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강국의 대표 브랜드 WADITO

HYUNDAI 14. 천하무적 여섯 형제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1)

꿈꾸는 차고 2023. 8. 28. 20:45
728x90
반응형

HYUNDAI 14. 천하무적 여섯 형제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1)

 

코흘리개 초등학교 1학년 시절, 같은 반에 저를 무척 괴롭히던 한 녀석이 있었습니다... 이걸 듣고 분개한 저의 큰 형님은 참을 수가 없었지요. 큰 형님은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교문에서 그 녀석을 기다리다가 단 한마디로 물리쳐준 기억이 있습니다. ㅎㅎ 너 우리 동생 건드리면 죽는다! 그 후로 저는 그녀석의 괴롭힘에서 바로 해방되었지요. 

 

여러분은 형제라는 단어를 대할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물론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더라도 아주 친밀하게 지낼 수는 있겠지만, 강력한 유대감에 있어서 우애 깊은 진짜 형제들과는 비교하기가 어렵겠지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고생하고 같이 자라왔으니 손발도 척척 맞고, 서로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대체불가의 시너지효과를 내기에도 용이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형제들이 한두명도 아니고 여럿이라면? 그리고 그 여러 형제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한다면? 그들 앞에서는 진정 세상 무서울 것이 없을 듯 싶습니다... 또한 그렇게 마음 맞는 형제들을 곁에 둘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큰 복 중 하나라 해도 되겠지요. 그래서 저도 주변에 형제들이 많은 분들을 보면 참 부럽게 느껴집니다. 

 

 

 

형제의 의미 (출처 : wordrow.kr)

 

 

 

그러면 여러분은 만약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던 형제들이 있다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근대 역사 속에서 "형제는 용감했다! "라는 문구에 가장 적합했던 형제들을 한번 찾아봅니다.  

 

우선 저는 우당 이회영의 6형제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은 구한말 최고의 명문가 자제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하자 그동안 누려왔던 영화를 기꺼이 포기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넷째 이회영의 주도 하에 그의 형제들과 일가는 즉시 전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납니다. 그들이 팔았던 재산은 오늘날의 가치로 단순환산하면 600억원에 이르고, 기타 소유했던 토지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천문학적인 금액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당 이회영 6형제 (출처 : gggongik.or.kr)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그렇게 처분한 전재산을 모두 항일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으며, 6형제 모두 만주에서 인재 양성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것입니다. 석영, 회영, 호영 3형제는 독립운동 중에 순국하였고, 이중 다섯째 이시영은 상해임시정부의 임정요인으로 활약하다가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의 진정한 본보기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입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한가운데 동그란 안경의 김구 선생님을 위시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의 가족들이 1945년 광복 직후 우리나라로 돌아오기 앞서서 상해에서 기념 촬영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중절모를 쓰고 눈물을 닦는 분이 바로 다섯째 동생 이시영입니다. 그의 눈물 속에는 우선 광복의 기쁨도 컸겠지만, 이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형제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등... 수많은 기억들이 담겨 있었겠지요...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돌아오기 앞서 상해에서 촬영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 사진 (출처 : 울산매일신문)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최고의 형제가 바로 우당 이회영의 6형제였다면, 산업화 시절, 한국 경제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형제들이 있다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정말 수 많은 형제들이 유명한 업적을 남겼겠지만, 저는 범현대가 정주영 회장의 6형제를 먼저 꼽고자 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은 형제들이 함께 할 때도 대단했지만, 개인적으로도 그 역량이 매우 뛰어났고, 부모로부터 지원 받은 것이 전혀 없이 철저히 무일푼에서 그들의 실력만으로 큰 역사를 이루었다는 점이 크게 다가옵니다. 물론 그들의 경제활동 자체가 처음엔 어려운 형편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했었겠지만, 점차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들은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갔고 또한 여기에 "기업가정신"을  담아 경영합니다. 그리고 그 기업가정신을 중심으로 이전에 한국에서는 아무도 도전해보지 못한 부분들에서 선구적이고도 혁신적인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대한민국이 초기 산업화를 이루어가는데 불을 지폈고, 한편으로 후배 기업들이 자신감을 갖고 미지의 영역에 뛰어들 수 있는 롤모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편 제가 이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은 그 모태가 현대자동차이고, 2000년도 초반 현대그룹에서 완전히 분리가 된 이후 별도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앞편의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수직계열화"와 "규모의 경제"라는 마법이 있었구요. 그런데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그룹에서 분리가 된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한데요, 그 내막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정주영 회장의 가족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첫 순서가 될 것 같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도 초반까지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과 자녀들 사이에서 숨가쁘게 벌어졌던 각종 상황들이,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의 독자적인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번에는 두 차례에 걸쳐 먼저 정주영 회장의 다섯 형제에 대해 다루고, 그리고 셋째 글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여덟 아들을 다룸으로서, 전후의 사정과 그 결과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려 합니다.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의 로고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회장은 타고난 성실성과 도전정신으로 그 능력이 매우 출중했지만, 아무래도 회사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여러 방향으로 사업 분야가 확대되기 시작하자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의 장성한 5형제들이 적재적소에 투입되어 함께 회사를 경영하고 그 규모를 더욱 키울 수 있었으니, 현대가 오늘날의 초대형 글로벌 기업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그 형제들의 공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정주영 회장의 형제는 본인 포함 6남1녀입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은 현재는 북한 지역인 강원도 통천군입니다. 통천군은 푸른 동해바다에 인접해 있으며 바로 인근에 아름다운 경치로 매우 유명한 금강산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도 오지에 속했던 곳이지요. 그는 어렸을 때부터 대를 이어 농사를 짓기가 너무나 싫었고 좀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도전하고 싶어했던 마음이 늘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10대 후반이 되자, 부모와 가족 몰래 수차례 가출하여 전국을 떠돌며 일을 하러 다녔죠.

 

그런데 그의 아버지도 집념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수소문하여 어떻게든 정주영 회장을 다시 찾아서 고향으로 데려갔다고 하지요. 장남이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동생들을 잘 보살펴 주길 그토록 원했던 아버지는 결국 그 장면을 보지 못하고 1946년에 사망합니다. 그래서 당시 서울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던 정주영 회장은 이제 집안에서 가장의 역할도 떠맡아야 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소학교의 학력에 무일푼으로 시작한 사업이었기에 주변에서 학연과 같은 인맥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았을테고, 어떻게든 동생들을 잘 가르치고 공부시켜서 함께 집안을 일으켜야겠다고 마음먹었겠지요. 

 

 

 

1940년대 정주영 회장의 현대자동차공업사 시절 직원들과 함께 금강산 야유회 사진 (출처 : 이데일리)

 


 
그래서 그런지 정주영 회장을 제외한 다섯 남자 형제는 당시 기준으로 모두 학벌이 상당합니다. 대부분 대학교 공부를 마쳤고 유학파들도 여럿됩니다. 소학교는 커녕 무학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던 그 시절에 정주영 회장은 정말 이를 악물고 동생들을 지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큰 형님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다섯 남동생들도 큰 형님처럼 다들 한몫하는 인물들로 성장합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 동반자처럼 정주영 회장의 동생들은 큰 형님을 도우며 현대그룹을 일구어나갔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 (출처 : 조선비즈)


 

 


이중에 현대자동차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형제는 포니정이라고도 불리우는 넷째 동생 정세영 회장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지난 HYUNDAI 08. 해보기나 했어? 도전의 아이콘! -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 (1) 에서 간략하게 나마 다루었었지요. 그는 지난 2000년도까지 약 32년간 현대자동차를 맡아 이끌면서 기업의 기본틀을 만들고 완성한 인물입니다. 1960년대 자동차 불모지였던 한국, 어쩌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큰 꿈을 가지고 자동차 사업을 일으켰던 분이지요. 그는 현대자동차 재직 당시 큰 형님 정주영 회장의 지원 아래 포니 독자 모델 개발, 독자 엔진 개발, 해외 및 미국 진출 등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일구어냈었습니다. 정세영 회장에 대해서는 다룰 이야기가 많아 다음 편 글에서 좀더 자세히 작성하기로 하고, 이에 앞서 다른 4명의 형제들에 대해 한명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넷째 정세영 회장 (출처 : ponychung.org)

 



정주영 회장의 첫번째 동생은 정인영 회장입니다. 그는 일본 유학파로서 영어를 전공하여 유창한 영어실력을 자랑하였고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상당한 엘리트였습니다. 첫째 동생이어서 정주영 회장과 5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 만큼, 정주영 회장이 사업상 어려움에 처했을때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1950년 1월에 현대건설을 설립하였으나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마침 정인영 회장은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미군사령부 공병대의 통역 담당으로 근무할 수 있었고, 그는 이러한 배경을 활용하여 정주영 회장이 피난지인 부산에서 건설 관련 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미군 측에 다리를 놓아줍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때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미군들의 막사를 건설하며 큰 돈을 벌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곧 재기하게 됩니다. 통역 담당이라는 정인영 회장의 위치는 서울 수복 이후에도 빛을 발하는데, 그는 미군이 발주한 각종 공사를 현대건설이 따내도록 물밑에서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현대건설은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전쟁이 끝난후 전국에서 복구 공사가 활발하게 벌어질 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회사의 규모를 크게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1950년대 초반 미군과의 모임에서 정인영 회장 (왼쪽 첫째), 정주영 회장 (왼쪽 둘째) (출처 : jmagazine.joins.com)

 

 


이후 그는 정주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상운을 거쳐 현대건설의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1960년대 초반 현대건설이 한국 건설업계 1위가 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는 정주영 회장을 도와 현대건설이 태국과 베트남의 토목공사에 진출할 수 있도록 이끌었고, 이로서 현대건설이 국제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중동에 진출하려는 정주영 회장과 갈등을 빚게 되는데... 그의 지론은 중동 진출은 태국이나 베트남과는 차원이 다르게 어려우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학파 출신에 영어에 능한 국제통이었던 그에게 중동 진출은 아직 현대건설에게 시기상조요, 너무나 위험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정신으로 살아온 정주영 회장은 동생의 조언이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죠. 중동 진출이 실패할 경우를 우려한 정인영 회장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주영 회장은 중동 진출을 뚝심있게 밀고 나갔고, 결국 이것은 두 형제가 사업 상 갈라서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정인영 회장은 1962년부터 현대양행이라는 기업을 직접 설립하여 건설 중장비 및 발전 설비를 제조하였는데, 결국 그는 이 기업을 중심으로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에서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경영 수완으로 1970년대 후반에는 현대양행에 각종 중공업 기업들을 포함한 한라그룹으로 발전시키면서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 중공업 역사의 개척자가 됩니다. 한라그룹은 한국의 산업화와 함께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면서, 1990년대 중반에는 대한민국 자산총액 기준 12위를 달성하는 등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IMF으로 인해 회사가 부도를 맞는 큰 타격을 입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정인영 회장은 뇌졸중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되는 고초도 겪습니다. 그러나 초인적인 의지로 재활에 성공하였고, 곧 업무에 복귀하는 기적적인 모습으로 찬사를 받습니다. 한라그룹은 IMF 때문에 한라건설을 제외한 다른 계열사들을 모두 잃었으나 정인영 회장은 그룹을 재건하기 위해 휠체어에 탄 채로 일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로 돌며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IMF의 타격을 덜 입은 다른 현대가의 친척 기업들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에 조금씩 한라그룹을 살려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 동생 정인영 회장 (출처 : 포브스)


 


한라그룹이라고 하면 제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것이 계열사인 만도기계가 에어컨을 광고하던 것입니다. 에어컨을 잘 만드는 회사여서 그런지 몰라도 한라그룹은 한국의 아이스하키 발전에도 큰 공을 세웠지요. 정인영 회장의 차남 정몽원 회장은 아버지에 이어 한라그룹을 이끌면서 기업을 재계 40여위까지 재건하였고, 그룹내 아이스하키 팀을 창단하고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동계스포츠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팀 (출처 : 이데일리)

 



둘째 동생은 정순영 회장입니다. 그 역시 1970년대 현대건설 부사장과 현대시멘트의 사장을 역임하며 큰형님에게 힘을 보탰습니다. 이후 현대시멘트가 현대건설에서 분리되면서 그는 독립하였고 곧이어 자동차 부품과 레저산업을 주축으로 하는 성우그룹을 설립했습니다. 성우그룹은 생산한 시멘트를 현대건설에, 자동차 부품은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면서 사세를 크게 키웠지요. 그러나 현대시멘트는 재무구조 악화로 2017년 한일시멘트에 합병되었고 현재에는 정순영 회장의 4남 정몽용 회장이 이끄는 현대성우그룹이 회사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동생 정순영 회장 (출처 : 서울신문)

 


 
포니정 정세영과 여동생 정희영 다음의 다섯째 동생은 정신영입니다. 정신영은 정주영의 형제들 중 가장 머리가 좋고 촉망받는 인재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6년부터 국회를 출입하는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습니다. 둘째 형님 정인영 회장이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던 것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은 많은 동생들 중에 특히 정신영을 끔찍히 아끼고 사랑했다고 하는데요, 그는 좀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배우라는 의미에서 동생을 독일로 유학 보냈습니다. 성실했던 정신영은 학업 중에도 특파원 역할을 겸업했는데 1960년대 초반 냉전 시대 당시 독일 베를린의 상황을 국내에 생생하게 전달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당시에 베를린은 일촉측발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베를린이 외딴 섬처럼 동독의 영토 안에 위치하고 있는 탓에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공산당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격분한 동독 측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베를린 시를 가로지르는 두터운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동독을 조종하던 소련은 서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는 서방 군대가 철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었지요. 서방 군대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구요. 소련은 당시에 미국의 코앞인 쿠바에도 핵미사일 기지를 추진하여 미국과 대결을 펼치려던 상황이었습니다. 냉전의 긴장감이 극한까지 치달았던 시대였던 것이죠. 정신영 기자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동독 부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세차례나 동베를린에 잠입하여 그곳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낱낱이 기록하면서 취재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취재 내용을 한국에 알렸지요. 정신영 기자는 큰 형님 정주영 회장을 닮아 정말 용감무쌍하기가 이를 데 없네요. 

 

 

 

1961년 베를린 위기 당시 미국과 소련의 탱크가 마주보고 있는 장면 (출처 : ko.wikipedia.org)

 

 

 

그러나 그는 매우 안타깝게도 함부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 취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31세를 일기로 병사하고 맙니다. 병명은 장폐색증이었습니다. 이로인해 충격을 받은 정주영 회장은 현대그룹의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몇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면서 큰 슬픔에 빠졌다고 하죠. 그리고 정신영의 미망인과 남은 가족들을 위해 정주영 회장은 그들이 현대학원을 운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또한 기자였던 정신영을 지속적으로 추모하기 위하여 언론관련 기금을 조성하는 등 언론계에 동생의 흔적을 남겨주려고 무던히 애썼다고 합니다.   

 

 

 

다섯째 동생 정신영 기자 (출처 : 미디어오늘)


 


마지막으로 여섯째 동생은 정상영 회장입니다. 정상영 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막내 동생으로서 무려 21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형제 중 정주영 회장과 외모와 분위기가 제일 많이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7남매의 막내인 탓에 큰 형님 정주영 회장의 장남인 정몽구 회장과 겨우 2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옛날엔 그런 일이 흔했지요. 저희 큰외삼촌의 큰 아들도 저희 막내 외삼촌과 나이가 비슷하답니다. ㅎㅎ 어렸을 적 집안 행사 때 두분이 만나면 호칭과 존대가 서로 어색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

 

 

 

 

여섯째 동생 정상영 회장 (출처 : 동아일보)

 



그는 정주영 회장을 돕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58년에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를 스스로 설립하여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무려 60여년간 회장으로서 회사를 이끌어왔습니다. 그의 기업은 1990년대 중후반 사명을 현대적으로 변경하여 화학, 건자재, 실리콘, 첨단 소재, 반도체 재료 등에 특화된 KCC그룹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탁월한 경영 실력으로 특히 그동안 해외 수입에만 의존하던 여러 특수 원료들을 국산화하고 자체 개발하여 수입을 대체함으로서 한국의 공업 발전에 큰 기여를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의 초기 시절 (출처 : kccworld.net)

 

 

 

그는 막내였지만, 매우 당차고 똑부러지는 성격을 지녔다고 합니다. 이것을 잘 아는 정주영 회장은 1970년대 초반 현대자동차가 미수금 때문에 위기에 처하자 이미 독립한 정상영 회장에게 SOS를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현대자동차의 부사장으로 임명하여 채권 회수팀을 진두지휘하게 한 것이죠. 이후 정상영 회장은 정인영 회장을 도와서 약 3년간 연체된 채권이며 미수금들을 해결하고, 다시 자신의 회사로 되돌아 갔다고 하네요. 저도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당시 미수금 팀에 잠시 소속이 되어 업무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정말 힘들었습니다... 돈을 받지 못한 업체마다 전화를 하거나 찾아가서 돈을 받아와야 하는데... 무시에 괄시에... 이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정상영 회장은 직원이 연체금을 받지 못하면 함께 찾아가 결국에는 받아냈는데 그 배짱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이던 정세영 회장이 아주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물론이구요. 형제들과의 협력이 빛을 발한 순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한국의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부분이 있습니다. KCC그룹은 2001년 현대전자의 걸리버스 프로농구단을 인수한 뒤로 전라북도 전주시를 연고로 한 KCC이지스를 창단하였습니다. 정상영 회장은 농구명문 서울 용산고등학교 출신입니다. 그는 강원도 통천에서 출생하였으나 형들과 워낙 나이 차이가 나는 탓에 형들이 서울로 진출한 뒤에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죠. 그는 용산고등학교 시절부터 농구에 흥미를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농구는 "쉬는 사람 하나 없이 다섯 명이 모두 열심히 뛰기에 마음에 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농구를 사랑했던 정상영 회장은 농구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용산고등학교에도 농구부가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체육관을 건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용산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인연으로 지난 2005년 농구천재 허재를 KCC농구단의 감독으로 영입한 적이 있습니다. 허재는 이를 보답하듯 무려 10년간 감독을 맡으며 2008-2009년, 2010-2011년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을 해냅니다.

 

정상영 회장은 경제 침체로 인해 대기업들이 농구에 투자를 줄이던 시절, 한국 프로농구의 메인스폰서로서도 다섯 차례 이상 참여하였으며, 경기도 용인에 있는 KCC체육관을 국가대표들이 훈련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등 그동안 유별난 농구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정상영 회장은 자신의 팀이 활약하는 경기들을 거의 대부분 챙겨보았고, 농구단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 시즌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년 출정식을 열어주는 등 큰 애정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력적으로 기업 경영과 스포츠 지원 사업을 하던 그는 지난 2021년 84세를 일기로 형제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로서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 6남1녀의 1세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KCC그룹은 정상영 회장 사후 사회에 2천억원을 환원 기부함으로서 사회적 기업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04년 프로농구 우승당시 헹가레를 받는 정상영 회장 (출처 : 연합뉴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