄줄 수 있을 지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의 후보단일화로 대선 후보직을 중도 사퇴했고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선 하루 전날 당시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돌연 중단 선언하게 됩니다. 이는 두 후보 사이의 입장과 갈등 차이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본인의 바램과는 달리 대선 하루 직전 일어난 이 일은 급격한 여론의 반전을 불러왔고 오히려 노무현 후보를 도와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가 대기업의 경영자라는 매우 바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일인 삼역 또는 사역의 많은 일들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일찌감치 그가 1980년대 초반 31세의 젊은 나이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임명받은 뒤부터 외부활동을 적극적으로 시작 하였고 2002년에 현대중공업에 전문경영인을 들이고서는 소유와 경영분리를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활발한 대외활동에만 크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로부터 인정도 받았고 실력도 좋았던 그가 왜 현대자동차를 물려받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일찌기 정치와 대외활동 등에 큰 꿈을 품었던 본인의 특성 상 자동차 산업은 그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경영 성과의 낙폭이 컸던 자동차 산업보다는 일찍부터 조선과 중공업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알짜 현대중공업이 그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가 현대중공업을 물려받던 1980년대 초반에는 더더욱 현대중공업의 가치가 두드러졌던 시기였죠.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 그를 현대중공업의 사장으로 낙점한 것은 그가 MIT공대 등 미국 유학으로 인해 영어에 유창하였고 국제적 감각에 익숙한 부분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가지 정주영 회장이 그를 신임한 것은 정몽준 회장의 대담한 성격도 크게 작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일찌기 그는 학생 시절 아버지 이름을 대고 외상으로 친구들과 술자리 모임을 했다는 재미난 일화가 있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아버지의 눈 밖에 날 새라 갖은 눈치를 보던 분위기에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죠. ㅎㅎ 또 한가지 일화는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1988년 올림픽 준비를 도우면서 1984년도 미국 엘에이 올림픽 참관 자격으로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의 착륙시간이 다 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든 그를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 줄곧 흔들어 깨웠다는 것이죠. 보통 아들이 아버지를 깨우기 마련이고, 재벌 집안에서는 오히려 더욱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강할 법 한데도 말이죠. 이러한 부자의 모습을 보고 정몽준 회장과 막역한 친구 사이인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이 매우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소에 정몽준 회장의 이러한 대담함을 정주영 회장은 높이 샀고, 그를 해외의 여러 중요한 출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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