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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12. 두 영웅의 불꽃 튀는 만남! -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 (5)

꿈꾸는 차고 2023. 7. 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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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DAI 12. 두 영웅의 불꽃 튀는 만남! -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 (5)
 
세기의 대결은 언제나 보는 이들의 땀을 쥐게 하는 매력이 있죠, 여러분들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 빅매치가 있으신가요? 지금으로부터 6년전이던 2017년...! 저는 메이웨더와 맥그리거가 사각의 링에서 한판 "거하게"~~ 붙었을 때가 또렷이 기억납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날선 무기 없이 오직 체력과 지략만으로 상대방을 꺾는다는 것은 복싱과 종합격투기계의 챔피언이었던 그들에게도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들의 대결은 10회전까지 이어졌다고 하죠.

 

이미 경력면에서 최고치를 찍은 그들은 이벤트처럼 경기에 임할 수도 있었겠지만, 역시 각자의 종목을 대표하는 프로이자 영웅이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꽤 진지하게 싸우더군요. 그들은 상대방의 헛점을 노리면서 쉴새없이 파고들었고, 한마디로 육체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적나라하게 보여줄 만큼 진득한 결전을 벌였습니다.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타이틀 이외에도 이 영웅들은 걸쭉한 입담과 쇼맨십으로도 대체불가의 챔피언들이었기에 이들의 대결을 전세계 무려 9천만명이 동시에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메이웨더 vs. 맥그리거가 붙은 세기의 대결 (출처 : esquire.com)

 

 


당시 맥그리거는 전문 복서가 아닌 종합격투기 선수였고, 경력도 백전노장 메이웨더에는 살짝 못미쳤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메이웨더에게 매치를 갖자고 요청했다는데요, 레전드인 메이웨더와 경기를 가지면, 지던 이기던 본인의 유명세에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였겠죠. 역시 돈냄새 잘 맡는 맥그리거 답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던 메이웨더가 결국 그에 화답하면서 이 세기의 대결이 성사가 된 것이죠.

 

평소에 메이웨더와 맥그리거는 잦은 구설수와 특유의 허세때문에 팬들로부터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일이 많았지만, 사실 운동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엄청난 노력파요, 근성의 소유자들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초인적인 노력에 또한 각종 쇼맨십으로 인기를 끌 수 있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 그들은 복싱과 종합격투기 사상 최고의 파이터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세기의 대결을 앞두고서 두사람 사이에 잡아먹을 듯한 설전이 벌어졌으나... 경기 이후엔 정반대로 완전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중에게 큰 웃음을 안겼습니다. 이거 뭐 "입금전/입금후"도 아니고 말이죠. ㅎㅎ 경기 후에 마치 우애깊은 형님 아우마냥 덕담을 주고받는 듯한 장면이 포착되었다는데... 아마도 시청률 때문에 "입금 전"엔  험악한 분위기 연출이 필요했겠지만 "입금 후"에는 그럴 필요가 있나요? 따끈한 대전료 생각에 미소가 절로 나왔겠지요.ㅎㅎㅎ 이들이 벌어들인 돈을 합하면 자그마치 4억달러, 우리돈으로 약 4천5백여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흥행의 보증수표이자 인플루언서들이었기에 그들은 대전료 및 기타 광고료들을 포함하여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입금 전"의 한대 때릴 듯한 엄한 분위기 (출처 : ca.sports.yahoo.com)

 

"입금 후"의 형님 동생 미소가 만발하는 분위기 (출처 : usatoday.com)

 




약간 결이 다르긴하지만 또 다른 엄청난 영웅들이 현대자동차와 미쯔비시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현대자동차의 이현순 박사와 미쯔비시의 구보토미오 전회장입니다. 제가 볼 땐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숨은 영웅"들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옛말에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표현이 있죠, 그들은 각자 회사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엄중한 시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회사가 다음의 성공적인 단계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진정한 리더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대결은 메이웨더와 맥그리거보다 화려하진 못했을지라도, 그들이 각자의 회사와 직원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습니다. 뒤에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이현순 박사를 중심으로 개발에 성공한 독자엔진 덕분에 현대자동차는 수조원에 달하는 로열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원천기술을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글로벌한 기업으로 변신하여 회사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미쯔비시의 구보토미오 회장은 미쯔비시를 사업부 수준의 규모에서 기술로 무장한 종합 자동차 회사로 확대시키고 모터스포츠에 특화한 글로벌 브랜드로 격상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와 협력관계를 시작함으로서, 기술과 핵심부품을 공급하고 막대한 로열티를 받아 회사의 발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각자의 회사가 벌어들인 금액은 메이웨더와 맥그리거가 받은 대전료에 비교할 수 없이 거대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분들이 벌인 세기의 대결을 중심으로 그들의 영웅적인 면모들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이제까지 총 5회에 걸친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 정리를 마무리해보고자 합니다.  

 

 

 

쿠보토미오 전 미쯔비시 자동차 회장 (출처 : amazon.com)

 


먼저 미쯔비시의 영웅 구보토미오 전 회장입니다. 앞편의 제 글에서는 그가 정주영 회장에게 여러차례 독자엔진 포기를 회유했던 사실을 알려드려서, 자칫 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척 비인간적인 모습으로만 보여진 것 같은데...아마도 그는 애사심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라도 앞으로 예측되는 위기로부터 회사를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는지 이해하려면 그가 걸어온 길과 행적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일본 자동차 업계의 유명인사이자 원로로서 그 공을 인정받아 일찌감치 일본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입니다. 아래와 같이 명예의 전당 웹사이트에 그의 경력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구보토미오 회장의 경력 (출처 : jahfa.jp)

 

 

 

나름 저도 한자에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안쓰다보니 잘 않읽히네요.ㅎㅎ 그냥 간단히 번역기를 돌려 해석을 해봅니다. 그가 미쯔비시에 입사한 것은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1931년 23세 때의 일입니다. 그는 미쯔비시 중공업의 항공 엔진관련 엔지니어로 첫 경력을 시작합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53세 때인 1961년 항공기제작소장으로 발탁됩니다. 그는 곧 자동차사업본부장으로 승진하여 미쯔비시중공업 내부의 자동차사업부를 이끌다가, 이 사업부가 1970년대 초반 미쯔비시 자동차로 분리된 이후, 65세가 되던 1973년 드디어 사장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그는 약 10여년동안 미쯔비시자동차의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다가 1983년 75세 때 물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상담역"이라는 직함을 달고 1990년 별세하기 전까지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렀습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이미 알아채셨을 것 같은데요, 그가 미쯔비시에 재임한 기간이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햇수로 세어보니 무려 58년이 넘습니다. 우와...58년!!!!

 

그렇다면 미쯔비시가 자동차 사업부 시절이었을때부터, 해외에 큰 명성을 날리며 미쯔비시 자동차로서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 실질적으로 제일 중요한 리더의 역할을 그가 혼자 다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58년간 한 회사를 다닌다...실로 대단한 경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이 회사를 설립하지 않은 이상, 이렇게 오랜시간을 재임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인 것이죠. 그를 미쯔비시의 수호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미쯔비시란 그저 단순히 애사심을 넘어서 자나깨나 고민하고 걱정하는 가족과 같은 존재요, 한편으로 회사와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회사의 안정적인 미래를 비는 어떤 신앙심으로까지 발전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구보토미오 만큼 미쯔비시 자동차에 대해 깨알 같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회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회사는 그를 계속 붙잡아 둔 것이겠죠. 

 

앞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그가 1931년 미쯔비시 중공업에 입사하여 처음 한 일은 2차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대 제로센 전투기의 엔진 개발입니다. 전쟁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제로센 전투기에 대해 많이 들어보셨을 듯 합니다. 제로센 전투기들은 뛰어난 회전반경과 공중전 능력으로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진주만 기습 등에서 상당한 전공을 세우던 항공기였죠. 이전에 하와이의 진주만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400여대의 제로센 전투기들이 항공모함에서 출격하여 하와이 상공을 가로질러 미군기지를 기습한 자료들을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이미 1940년대에 엔진 제조 기술력이 서구 열강들과 나란히 하던 미쯔비시였기에, 전후에는 그 기술력과 노하우를 다른 기계산업으로 이식하여 미쯔비시 중공업이 다양한 산업분야에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나갑니다.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 (출처 : 조선일보)

 
 


그가 미쯔비시에서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전후에 완전히 파괴된 산업기반을 빠른 시간안에 복구하고 미쯔비시 자동차가 제대로된 자동차 기업으로 도약하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1983년 회장의 자리에서 은퇴를 했어도 그는 사실상 미쯔비시 자동차의 실세로서 회사의 운영을 좌지우지하였고, 1970년대 현대자동차와의 협력에 있어서 최종 인가를 내준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인물이었으니, 회사의 발전이 미래에도 흔들림 없이 오래도록 유지되길 바랬을 것이고, 혹시라도 이것이 어긋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가운데 회사내 부조리한 상황들을 조심스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회사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라면 몸을 던져서라도 막고자 했을 것이고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현대자동차를 회유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가 애초에 한국을 싫어하거나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서 그런것이라면, 그는 아예 1970년대에 미쯔비시와 현대자동차 사이의 기술이전 및 협력을 허락하지도 않았었겠죠. 사실 현대자동차가 포드와 협력 관계가 무너진 후 현대자동차의 손을 잡아준 것은 미쯔비시입니다. 현대자동차는 포드와 결별 후에 서둘러 여러 업체들을 컨택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가까스로 미쯔비시와 협력이 되어 천만다행이었죠. 포드가 기술을 전혀 이전하지 않고  현대자동차를 단순 조립 생산 기지로 유지하길 원했다면, 미쯔비시는 좀 달랐습니다. 비록 구식이긴 하지만 현대자동차가 기술을 조금씩 이전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사실 미쯔비시가 공식적인 개별 자동차 회사가 된것은 현대자동차보다 약간 늦습니다. 미쯔비시 중공업 내의 사업부에서 1970년도부터 개별 자동차 회사로 변경되면서 아마도 많은 자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에 구식 기술을 팔고 로열티를 받을만한 안정적인 돈줄이 필요했겠죠. 현대자동차 역시도 첫 독자모델의 개발에 사활을 걸던 시기였기에 두 회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다른 자동차 회사와 달리 미쯔비시가 초기에 현대자동차에게 여러 기술들을 전수해 준 이유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구보토미오 전 회장의 뿌리에서 찾기도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현대자동차와의 초기 협력 시절에 구보토미오 전 회장은 본인이 백제의 후예라고 밝힌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장 차 현대자동차의 울산공장을 실사하면서 굳이 충청남도 부여를 방문하여 백제의 여러 유적들을 둘러봤다고 하지요.

 

 

 

충청남도 부여의 백제 유적인 정림사지 탑과 사찰 (출처 : 부여군)

 

 

간혹 일본인들 중에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구보토미오의 출생지가 일본 나카사키 현인데 그 위치가 쓰시마 섬의 바로 밑으로서 한국과 매우 가깝고, 한국 문화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곳이라 그의 선조가 한국계라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보입니다. 이유야 어쨌건 그의 결정에 따라 현대자동차가 미쯔비시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게 되었으니, 미쯔비시는 현대자동차에게 있어서 은인이 되었던 셈입니다. 

 


 

나카사키현의 위치 (출처 : 구글맵)


 


한편 그는 끈질김의 화신이기도 합니다. 현대자동차와 은인인 미쯔비시의 기술협력이 10년여가 지나자 어느새 두 회사의 사이는 철저한 갑을관계로 변해갑니다. 얼마나 갑질이 심했냐면 현대자동차의 인물이 미쯔비시측이 인정하는 자기 편이 아니면 미쯔비시는 계약서에 싸인을 해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쯔비시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인물들이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는 승진과 자리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고 하고요. 이러한 분위기에서 미쯔비시를 이끌고 있는 구보토미오 회장은 현대자동차가 자체 엔진을 개발한다는 소식이 달가울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꼬박꼬박 미쯔비시의 계좌로 들어오는 로열티의 운명이 현대자동차의 자체 엔진개발과 함께 중단될 수도 있다는 큰 위기감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구보토미오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정주영 회장을 찾아와 회유를 하기 시작합니다. 첫번째 찾아왔을때는 그동안 현대자동차에 공급하던 구형 엔진들을 앞으로는 신형으로 변경해서 공급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반응이 없자 두번째 찾아와 자체 엔진 개발 금지와 이현순 박사의 해고를 강력히 요구하며 그 대가로 로열티를 절반으로 줄여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었지만, 이번에도 정주영 회장에게 정중히 거절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1989년 그는 세번째 정주영 회장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자신이 현대자동차 측에 군침이 돌만한 온갖 당근을 제시해도 절대 정주영 회장의 승낙을 받을 수 없었던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고시켜달라고 그렇게 요청을 했어도 정주영 회장이 끝내 거절하고 보호했던 이현순 박사가 너무 궁금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 여기서 현대자동차의 기술독립을 이끈 영웅 이현순박사가 등장합니다. 실제로 구보토미오는 이현순 박사를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고 만난 자리에서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하는데요, 자동차업계의 원로 레전드 엔지니어와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 직전의 이현순 박사의 만남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매우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어디 방송사에서 한번 이런 모티브로 제대로 드라마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네요. 두 영웅의 불꽃튀는 만남!! 이렇게요 ㅎㅎ
 
 

한참 엔진 독자개발 당시의 이현순 박사 (출처 : 엔카)

 


 
두 영웅의 세기의 대결과도 같은 드라마가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구보토미오 전 회장은 이현순 박사에게 엔진 개발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 합니다. 영웅과 영웅 사이에 수 읽기와 기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현순 박사는 실력만 좋은 것이 아니라 순발력과 재치도 매우 뛰어났던가 봅니다. 아마도 원로 레전드 엔지니어의 명성과 끈질김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서 미리부터 준비했겠지요. 그래서 이현순 박사는 그당시 개발 중인 자체 엔진의 비밀 탄로를 우려해서 일부러 구형 테스트 엔진만을 보여주었다고 하네요. 그리고는 엔진의 열변형이 실험 과정중에 제일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원래 엔진이라는 것은 현대 기계공학의 매우 정밀한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수많은 부품들이 한치의 오차없이 돌아가야 하기에 그 부품들은 미크론 단위로 가공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이나 진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매우 조그만 뒤틀림에도 엔진의 수명단축 및 마모, 소음이 발생하기 쉽다고 하지요. 이때문에 엔진은 만들기 이전부터 정밀한 설계가 중요하고, 가혹한 환경에서도 오랜기간 견딜 수 있어야 하기에 소재의 선택도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충분한 데이터가 발생할때까지 테스트를 반복해야만 부품 사이의 최고 조합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하네요.

 


 

자동차 엔진의 원리 (출처 : parksidemotors.ca)

 


그런데 구보토미오 전 회장은 이현순 박사가 보여준 엔진의 모습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본 구형 엔진 하나에는 세밀한 온도 측정을 위해 무려 240개의 온도장치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놀란 이유는 이 수많은 온도장치에서 열변형 방지와 최적온도를 찾기 위한 현대자동차 연구원들의 열정을 엿본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에 쿠보토미오 회장은 일본 귀국 후에 즉시 미쯔비시의 연구소 연구원들을 한곳에 불러모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미쯔비시가 앞으로 대충 연구에 임한다면 10년 후에는 현대자동차의 기술을 배워야 할 수도 있다고요. 그는 미쯔비시의 연구원들에게 앞으로 정신차리고 최선과 열정을 다해 연구에 임하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예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기하게도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2003년부터는 역으로 미쯔비시가 현대자동차와 기술도입 계약을 맺었고 2005년부터는 현대자동차에게 로열티를 지급했다고 하네요.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반대로 달라지게 된 셈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구보토미오 전 회장이 무슨 점쟁이처럼 예지력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쯔비시가 최고의 시절을 보내던 1980년대 후반, 회사의 수장으로서 무언가 회사에서 직원들의 정신력이 나태해지고 있다는 것을 예리한 촉으로 감지하진 않았을까요? 

 

 

 

제자가 선생님이 된 순간 (출처 : 울산신문)



현대자동차의 영웅 이현순 박사는 첫 독자 엔진 개발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30여 종류가 넘는 독자엔진 설계 및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은 미국에서도 이미 인정을 받았는데, 이현순 박사가 정주영 회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한국행을 결심한뒤에도 그가 원래 일했던 GM에서는 그를 놓치기 싫었던 탓인지 사표를 받지 않고 휴직 처리만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돌아오라는 보증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현순 박사는 얼마 안 가서 정중하게 다시 사표를 요청합니다. 그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자동차 관련 한국 최초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그와 초기 5명으로 시작했던 인원들은 단 6개월만에 연구소 건물을 짓고 연구에 임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엔진 개발은 이현순 박사 이외에는 처음이라, 연구와 공부 그리고 세미나를 반복하면서 경험과 데이터를 쌓아나갔다고 하네요.

 

이후 인원이 100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연구소 직원 전원이 주말없이 오전 7시반에 출근해서 밤10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계속 했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들의 정신력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엔진 연구소 전원은 국산엔진을 만들어 일본을 이기자라는 기술독립의 열망에 미쳐있었다고 합니다. 어렵게 벌어온 돈을 거의 착취 수준으로 다른 회사에게 상납하는 현실에 절망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자동차가 벌어오는 돈의 절반이 고스란히 미쯔비시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상황을 이제는 바꿔보자는 의지가 온 엔진 연구소에 충만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독자엔진 개발을 이끌었던 이현순 박사의 최근 모습 (출처 : 이데일리)


 
그러나 당시 현대자동차 회사 내의 분위기는 엔진 연구소와는 사뭇 달랐던 모양입니다.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미쯔비시의 위세가 얼마나 강했던지 미쯔비시와 연이 닿은 현대의 직원들이 현대자동차 안에서도 고속 승진을 통해 요직에 두루 퍼져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정주영 회장이 기술독립을 주장할때 회사의 형편을 들어 포기해야된다며 미쯔비시의 주장을 대변했었다고 하네요. 그들의 눈에 묵묵히 독자엔진을 개발하고 있던 이현순 박사가 얼마나 미워보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정주영 회장이 현대전자의 경영을 위해 현대자동차에 몇개월간 세밀한 신경을 쓰지 못하던 사이 이현순 박사를 미워하던 다른 임원들은 결국 일을 꾸밉니다. 이현순 박사가 독일로 출장가 있었던 상황에서 해고 통지를 해버렸다고 하네요.  

하지만 끈질긴 영웅 이현순 박사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국하여 사무실로 돌아오자 책상과 집기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복도에 앉아 혼자 연구를 수행하면서 버텼다고 합니다. 그것도 무려 6개월이나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연구소장 정도의 직급과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러한 수모를 버티지 못하고 뒤도 안돌아보고 이직을 선택할텐데요, 이러한 상황을 온몸으로 이겨낸 이현순 박사의 뚝심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복도에서 혼자 6개월 동안 공부하라면 할 수 있겠어요? (출처 : 아주경제)

 

 

친 미쯔비시파 임원들의 모략을 뒤늦게 알게 된 정주영 회장의 불벼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엔진연구소는 다시 원상복구가 됩니다. 이에 심기일전하여 연구소장으로 돌아온 이현순 박사는 다시 온 열정을 다 바쳐서 연구에 매진합니다. 그리고 연구를 시작한지 8년만인 1991년 첫 독자엔진인 알파엔진 개발에 성공하여 연구소 연구원들과 함께 기술독립의 원대한 꿈을 결국엔 이루게 된 것이죠. 구보토미오 미쯔비시 회장과 친 미쯔비시파 현대자동차 임원들이 아무리 목을 날리려고 애써도 끝내 살아돌아온 불사조 이현순 박사! 맥그리거는 10회전 마지막에 메이웨더의 한방에 결국 쓰려졌지만, 이현순 박사는 주위의 온갖 핍박과 무시를 수차례 얻어맞아도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맷집은 이현순 박사가 맥그리거보다 나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ㅎㅎ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첫 독자엔진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부터 두 달간 입이 돌아가서 매우 고생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이룬 이 업적으로 그는 제1회 IR52장영실상을 수상하게 되었구요, 한국 내 각종 매스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며 지나간 고통의 시간을 보상해주게 됩니다. 이것은 현대자동차로서도 경사였지만, 독자엔진 개발 성공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고 봅니다. 당시 한국이 가진 기술과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분야를 수차례 도전 끝에 끝내 정복함으로서, 수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게 되었으니까요. 이것은 우리 산업 전반에 금전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대단한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현순 박사 스스로도 사람이 한 목적 한 분야에 미쳐서 혼신을 다해 노력하면... 정말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셈입니다. 어려운 일들을 쉽게 포기해온 제 자신이 좀 부끄러워지는 부분입니다. 
 

 

 

최근 현대자동차 연구원들 (출처 : bizchosun.com)

 

 

 

이현순 박사는 대단한 실력은 물론 좋은 인성을 겸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최근에 한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기계분야 최고 권위자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엔진 개발과 상용화에 따른 공적을 인정받아 진작에 그는 현대자동차 CEO의 자리를 제안받기도 하였으나, 자신은 연구가 천직이라면서 높은 직위를 고사하고 한동안 연구에만 매진했다고 하네요. 정말 감동입니다.

 

이후 2009년 현대자동차 연구개발 총괄본부 사장과 부회장 자리를 승낙하고 역임하면서는 엔진개발 뿐만아니라 미래 먹거리를 위한 연구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남양연구소를 친환경, 하이브리드, 수소 자동차 기술의 중심지로 구축하고 훌륭한 인재을 양성하는데 힘썼습니다. 현대자동차를 떠난 이후에는 원래 직장이었던 GM으로부터 부회장 자리까지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모두 거절하고 2014년 두산인프라코어로 자리를 옮겨 최고기술경영자로 새인생을 살게 됩니다. 2015년 그가 집필한 "내 안에 잠든 엔진을 깨워라!"라는 회고록이 있는데요, 포기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온 자신에 대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어서 지금도 인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책의 판매로 얻어지는 인세는 모두 대학 장학금으로 기탁하신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요.

 

 

 

이현순 박사의 저서 (출처 : yes24.com)


 

 

제 생각에 현대자동차가 이현순 박사를 최고의 타이밍에 얻게 된 것은 정말 대단한 운인 것 같습니다. 앞편의 글들에서 설명했다시피 이 즈음 미국에 진출한 현대자동차는 품질 문제로 큰 곤욕을 치루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 품질문제와 매출 부진의 어수선한 상황을 타개해준것이 바로 이 엔진 독자개발 성공입니다. 약 20년동안 미쯔비시와 협력하면서 갑을관계로인한 극심한 패배감과 지긋지긋한 로열티 납부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게 된 것이죠. 현대자동차는 이 독자엔진 개발 성공으로 자그마치 4조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대자동차는 독자엔진 개발 이전에 미쯔비시에게 엔진과 변속기 로열티 명목으로 엔진과 변속기 값의 10%를 로열티로 납부했고, 첫 독자엔진인 알파엔진을 얹고 달린 전세계 자동차 수가 약 1800만대에 달한다고 하니 이를 계산하면 약 4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하네요.

 

IMF 당시 국내 자동차 회사들 중에 오직 현대자동차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다들 잘 아시지요? 미래의 국가 부도 상황을 정주영 회장이 예상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1983년 포니의 성공으로 온 회사가 잔칫집 분위기 일때 미래를 대비하여 이현순 박사를 발탁하고 엔진 독자개발을 추진케 한 정주영 회장의 혜안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없습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는 1990년대 품질과 매출 모든 면에서 부진에 빠져 기업의 운명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실 현대자동차는 그 기간 동안 철저히 안으로 내실을 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비록 미국시장의 매출 하락과 전세계적인 자동차 시장 불황, 그리고 한국의 IMF라는 악재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독자엔진의 또 다른 버젼 개발에 회사의 사활을 걸어 온 역량을 쏟아붇고, 또 한편으로는 독자엔진을 얹은 신모델들을 끊임없이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는 일들을 반복합니다. 회사가 잘 나갈때, 미래의 비상 상황을 예상하고 이를 헤쳐나올 만한 힘을 평소에 길렀던 유비무환의 자세를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에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글로벌 경쟁 상황에서 기술 자립 없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는 순간 큰 위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진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에 걸쳐 현대자동차 이외에 다른 한국 자동차 브랜드가 모두 쓰러진 것을 보면 이렇게 정중동하여 내실을 기하는 일이 당시에 얼마나 중요했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1990년대에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을 보내신 분들이라면 당시 대우그룹을 위시하여 대우자동차가 세계경영을 한다고 매일같이 신문 전면광고하던 시절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대학교 졸업생들의 최고 선호 직장이 대우그룹이었을 만큼 대우는 소위 잘나가는 브랜드였습니다. 대우자동차가 세계경영 기치에 따라 동유럽,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등에 거점을 마련하고 멋진 모델들을 수출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자랑스러워 했지만, 사실 대우의 자체 기술은 생각보다 매우 미약한 편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아와 쌍용자동차도 마찬가지였지요. 자체 기술이 부족하던 한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결국 부실경영의 늪에 허우적거리다가 IMF를 맞이하여 회사가 도산하는 운명을 겪게 됩니다.  


 

기술보다 감성에 호소했던 대우자동차 광고 (출처 : dprime.kr)

 

 

물론 현대자동차가 2000년도 후반부터 미쯔비시 자동차를 몸집 면에서 넘어섰다고 해서 절대 자만은 금물입니다. 미쯔비시자동차는 7개가 넘는 수많은 일본 자동차 브랜드들 중에서 일부일 뿐이며 미쯔비시가 도태되었다고 해서 일본 자동차 업계가 다 그렇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일본의 자동차 3강인 토요타, 혼다, 닛산은 여전히 첨단 기술과 디자인으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요. 한편 미쯔비시 그룹에서 자동차 부문은 굳이 주력으로 쳐주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다른 산업속에서 미쯔비시 브랜드의 파워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역으로 한국 자동차 업계는 사실상 현대자동차를 제외하고서는 오늘날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브랜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자동차 이외에는 기술독립을 등한시 하고 질적인 발전보다는 양적 팽창에 치중한 결과 모두 다른 회사들에 인수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현대자동차라도 이렇게 오늘날까지 살아남아서 세계 3번째 규모의 자동차 그룹으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회사가 잘 나갈때 나태해지지 않고 기술독립을 위해 전력 투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자동차 회사나 국내외 시장의 상황에 따라 큰 위기가 오기 마련이며, 그 위기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미쯔비시 자동차의 신세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술 독립 포스터 (출처 : 다키포스트)


 
마지막으로... 지난번 글에서 다룬 미쯔비시의 흑역사 3종, 즉 3번이나 찾아온 큰 위기가 터지기 전에 미쯔비시의 최고 경영진들은 과연 이 사태를 사전에 모르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있었어도 문제, 알고 있었어도 문제이지 않을까 합니다. 구보토미오 전 회장 이후로도 미쯔비시 내부에 걸출한 인물이 물론 있었겠지만, 3번의 큰 위기를 미연에 방지 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들의 실력이 영웅의 레벨이 되기에는 좀 못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대자동차가 현재까지 살아남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현대자동차가 비범한 영웅의 실력과 인성을 알아보고 끝까지 중용하여 최대한의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가져다주었다는 점 덕분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허락한 경영진들의 신속한 대처와 혁신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부분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현대자동차를 이끌어온 수장들은 당시의 환경과 조건이 요구하는 시대적인 상황에 절묘하게 들어맞았다는 점도 현대자동차로서는 무척 행운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현대자동차의 초기에는 도전적인 정주영 회장과 세심한 정세영 회장의 협력이 빛을 발하여 세계시장을 개척했고, 현대자동차의 중기에 품질문제로 회사의 존망이 달렸을때는 뚝심의 정몽구 회장이 강력한 품질경영으로 회사를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친환경 및 수소/전기자동차 시대에는 인재찾기의 달인 정의선 회장이 적절한 인재들을 전세계에서 찾아 중용하거나 신기술을 가진 기업들을 인수함으로서 현대자동차를 질적으로 변화시켜나가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하여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를 5회에 걸쳐 연재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현대자동차의 초기 역사를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흥미롭게 읽으셨기를 바라며, 다음 글에는 현대자동차의 경영구조적인 특성과 그것이 회사에 끼친 다양한 영향에 대해서 한번 자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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