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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16. "머스탱, 포니, 갤로퍼" 말들의 대결! 최후의 승자는?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3)

꿈꾸는 차고 2023. 9. 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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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16. "머스탱, 포니, 갤로퍼" 말들의 대결! 최후의 승자는?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3)
 
포드자동차는 1900년대 초반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현대식 대량생산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죠. 그러나 이후 대중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1950년대 들어 브랜드 가치 하락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들은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고, 이에 젊은 미국 소비자들을 타겟으로 대배기량 엔진을 얹은 스포티하고 대담한 모델들을 출시하면서 부활을 꿈꾸게 됩니다. 그래서 1964년 작심하고 내놓은 모델이 바로 머스탱(Mustang)인데요, 당시 젊은이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면서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고 이를 통해 포드는 화려한 재기에 성공합니다. 덕분에 미국 자동차 시장 내에서 GM과 함께 2강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심지어 NASA의 의뢰를 받아 우주 관련 프로젝트도 수행하는 등 자동차 명가의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이때 포드자동차의 위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절정은 1966년에서 1969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르망24시 경주대회에서 그들이 4년 연속으로 막강한 경쟁자 페라리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세계 3대 자동차 경주대회 중 하나인 르망24시 대회는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극한의 게임이기에, 출전하는 자동차 회사들이 전세계에 스피드와 내구성을 자랑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페라리는 1960년부터 1965년까지 6년 연속 우승에 빛나는 절대 강자였으나 미국 자동차의 자존심을 자처한 포드가 페라리의 독주에 맞불을 놓습니다. 포드는 엄청난 자본과 노력을 퍼부은 끝에 당시 미국 자동차 브랜드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의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죠. 그때의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맷 데이먼과 크리스찬 베일 주연으로 2019년 12월에 개봉한 영화 "포드v페라리"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포드 v 페라리 영화 포스터 (출처 : allposters.com)

 

 
이러한 상황이니, 당시 포드의 콧대가 얼마나 높았겠습니까? 1960년대 중후반 유럽의 페라리를 꺾고 세계를 재패한 그들인데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의 현대자동차를 대하는 시각이 평등할 수가 없었겠죠. 이러한 갑을관계 속에 애초에 고급기술을 제공할 의사가 없었던 포드는 처음 협력 약속과는 달리 현대자동차에게 기술 이전을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현대자동차를 단지 동아시아의 안정적인 자동차 조립 하청 기지의 역할로만 제한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앞으로 떠오르는 중국 시장의 가능성을 점치고서요.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회장은 각고의 노력끝에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포드를 끌어들였지만, 이렇게 포드자동차의 간섭은 날로 심해져갔고 결국 그 간섭은 민감한 경영 부분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 앞으로 글로벌 자동차 기업의 하청기지로 남느냐? 아니면 무리를 하더라도 그들처럼 독립적인 브랜드가 되느냐?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회장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실 그 당시 한국의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같이 단순 조립 회사로 남아도 안정적인 매출을 일으키는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조립한 자동차들을 시장에 내어놓으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대자동차는 적어도 그들처럼 경영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1위의 건설회사로 자리매김을 한 현대건설을 운영하는 그들이었기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큰 걱정은 갑을관계란 언제든 갑에서 일방적으로 협력을 끊고 을이 버림을 받게 될 수도 있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이미 버림을 받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던 사례가 당시에 있었습니다. 신진자동차는 1967년부터 토요타의 크라운 등 각종 모델들을 한국에서 조립생산하여 큰 재미를 보았으나 1974년 토요타 측의 일방 계약 파기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포드의 간섭에 넌더리가 난 정주영 회장은 결국 국산차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정세영 회장에게 이를 지시합니다.
 
한편 머스탱은 북미산 작은 야생마를 뜻합니다. 포드는 머스탱 브랜드로 화려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이후 머스탱 모델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대표적 브랜드 중 하나로 성장합니다. 참고로 미국의 자동차 분류 용어 중에 Pony Car는 "성능지향적이고 스타일리쉬한 쿠페 혹은 컨버터블"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모델들이 1967 Chevrolet Camaro, 1967 Ford Mustang GT, 1970 Dodge Hemi Challenger 등이 있습니다. 바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이 다양한 Pony Car가 풍미했던 시기였던 것이죠.

그런데 패기넘치는 현대자동차! 포드와의 협력관계를 힘들게 청산한 애증이 쉽게 사라지지 않은 탓인지, 역시 말을 모델명으로 삼았습니다. 현대자동차가 국산차 이름으로 선택한 포니(Pony)는 바로 조랑말을 뜻하지요. 포드 머스탱의 엠블럼이 달려 나가는 야생마를 형상화했다면 현대 포니의 엠블럼은 점프를 하며 한껏 자태를 뽐내는 조랑말 같아 보입니다. 작지만 인내심이 강하고 성실한 조랑말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귀여운 동물이죠. 현대자동차의 첫 국산차도 소비자들에게 그러한 사랑을 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작명되지 않았을까요?
 
 
 

포드 머스탱 로고 (좌측)와 현대 포니 로고 (우측)

 
 


현대자동차는 갖은 노력 끝에 
회사 설립 7년만인 1974년 토리노 국제 자동차박람회에서 포니를 공개하는데 성공합니다. 이것은 당시 대한민국의 어느 자동차 회사도 성공해보지 못한 대형 프로젝트였고, 이렇게 하여 한국은 세계 8번째로 자동차 고유모델 생산국이 되는 명예를 얻습니다. 그들의 도전이 다른 경쟁업체들이 생각하기에 얼마나 앞서 나갔던 결정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봅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얼마였을까요? 1960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80달러, 일본은 6배에 이르는 471달러, 미국은 일본의 6배가 넘는 2,925달러였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일본과 미국에 많이 뒤쳐져 있는 상황이었지만, 현대자동차는 포니 프로젝트에 회사의 명운이 달려있다고 보고 엄청난 투자를 단행합니다. 그들은 포드와의 결별 이후 일본의 미쯔비시와 기술제휴를 시작했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위해 이탈디자인의 쥬지아로에게 무려 120만 달러를 제공합니다. 아마 지금 가치로 따지면, 약 150억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자체적인 디자인 노하우가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일이었으나,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정세영 회장은 대신 이탈디자인에게 한가지 조건을 걸게 됩니다. 포니 프로젝트 과정 속에서 현대자동차 소속 디자이너 10명과 공동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전시되는 포니 (출처 : hellodd.com)

 
 
 

이후 포니는 국내외 시장에서 엄청난 대박을 치게 됩니다. 1976년 국내 시장에 출시한데 이어, 남미의 에콰도르에도 포니 모델로 첫 국산차를 수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서도 일찌기 미국 유학으로 국제감각을 익혔던 정세영 회장의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일년 중 절반 이상을 해외에 머무르며 국산차의 해외 수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결과 1986년에는 엑셀 모델로 미국 수출 첫 해 20만대를 파는 대기록을 세웠고, 이때부터 세계 자동차 업계는 현대자동차를 주목하게 됩니다. 이 공로로 그는 큰형님 정주영 회장을 대신해서 1987년부터 199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현대그룹 회장과 현대자동차 회장을 동시에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1976년 정세영 회장이 에콰도르 바이어와 포니의 처녀 수출 계약서에 서명하는 장면 (출처 : seoulwire.com)

 


그러나 수많은 형제들과 자녀들을 둔 정주영 회장의 말년에 큰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사후에 현대라는 거대한 기업집단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였습니다. 특히 현대그룹에서 현대건설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 현대자동차를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평생을 헌신하여 현대자동차를 일군 넷째 동생 정세영이냐, 아니면 자신의 장남 정몽구이냐?...  

1998년 12월 현대그룹은 경영 위기에 처한 기아자동차를 전격 인수한 이후 자동차 부문 구조조정을 발표합니다. 이에 따라 이사회 의장에 정세영 명예회장을 임명하고 정몽구 당시 현대그룹 회장을 현대자동차 회장에 임명하여 후계구도를 준비합니다. 이것은 30년이 넘도록 현대자동차의 오너로 활약한 정세영 회장이 큰 위기를 느낄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주주총회에서 자신의 측근들을 이사로 선임하며 방어에 나서게 되나... 곧 벽에 부딪힙니다. 1999년 3월 정세영 회장은 현대자동차 총괄 회장 자리를 양보해야 했던 것입니다. 과연 막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세영 회장의 자서전 내용을 확인해봅니다. 3월 2일 정주영 회장은 정세영 회장을 자신의 집무실로 급히 소환합니다. 그는 정세영 회장이 주주총회에서 자신의 측근들을 이사로 선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화가 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정세영 회장에게 던진 한마디...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

정주영 회장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장남인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자동차 총괄 회장의 자리를 넘겨줄 것을 지시했습니다. 정세영 회장은 올 것이 왔구나 싶었겠지요. 순간 만감이 교차했을테지만, 곧 그는 큰형님에게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평생 정주영 회장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현대자동차를 경영해왔던 그는 그 앞에서 큰형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이 대표해오던 현대자동차를 조카인 정몽구 회장에게 승계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정세영 회장 퇴진 보도 장면 (출처 : KBS 뉴스)

 
 

 
이 때의 사건은 각종 매스컴으로 퍼져나가며 큰 화제와 의혹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매스컴에 "형님이 설립한 현대자동차를 장자인 정몽구 회장이 이어받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고 발언하며 세간의 의혹과 구설수가 될 만한 상황들을 순식간에 잠재웁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그 이후의 과정들에 이견없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퇴진 보도 4일만인 3월 5일, 정세영 회장 부자는 보유 중이었던 현대자동차 지분 8.33%를 정몽구 회장에게 넘기고, 대신 정몽구 회장로부터 대신 현대산업개발 지분 37.67%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정세영 회장 부자는 현대그룹의 또다른 건설기업인 현대산업개발을 배분받아 현대그룹에서 완전히 분리가 됩니다. 
 
 
 

정몽구 회장과 정세영 회장 (출처 : 일요신문)



32년동안 전세계를 다니며 현대자동차를 키워온 그에게 번민이 없을 수 없었겠지만 그는 큰형님의 의지에 따르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현대자동차가 자칫 경영권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도 있었던 상황을 일단락시킵니다. 정주영 회장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남인 정몽구에게 현대자동차 회장을 승계시키더라도 정세영 회장의 장남 정몽규에게 현대자동차 부회장 지위를 주어 현대자동차에 남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세영 회장은 후세에 또다시 문제점이 불거질 수도 있다며 한사코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퇴진 기자회견 당시를 보여줍니다. 아버지 정세영 회장의 뒤를 이어 이미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3년여간 재직했던 장남 정몽규 회장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해 보입니다. 
 
 
 

정세영 회장과 아들 정몽규 회장이 1999년 3월 5일 현대자동차에서 퇴진 관련 기자 회견을 하는 모습 (출처 : opinionnews.co.kr)

 
 

정세영 회장이 남긴 회고록의 내용을 다시 한번 찾아봅니다. 거기에는  "큰형님이 떠나라는 거북한 말을 하기 전에 미리 떠났어야 했고, 그러지 못한 게 죄송스러웠다. 큰형님의 속뜻을 진작 헤아리지 못한 내가 송구스러웠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정세영 회장의 큰 그릇과 품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본인이 마음 먹기에 따라 끝까지 저항하여 경영권 방어에 나설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게 되면 애써 이룬 현대자동차의 국내 및 글로벌 위상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를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 그는 평소에 "비록 산 정상에는 서지 못해도 바른 길을 택해 산에 오른다면 그 자체는 올바른 산행"이라고 말하면서 "정도경영"(正道經營)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아왔다고 하니까요. 비록 자신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본인을 세계적인 레벨의 경영자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준 큰형님의 은혜에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배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때문인지 이임식때 순간 복받치는 감정으로 잠시 눈물을 흘리기는 했어도, 승계의 전 과정동안 그는 떳떳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후 정세영 회장은 현대산업개발의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역시 성실한 경영으로 현대산업개발을 국내 순위권의 건설업체로 발돋움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아이파크라는 아파트 브랜드로 유명한 현대산업개발은 정세영 회장과 장남 정몽규 회장의 지휘 아래 건설 뿐만아니라 유통업, 면세업 등 다양한 산업에 진출하면서 사세를 키워나갑니다. 

그런데 만약 정세영 회장이 다른 형제들과 같이 현대자동차 초기 시절부터 일찌감치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독립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왜 32년 동안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오로지 현대자동차의 발전에만 인생을 바쳤을까요? 다른 형제들은 기회가 있을때 독립하여 개별적인 기업을 이루었지만 정세영 회장은 왜 그동안 별 다른 시도를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당연히 현대자동차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자신에게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 속단했던 것일까요? 그 사실이야 본인만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자칫 큰 소동으로 번질 수 있었던 상황이 정세영 회장의 극적인 양보 아래 일단락 됐던 것은 현대자동차로서 실로 큰 행운이었습니다.
 


 

1999년 이임식 당시 눈물을 보이는 정세영 회장 (출처 : 유튜브 강적들)

 
 

자... 그러면 이번엔 정주영 회장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봅니다. 정주영 회장이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자동차의 리더를 맡긴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정주영 회장은 정몽구 회장이 단지 자신의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현대자동차의 회장을 맡기려 한 것일까요? 물론 그 부분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저는 정주영 회장 특유의 "감"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아무리 장자라 하더라도 경영 능력이 부족한 인물에게 현대자동차라는 거대한 기업을 맡기려 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 1990년대 후반 현대자동차는 안팎으로 큰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이미 설명하였지만, 현대자동차는 1986년 성공적으로 미국 진출을 하였으나 단기간에 너무 자동차가 잘 팔린 것이 화근이 되서, 조잡한 품질과 부족한 애프터서비스가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이것이 회사의 신뢰도를 급격히 추락시키게 됩니다. 모름지기 자동차 분야의 품질과 애프터 서비스 개선은 그 범위와 수준이 워낙 방대해서 이를 위해 수많은 투자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품질 개선 능력이 빠른 판매의 성공에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기저기서 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자 현대자동차라는 브랜드 이미지는 좋지 않게 고착화되어 갔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러한 상황을 개혁해 줄 제대로된, 그리고 검증된 리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1989년에 현대 엑셀을 사면 계약금에서 바로 $1000불을 보태준다는 광고 (출처 : picclick.com)


 

세간에는 정주영 회장이 의욕적으로 개성공단 사업을 추진하였을 당시, 정세영 회장에게 개성공단에 연간 20만대의 소형차 공장 조성을 지시했는데 그가 바로 이행하지 않고 머뭇거렸던 점, 그리고 기아자동차 인수과정에서 정세영 회장측과 정몽구 회장측이 별도로 인수위원회를 꾸려 준비할 때, 정세영 회장측이 인수 비용으로 0원을 제시하여 정주영 회장의 심기를 건드린 점이... 정세영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눈 밖에 난 요인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부분이겠지만, 정주영 회장이 정몽구 회장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아버지에게 수년 간 보여준 신뢰감있는 경영 능력 덕분이었다고 보는게 더 옳을 것 같습니다. 현대그룹을 대표하는 기업 현대자동차가 영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정주영 회장 말년의 큰 소망이었다면, 그는 누구보다 가장 유능한 인물이 리더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을 듯 싶습니다.
 
정몽구 회장에 대해서는 정주영 회장의 아들들에 대하여 다음 글에서 다룰때 자세히 설명할 예정입니다. 그는 1938년 생으로 이미 1970년부터 현대자동차에서 부품 관련 업무를 다루는 과장으로 일을 시작하여 오랫동안 현장 관련된 업무를 상당히 많이 맡아왔습니다. 이후 그는 현대건설과 각종 계열사을 오가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사장직을 수행합니다. 그의 특징은 회장의 아들치고는 정말 현장의 밑바닥부터 다양한 일을 배운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몽구 회장은 현재 현대모비스의 전신인 현대정공 회장 시절에 컨테이너 사업을 성공시키고, 한편으로 4륜구동 SUV 갤로퍼를 개발하여 흥행시키면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갤로퍼의 뒷모습 (출처 : 오토스파이넷)

 
 
 
여기서 갤로퍼(Galloper) 역시 질주하는 말 혹은 회전목마를 뜻합니다. 동사는 Gallop으로서 말을 전속력으로 달린다는 뜻입니다. 정몽구 회장은 작은아버지 정세영처럼 역시 말을 소재로 하여 자신의 첫작품을 완성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는 1988년 미쯔비시의 파제로를 기본 모델로 하여 갤로퍼 개발을 시작하였고, 드디어 1991년 9월 시장에 내놓는데 성공합니다. 앞날을 내다본 것인지 아니면 정주영 회장의 원래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주영 회장은 정세영 회장에게 현대자동차를 전적으로 맡겨 경영을 시키면서도 울산 자동차 공장의 일부 자동차 라인을 현대정공에게 떼어주어 정몽구 회장이 SUV를 생산하도록 허락합니다. 정세영 회장과 정몽구 회장 사이에 은근히 경쟁의 구도를 살려 놓은 것이지요. 당시 현대자동차의 모델 중에는 아직 이렇다할 SUV가 없었던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의 현대정공에게 SUV를 생산하여 자동차 사업을 경험할 수 있도록 큰 기회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갤로퍼는 출시 첫해에 1만6천여대가 팔리고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쌍용자동차의 코란도 독주에 맞불을 놓으며 선전한 명모델이었습니다. 요즘에도 아직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갤로퍼가 다시 출시 되길 기대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 
 

 

1990년대 갤로퍼 광고 (출처 : 한국경제)

 

 
사실 정세영 회장은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현대자동차 회장을 역임하며 눈부신 현대자동차의 기초를 다지고 외형적으로도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만, 정세영 회장도 1990년대에 전면적인 품질 개선과 브랜드 이미지 회복까지는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당시 국내에서는 부동의 1위였으나, 글로벌 시장 기준으로 볼때는 세계 판매 순위 10위권으로서 저렴한 브랜드의 대명사로 통했습니다. 정세영 회장의 장남인 정몽규 회장이 1996년부터 1999년 3월까지 정세영 회장으로부터 현대자동차 회장을 승계하여 경영하였으나 당시 그가 경험이 부족한 30대 초반이어서 그리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습니다.  
 
아무튼 정세영 회장에서 정몽구 회장으로 경영권 승계가 큰 잡음 없이 이루어짐으로서 현대자동차는 다음 단계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현대자동차는 새로운 오너인 정몽구 회장의 지휘 하에 품질경영을 지상명령으로 채택하고 품질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회사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전면적인 회사의 개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몽구 회장 산하의 현대자동차 브랜드는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품질을 개선하기 시작하자, 현대자동차의 위상 역시 날이 갈수록 상승하게 됩니다.
 
갤로퍼를 타고 질주한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 이제 그들은 포드의 갑질을 받던 그 옛날의 설움을 잊은지 오래입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봅니다. 2023년 2분기 기준하여 포드의 전세계 자동차 생산댓수는 217만 여대로 세계 8위에 랭크됩니다. 그러나 을이었던 현대자동차의 위치는 지금 어떠할까요? 현대기아의 전세계 생산대수는 약 397만여대로 당당히 3위를 차지합니다. 정말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네요. 포니를 타고 포드의 품에서 도망친 현대자동차... 이제 갤로퍼는 언청난 속도로 머스탱을 따라잡은 셈입니다.
 
 
 
 

정몽구 회장의 품질경영 (출처 : 현대자동차그룹)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정세영 회장 일가가 현대자동차를 계속 경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동차 제조업이야말로 고객의 안전이 최우선시 되어야 하는 산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들이 지속적으로 현대자동차를 경영했다면, 2000년대를 넘어와서도 문제없이 제대로 경영할 수 있었을까요?
 
현대산업개발은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후 HDC그룹으로 사명을 바꾸고 많은 성장을 이루었지요. 그러나 최근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행동에 좀 의문이 가기도 합니다. 현대산업개발은 최근 아파트 부실 시공으로 인하여 큰 홍역을 치루었던 것을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전남 광주의 한 아파트 공사장에서 갑자기 아파트 상단이 일시에 무너지면서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 가치에 먹칠을 했습니다. 물론 어느 회사나 큰 실수를 할 수는 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회사들도 뜻밖의 사고는 항상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부실 시공으로 인한 문제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또 더 큰 문제는 이에 대한 늑장 대응이었습니다. 현대산업개발은 대기업 답지 않은 대응으로 인해 빈축을 샀습니다. 회사 경영진이 대국민 사과를 진행하면서 처음엔 전면적인 재시공을 천명했다가 여론이 좀 잦아들자 슬며시 이를 부분 재시공으로 미루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또 있습니다. 현대산업개발은 지난 2019년 아시아나항공을 금호그룹으로부터 인수하는 우선협상자가 되는데 성공하였으나, 뒷심 부족으로 최종 결정 때 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목도하면서, 현대산업개발 측의 위기 대응 능력에 의문이 드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드네요. 저는 이러한 뉴스를 보면서 새삼 고 정주영 회장의 안목과 판단이 옳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사고 현장 (출처 : 시사저널)


 
강력한 오너경영을 중심으로 발전을 이뤄온 현대자동차그룹. 이번 글에서는 정세영 회장에서 정몽구 회장으로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이 옮겨가게된 상황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이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또 다른 과제가 눈 앞에 놓이게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자녀들인 8형제들을 다루면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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