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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15. 포니정의 포니 쿠페가 시장에 나온다면?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2)

꿈꾸는 차고 2023. 9. 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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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15. 포니정의 포니 쿠페가 시장에 나온다면?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2)
 
지난 5월, 이탈리아에 소재한 이탈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것은 현대자동차의 역사상 첫번째 컨셉카였던 1974년형 포니 쿠페를 49년만에 복원하는 기념식이었습니다. 우선 포니는 현대자동차의 첫 자체 모델이었죠. 당시에 현대자동차는 포니를 개발하면서 형제 모델로 포니 쿠페 프로젝트 역시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니가 시장에 나올 때 함께 생산하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불발이 되는데요... 이것은 계획한 당시와는 달리 생산을 앞두고 시장의 전체적인 상황들이 예상보다 어렵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인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는 그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국내 시장보다는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하였는데, 과연 경쟁력이 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파격적인 디자인의 포니 쿠페를 양산하기란 당시로서는 현대자동차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포니 쿠페는 양산차로 빛을 보지 못하고 컨셉으로만 남겨지는 비운의 모델이 됩니다.
 
 
 

복원된 포니 쿠페 앞에서 정의선 회장과 주지아로 (출처 : hyundai.co.kr)

 
 
비록 대량 생산되지는 못했지만, 저는 그 당시 현대자동차의 패기가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지 7년 밖에 되지 않은 회사가 이러한 수준의 컨셉카를 이끌어낼 수 있다니 말이죠. 물론 기본 디자인은 이탈디자인이 맡았고, 차량의 프레임과 기본 부품들은 미쯔비시에서 온 것이긴 하지만요. 당시에 이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이충구 님 (이후 현대자동차 사장)에 따르면, 주지아로가 처음에 제시한 3가지 아이디어 중 하나를 정세영 회장실에서 선택한 시기가 1973년 10월, 설계를 시작한 것이 1974년 2월, 그리고 설계 시작 후 8개월 만인 1974년 10월에 완성하여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차가 1년도 안되어 개발되다니... 정말 엄청난 열정 아닙니까? 당시 현대자동차는 쿠페는 커녕 세단도 스스로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이 정도의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정말 열정과 패기 이외에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아래 포니 쿠페의 익스테리어와 인테리어 디자인을 한번 보세요. 시대적인 유행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정말 아이코닉한, 근사한 디자인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에라도 양산되어 판매한다면? 제 생각에는 사겠다는 사람들이 줄 설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ㅎㅎ
 
 
 

 

포니 쿠페 익스테리어 모습 (출처 : hyundai.co.kr)

 
 
안에를 한번 들여다 봅시다... 정말 멋지지 않나요? 등받이와 쿠션이 연결된 스포티한 느낌의 운전석에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심플한 임팩트를 주는 도어 디자인이 잘 어울려 보이네요. 그리고 드라이버 오리엔트 스타일의 대시보드와 센터페시아와의 연결 여기에 전체 공간과 대비되는 색상 차이의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속도계와 각종 계기판들을 세로형으로 일렬 배치시킨 센스도 대단하네요. 잘만 다듬는다면 오늘날에도 충분히 통할만한 요소들이 이곳저곳에 많이 보인다고 생각됩니다. 당시로선 정말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디자인이었으니, 막상 이것을 시장에 내어놓았을 때 경기침체와 각종 사회적인 이슈 등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을 국내와 해외의 소비자들이... 이것을 소화를 해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라 잘 이해가 됩니다. 
 
 
  

포니 쿠페 이테리어 디자인 모습 ( 출처 : 조선비즈)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에 만들어졌던 컨셉카 모델이 그만 자연재해로 인하여 유실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설이 사진과 이야기 속으로만 남아 오늘날에 이르렀던 것이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기업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그 컨셉 모델을 복원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장소도 49년전 포니 쿠페가 디자인되고 개발되던 곳을 선택했고, 복원의 책임자도 49년 전 디자인 담당이었던 주지아로를 그의 아들과 함께 선임했습니다. 주지아로는 자동차 역사에서 레전드에 포함되는 자동차 디자이너인데요, 그의 회사 이탈디자인은 당시 설립된지 얼마 안 된 신생업체였지만 포니 쿠페를 디자인한 이후로 이름이 많이 알려졌고 그 이후 수많은 자동차 회사들의 디자인을 담당하면서 점차 레전드 반열에 올랐습니다. 본인도 초기에 자기 손으로 디자인했던 모델의 회사가 어엿한 세계 3위의 업체가 되어, 다시 찾아오게 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래의 2분짜리 짧은 영상을 보시면 그 과정이 잘 이해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8YZ5L7iq8Q&t=134s 


 


원래 모습대로 완벽하게 복원된 모델 앞에서 감격에 찬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다음과 같은 기념사를 남겼습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님, 고 정세영 HDC그룹 명예회장님,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입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언급하면서 그 사이에 작은아버지를 포함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작은아버지 포니정이 현대자동차 재직 시절 이룬 성과와 노력을 잠시나마 상기시키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이해됩니다. 올해로 현대자동차의 오너가 정몽구 회장 가족으로 변경된지도 벌써 23년차가 되어 가는데요, 그 과정에서 이미 고인이 된 포니정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잊혀져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포니 쿠페가 복원되면서 49년 전 현대자동차의 발전을 위해 전세계를 다니며 애쓰던 정세영 회장의 업적이 재조명되었으니, 자동차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주영 회장, 정세영 회장, 정몽구 회장 (출처 : m.oheadline.com)


 

일각에서는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회장이 오늘날 현대자동차를 글로벌 3위 기업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세영 회장이 현대자동차 설립부터 2000년도 초반까지 약 32년 동안 현대자동차의 기본을 철저하게 다져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가 볼 때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저도 이전의 글들에서 여러차례 언급했다시피, 포니정 정세영 회장은 1960년대 자동차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큰 형님 정주영 회장의 지원 아래, 포니 독자 모델 개발, 한국형 독자 엔진 개발, 그리고 해외 및 미국 진출 등의 사업들은 그가 주도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뜻깊은 이유는 모두 국내에서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고, 포니정의 현대자동차가 선제적으로 시작하고 개척해냈기 때문입니다. 
 
 
 

1981년 미국 디트로이트 박람회에서 해외 관계자들과 환담하는 정세영 회장 (출처 : v.daum.net)

 

 
이렇듯 정세영 회장은 정주영 회장과 함께 현대자동차를 이끌면서 다른 형제들에 못지않은, 어쩌면 그들보다 탁월한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정세영 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형제들이 이른 시기에 큰 형님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포니정 정세영 회장은 32년 동안 한결같이  큰 형님의 곁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전 글에서 정주영 회장의 5형제에 대해서 한명씩 다루었는데 그들이 정주영 회장이라는 워낙 불세출의 거목에 가려서 그렇지 개개인의 능력으로 볼 때 동생들 역시도 대단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다섯째 동생 정신영 기자는 이른 나이에 독일에서 요절하였지만, 첫째 정인영 회장, 둘째 정순영 회장, 여섯째 정상영 회장은 일찌감치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우리나라에서 중공업, 시멘트 산업, 소재 산업 등을 리드하는 기업들로 성장시켰습니다.
 
셋째 동생인 장녀 정희영을 이전 글에서 제가 빠뜨렸네요.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수리공장 시절 동업자 출신이었던 김영주에게 정희영을 소개하여 결혼을 시켰습니다.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을 소개할 정도면 정주영 회장이 김영주라는 인물을 상당히 신임하고 아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기계 분야에 능력이 탁월했던 김영주는 현대가와 인연을 맺은 뒤부터 현대건설 부사장과 현대엔진공업 사장 등을 두루 거치며 경력을 쌓습니다. 그리고 역시 자동차 부품 전문회사인 한국프랜지공업을 설립하여 현대그룹으로부터 일찌감치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포니정의 대학생 시절 (출처 : ponychung.org)

 

그렇다면 포니정 정세영 회장이 32년 동안 큰 형님의 곁을 지킨 것은 본인의 의지였을까요? 아니면 큰 형님이 원했던 것일까요? 그 답을 유추해보기 위해 정세영 회장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봅니다.
 
사실 정세영 회장은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한국의 정치인이 되는 것을 꿈꿨습니다. 자신의 형님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가와 사회에 도움되길 바랬던 것이죠. 잠시 고민의 시기를 거칠 무렵 그는 큰 형님 정주영 회장의 권유로 유학을 떠나 1954년 미국 콜럼비아대학교에 입학하고, 마이애미대학교 정치학 석사를 받는 등 국제적인 감각을 성장시킬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유학파가 아주 귀했던 시절, 그는 귀국 후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로 채용되었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정세영 회장은 한걸음에 달려가 큰 형님에게 이를 알렸다는데요... 그러나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돌아온 한마디...
 
“교수 하면 배고파! 나랑 같이 일이나 해!”

역시 카리스마가 짱인 큰 형님은 말도 길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에 동생에 대한 격려, 애정 그리고 인생의 조언 등의 모든 의미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근엄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하는 말투처럼요. 이 말을 들은 정세영 회장은 고민을 하고 어쩔 것도 없이 바로 교수의 길을 포기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큰 형님 정주영 회장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게 되는데, 정세영 회장은 그런 큰 형님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여 정세영 회장은 유학을 다녀온 이후 1950년대부터 현대건설에서 일하게 됩니다. 원래 성품이 성실하고 근면했던 그는 최선을 다해 큰 형님과 다른 형님들을 도왔고,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1965년 현대건설의 태국 초대 지점장으로 부임합니다. 그곳에서 둘째 형님인 정인영 회장을 도와서 대한민국 최초 해외공사인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구간 고속도로 건설을 성공적으로 완공시킵니다. 사실 현대건설로서는 첫 해외 공사라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세영 회장에게 책임을 맡겼다는 것은 그의 국제적인 감각을 정주영 회장이 인정했다는 것이겠지요. 현대건설은 해외공사에서 필요한 새로운 공법과 방식에 익숙치 않아 실수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를 그때그때 극복하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습니다. 비록 전체적인 비용면에서는 손해를 봤지만, 국내 시장을 벗어나 새로운 해외 환경을 경험했다는 것 자체가 현대건설로서는 큰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사 중에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현지인들과 폭도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금고를 지켜내야 일도 있었다고 하니,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면서 현대건설과 정세영 회장은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느꼈을 법합니다. 
 
 
 

태국 파타니 나리티왓 고속도로 공사 (출처 : 월간 중앙)

 


성실했던 정세영 회장은 정치가나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제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처럼 형님들을 도와 현대건설을 국제적인 기업으로 발전시키는데 이바지 합니다. 이렇게 현대건설이 태국과 베트남 등에서 해외공사를 시작하면서 점차 외국에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탄탄한 기업으로 궤도에 오르게 되자, 큰 형님 정주영 회장의 마음 속에는 이제 완성 자동차 산업 진출의 열정이 끓어오릅니다. 사실 건설업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정주영 회장의 초기 사업은 자동차 정비였을 정도로 그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시기를 저울질 하던 정주영 회장은 1967년 드디어 현대자동차를 설립하였고 정세영 회장에게 총괄 사장을 맡깁니다.
 
정주영 회장은 여러 동생들 중 왜 정세영 회장에게 현대자동차의 사장이라는 중책을 맡겼을까요? 아마도 정세영 회장의 뚝심있는 추진력과 매끄러운 일처리 능력을 높게 산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세영 회장이 현대건설 재직 당시 시멘트 공장 기계 구매 건으로 미국 출장 중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본사에서 급한 오더가 와서 정세영 회장 앞으로 떨어집니다. 미국의 포드자동차가 한국에 진출한다는 첩보를 얻게된 본사는 정세영 회장에게 당장 포드자동차와 접촉하여 물밑작업을 시작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여기서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정세영 회장의 국제 감각이 빛을 발합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한국 시장에서도 후발주자였고 애초에 포드자동차의 계획에는 현대자동차가 포함되지도 않았지만, 정세영 회장은 즉시 물밑 작업에 착수하고 현대자동차와 포드자동차와의 협력을 기어이 성사시킵니다.  
 
 
 

1955년 경 미국 디트로이트 시의 포드 본사 전경 ( 출처 : thehenryford.org)



둘째로는 아마도 정세영 회장의 인품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불도저와도 같은 저돌적인 스타일의 정주영 회장을 상대하는 파트너가 만약 똑같은 불도저 스타일이라면 손발이 맞기가 쉽지 않겠지요.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다섯살 터울 첫째 동생 정인영 회장은 할말은 하는 스타일인데다가 둘째 동생 정순영 회장도 나이 차이가 많지 않으니... 그 둘은 시간이 흐를 수록 큰 형님 정주영 회장으로서도 대하기가 어려운 상대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막내 정상영 회장은 정주영 회장에게는 20살 이상 차이나는 아들 뻘의 나이였기 때문에 같이 고민을 나누며 일하기에는 너무 어렸구요. 큰 형님과 13살 차이인 정세영 회장이 원래 학구적이고 세심한 스타일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일단 잘 맞았을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시도때도 없이 순식간에 떨어지는 정주영 회장의 명령에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딴지를 걸기보다는, 일단은 그것이 좀더 나은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큰 형님 정주영 회장이 높이 산 듯 싶습니다. 설립 초기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현대자동차는 정주영 회장이 큰 그림을 그리면, 이것을 정세영회장이 실질적인 목표로 만들어 기어이 달성시키는 구조였습니다. 진취적인 리더가 이끌고 꼼꼼한 부리더가 살림을 챙기는 조합... 바로 초기 32년간 현대자동차의 발전은 이 환상적인 콤비의 결과물인 것이죠.
 
한편 자동차 기술력 면에서는 내세울 것이 없었던 후발주자였으나 정세영 회장의 노력으로 포드자동차의 마음을 사는데 성공한 현대자동차는 곧이어 벌어진 또 하나의 사건 때문에 포드 관계자들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부르겠지요. 정세영 회장의 노력으로 현대자동차가 포드자동차와의 관계에 물꼬를 트게되자 포드 측에서는 현대자동차를 실사하러 한국에 오게 됩니다. 이를 위해 현대와 포드 관계자들이 함께 포드 자동차를 타고  현장에 가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차가 멈춰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포드 관계자들이 아무리 확인해봐도 고장의 원인을 몰라 당황해하는 사이, 자동차 정비공 출신 정주영 회장이 단박에 이를 수리해냈다고 하지요. 이것을 눈여겨본 포드 측은 현대자동차에게 더욱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에 당시 1960년대 한국의 건설업 1위를 달리던 현대건설의 풍부한 자금력도 포드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포드자동차는 현대자동차를 협력의 대상으로 낙점하고, 그리고 협력 1년만인 1968년 코티나를 합작 생산하는데 성공합니다. 1년만에 차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공장의 완성이 1년도 안걸렸다는 이야기지요. 비슷하면서도 다른 스타일의 환상적인 콤비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회장은 적어도 일의 스피드 면에서는 서로 엄청 닮았던 것 같습니다. 현대건설이 국내외 시장에서 큰 경쟁력을 얻은 부분이 다른 업체들보다 저가 수주하여 일단 계약을 따내고,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공사기간에 공사를 완성하여 각종 비용들을 절감해서 저가수주로 인한 손해를 보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일단 무엇이든 일사천리 빠른 스피드로 일을 추진하고 완성해내는데 일가견이 있던 두 형제는 현대건설에서 사용하던 이  방식을 현대자동차에도 비슷하게 대입하여 점차 국내의 자동차 경쟁사들을 압도해 나가게 됩니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1960년대 후반 뉴코티나 (출처 : 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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