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DAI 18. 같은 형제들도 아롱이다롱이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5)
옛말에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이 어느정도 비슷할 순 있어도 외모와 성격면에서 크게 다를 수도 있음을 표현하는 뜻이죠. 그말은 정말인것 같아요.
혹시 여러분 괴물 축구선수 "엘링 홀란드"를 아시나요? 그는 약관 23세에 불과한 나이이지만 2022년에 영국 프리미어리그 멘체스터시티로 이적하자마자 36골로 득점왕을 차지하였습니다. 바로 이전 해에 손흥민 선수가 23골로 득점왕이었는데, 만약 엘링 선수가 1년만 일찍 영국에 왔다면? 아마도 손흥민 선수는 더 진땀을 흘려야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ㅎㅎ 195센티가 넘는 키로 필드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엘링은 멘체스터시티가 이번에 UEFA 챔피언스 리그, 프리미어리그, FA컵을 모두 우승하는 "트레블"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그는 프리미어리그 진출 1년만에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명으로 떠올랐는데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의 폭발적인 인기에는 그의 귀여운(?) 외모도 한몫했다고 하죠? 거친 플레이스타일과 2미터 가까운 체격 때문에 가까이 갔다가는 움찔~하고 놀랠 것 같지만, 알고보면 장난도 많고 애교도 수준급이라고 전해집니다. ㅎㅎ 그런데 최근 그가 전세계 팬들을 다시 한번 놀래키는 일이 발생했으니...
그의 가족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하면서 그의 형제들도 덩달아 유명해지기 시작한거죠~ 특히 그의 친형 "아스토르 홀란드"가 동생의 귀여운(?) 모습과는 딴판으로 완전 할리우드 배우 수준의 훈훈한~ 외모임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느낌이 다르죠?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가 1990년대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한 유명 축구선수였음에도 그의 형 아스토르는 지금 축구와는 전혀 거리가 먼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인데도 정말 외모적으로나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를 수도 있는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정주영 회장은 슬하에 8남3녀를 두었습니다. 도합 11명이니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정말 많은 형제수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면면을 보면 서로 닮은 부분도 있으나 전혀 다른 부분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형제들은 누가 보면 한가족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판이하게 다른 경우도 있고요. 이렇게 볼때 DNA란 참으로 신기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각각 얼마의 비율로 믹스가 되었느냐를 가지고도 자녀들이 다를 수 있겠고, 여기에 조부모나 부모의 형제의 성향이 한다리 건너 전해질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또한 DNA 외적으로도 성장 환경과 경험의 차이도 적잖은 영향을 주겠지요.
오늘은 이렇게 다양한 정씨 일가 형제들이 어떻게 성장하였고,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현대그룹의 주축을 이루어갔는지 간단히 다뤄볼 예정입니다. 이후에 다룰 둘째 아들 정몽구 회장과 넷째 아들 정몽헌 회장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를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선 필요한 배경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글에서 다룬 청운동의 96평 자택은 이 11명의 자녀들에게 정말 마음의 고향같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엔 형제수가 세 명만 되어도 많다고 하는데 11명이라면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갖가지 드라마틱한 추억이 만들어졌을 법합니다.ㅎㅎ 저도 제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에 자란 집과 동네가 지금도 가끔씩 꿈 속에 생생하게 나타나거든요. 가끔 형제들과 다툼도 있었지만 같이 뛰어놀고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지금은 재개발로 인하여 없어졌지만... 어렸을 때 살았던 그 집은 항상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현대가에 있어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청운동 자택은 정주영 회장의 별세 이후 첫째가 아닌 둘째 정몽구 회장이 물려 받았고 지금은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회장의 소유입니다. 보통 한국에서는 장남이 물려받기 마련인데, 그 자택을 장남이 물려받지 못하고 차남이 물려받았다면 분명히 어떤 일이 있지 않았을까요?
이번 글에서 다음글까지는 우선 제일 유명한 둘째 정몽구 회장과 넷째 정몽헌 회장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여자 형제들인 정경희, 정정인, 정정임을 제외한 6명의 남자 형제들에 대해서 순서대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들 / 정몽필 사장
그는 1934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서 아버지의 사업이 한창 시작된 10대 시절 서울로 이주하게 됩니다. 아래의 오랜된 흑백 가족 사진을 한번 볼까요? 1950년대 초반 부산 피난 시절의 정씨 일가 사진입니다. 첫째 아들 정몽필 사장은 맨 뒷줄 오른쪽 끝에 교복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입니다. 바로 옆은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고요, 그 옆 역시 교복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이 정주영 회장의 막내 동생 정상영 회장입니다. 그런데 정몽필 사장이 삼촌인 정상영 회장보다 더 커보이죠? 사실 맞습습니다. 정상영 회장은 1936년 생이기에 삼촌이 큰조카 정몽필 사장보다 2살 어린 상황인 것이죠. 이렇게 된 이유는 정주영 회장이 부인 변중석 여사와 만나기 이전 아주 이른 나이에, 다른 분과 혼인을 한 적이 있었고 정몽필 사장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변중석 여사는 정몽필 사장이 자신의 소생이 아님에도 그를 사랑으로 잘 키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출생 스토리와 11남매 대가족의 장남... 여기서 오는 무언가 막중한 부담감 때문인지, 그는 평생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몸부림쳤던 인생을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47세가 되던 1982년, 한밤에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도중 트레일러와 충돌하면서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하고 맙니다. 당시 사고 차량이 현대와 포드 합작의 그라나다였고, 경부고속도로 역시 현대건설이 완성한 결과물이었으니...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정주영 회장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는 일본 출장을 마치고 복귀하는 정주영 회장을 맞이하기 위해 김포공항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다음날 예정된 새벽 회의에 참여하려고 무리하게 밤길을 달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귀국 이후 예정된 공식 일정들 때문에 장남의 소식을 듣고도 일을 모두 마치고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삶을 보면 마치 한편의 드라마 주인공같습니다. 평생 아버지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고 싶어한 큰 아들...거기에 똑똑한 동생들도 즐비하니 얼마나 그 마음이 힘들었을까요? 완벽하게 모든 일을 잘 해서 아버지에게 반드시 인정받아야만한다는 강박관념이 그 마음 속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졸업 후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와 TV아나운서 출신의 이양자씨를 배우자로 맞이하는 등 인생 초반은 꼭 재벌가의 장남답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현대건설과 현대종합상사의 임원을 거쳐 타일, 시멘트 등이 주요 품목인 동서산업의 경영을 맡게 됩니다. 그의 경영 능력은 처음엔 나쁘지 않았고, 나름 열심히 일하여 착실히 기업을 성장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경력도 1980년대들어자 주춤하게 되었다는데요, 그는 본인의 사업군을 확장하고자 전자와 레저 산업에도 손을 댔으나 이게 마음처럼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에 분노한 정주영 회장은 정몽필 사장을 사장에서 낙마시켰고, 상심하게 된 그는 마치 귀양을 가듯 가족과 함께 영국행을 선택했다고 하죠.
그러자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정주영 회장의 막내 동생 정상영 회장이 나섰습니다. 그가 큰형님을 잘 설득한 끝에 정몽필 사장과 가족은 겨우 한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음이 약해진 정주영 회장은 이번에는 귀국한 정몽필 사장에게 인천제철의 사장이라는 중책을 맡기며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게 됩니다. 정몽필 사장은 더이상 큰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인지 기대에 부응하고자 정말 열심히 일을 했고 인천제철을 착실하게 성장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전자사업에도 진출할 것을 권유하여 현대전자가 설립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것은 그룹의 미래를 내다본 좋은 결정이었죠.
이렇게 하여 그는 화려한 재기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와중에 큰 사고가 났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정몽필 사장의 둘째딸인 정유희씨가 1991년 이화여대에 수석으로 입학하자 뛸뜻이 기뻐하였다고 전해지죠. 그래서 이화여대에 공학관을 건축하여 기증했다고 합니다. 큰아들에 대한 정주영 회장의 그리운 마음을 어느정도 확인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셋째 아들 / 정몽근 회장
정몽근 회장은 1942년 서울 출생인데 이때는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 자동차 정비사업을 하고 있을 시절입니다. 이북에서 태어난 정몽필, 정몽구 두 형님들과는 달리 정몽근 회장부터는 서울 생인 것이죠. 그는 둘째 형 정몽구 회장과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동문입니다.
사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는 매우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이전부터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대외적인 무대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까지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큰 주목을 받은 적이 별로 없으나, 적어도 자신이 맡은 사업의 경영만큼은 본인의 의지가 대단히 확고했다고 합니다. 이는 특출난 재능을 가진 형님들 그리고 동생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살아남고자 했던 자신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는 1974년부터 아버지 밑에서 현대백화점의 전신인 금강개발산업을 경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금강개발산업은 현대건설의 각종 기자재를 남품하던 회사입니다. 그랬던 조그만 회사가 현재는 "현대백화점그룹"으로 성장하여 한국의 백화점업계에서 롯데와 신세계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백화점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이전부터 현대백화점은 고급의 이미지가 좀 있었지요. 제가 어렸을 때도 그냥 적당한 물건 사려면 동네의 일반 백화점을 가고, 좀 가격나가는 선물이라도 사려면 셔틀버스를 타고 삼성동 현대백화점으로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원한 에어컨과 인테리어 등, 현대백화점 나름의 고급화 전략 때문에 무언가 특별히 살 일이 없었어도 그냥 구경삼아 많이 갔었습니다. 그리고 성장한 뒤에는 삼성동 코엑스나 인근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밤이 다되서 버스나 지하철이 끊기면 현대백화점 앞에서 택시를 잡아야되는데 항상 인파가 많아 참 어려웠었죠 ㅎㅎ
그리고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서울 신촌 지역에서 대학생이었거나 신촌을 자주 드나들었던 분들은 신촌그레이스백화점 주변이 추억에 많이 남으셨을거에요. 그 일대는 그야말로 젊은이들의 동네였죠. 근처에 신촌 지하철역이 있고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가 위치해 있어서 하루종일 온갖 사람 구경하고 싶으면 여기로 오면 된다할 정도로 엄청난 유동인구가 이 지역의 특성이었습니다. 특히 삐삐를 쓰거나, 초기 핸드폰 보급 시절, 신촌그레이스백화점 앞은 소개팅이다 뭐다 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만남의 장소로 자주 이용했었습니다. 건물은 후줄그레했지만 건물 앞 공터가 넓었고 건물 자체가 눈에 확띄는 존재감 때문에 약속장소로 제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IMF때문에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자, 그곳을 현대백화점이 인수해서 뭔가 도떼기 시장같던 이전 분위기를 고급이미지로 확 바꾸는데 성공했습니다.
정몽근 회장은 워낙 조용해보이는 특성 탓에 지금까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일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용한 경영자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회사가 위기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저돌적인 추진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 예가 바로 그의 공격적인 백화점 경영과 투자활동입니다.
1970년대 중반 시절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에는 일부 신축 아파트들만 있었고 논밭이 곳곳에 산재했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때는 강남지역에 고급 시설을 짓는 것에 대해 다른 경쟁업체들도 모두 회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설득하여 당시 허허벌판 강남에 현대백화점 설립을 적극 추진했다고 하지요. 어떻게 그가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느냐? 그가 그렇게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 도쿄 출장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도쿄 도심 외곽지역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처음엔 인구가 적었던 곳에 일단 백화점들이 들어서자 급격히 상권이 발전하는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강남에 백화점을 세우면 유동인구가 늘고 상권도 금방 발전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울 압구정동과 삼성동에 전격적으로 현대백화점이 세워졌습니다.
한편 IMF시절에도 그의 행보는 달랐다고 합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내놓으라하는 유명 기업들도 하루가 멀다하고 쓰러졌던 IMF 상황 속에서도 그는 다른 경쟁업체과는 딴판으로 오히려 공격적인 신규 투자를 강화했습니다. 그 시절 그는 신촌현대백화점과 서울천호현대백화점을 개점했는데, 그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이 IMF가 끝나가자 그동안 소비에 목마르던 소비자들이 구매욕구가 하늘을 찌를 듯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미 신규투자를 해두었던 현대백화점은 구매욕구에 사로잡힌 당시 소비자들을 신규 투자해둔 고급 백화점으로 끌어들여서 경쟁사 대비 많은 매출을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두 아들인 정지선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에게 현대백화점그룹을 승계하였고, 현재의 현대백화점그룹은 백화점 사업뿐만아니라 아웃렛, 홈쇼핑, 케이터링, 인테리어 가구 및 건설장비 분야도 골고루 운영 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정몽근 회장이야말로 숨은 실력자가 아니었던가 합니다. 그리고 성격에 대한 평도 나쁘지가 않습니다. 그는 각 지역의 백화점을 순시할 때도 직원들의 인사는 꼭 받아주는 자상한 경영자였다고 하네요.
현대백화점그룹의 미래를 예상해볼 수 있는 곳이 지난 2021년 서울 여의도에 개점한 "더현대서울"입니다. 더현대서울은 대한민국 정치 금융의 허브라 일컬어지는 여의도에 세워진 신개념 백화점입니다. 왜 신개념이냐? 이는 기존 한국 백화점의 전통에서 벗어나 매우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더현대서울은 "자연친화형 도심 속 자연주의"를 표방한다고 합니다. 즉 쇼핑을 통해서도 힐링을 추구할 수 있게 하겠다... 이러한 컨셉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을 전문용어로 "리테일 테라피" 라고 한다고도 하네요.ㅎㅎ 아무래도 남성분들보다 여성분들에게 리테일 테라피가 더욱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네요. ㅎㅎ
그런데 그 리테일 테라피라는 것이 단지 물건을 구매함으로서 힐링을 준다는 개념보다는 쇼핑을 하는 행동 자체를 문화적인 행위로 격상시킨다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좀 복잡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일단 그곳을 방문해보면 확 체감할 수 있다고 하네요.
실제로 이곳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대중들에게 금방 이름난 명소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자연친화주의를 모토로 했던 것 답게, 모든 층에서 자연채광을 즐길 수 있고 매장 안은 각종 수목으로 꾸며져 있어 공원을 연상하게 한다고 하죠. 또한 한가운데에 인공폭포를 조성하였고, 각 층사이에 충분한 층고와 기둥없는 공간들을 만들어 충분한 개방감을 선사해준다고 합니다. 이렇듯 이곳의 절반은 매장, 절반은 고객들을 위한 테마파크식 휴식공간이라고 하니 힐링을 추구하는 리테일 테라피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곳 사이사이에 다양한 브랜드 점포들과 맛집들이 입점해 있는데, 특히 무인점포와 안내 로봇들을 적극적으로 적용한 것도 이색적입니다.
더현대서울이라는 이름 자체가 백화점 같지 않은 것도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화점이라는 낡은 이미지를 빼고 MZ세대들을 겨냥한 힙플레이스의 의미를 담았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휴게소 및 건설 용품 납품 기업이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매출 20조원이 넘는 대형기업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정몽근 회장의 능력은 상당히 출중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동차강국의 대표 브랜드 WADI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HYUNDAI 20. 금융을 담당한 형제들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7) (8) | 2023.11.08 |
---|---|
HYUNDAI 19. 형제 간 우애도 뚝심있게!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6) (12) | 2023.10.26 |
HYUNDAI 17. 와 부럽다...나도 걸어서 출근할 수 있다면?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4) (60) | 2023.09.12 |
HYUNDAI 16. "머스탱, 포니, 갤로퍼" 말들의 대결! 최후의 승자는?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3) (39) | 2023.09.04 |
HYUNDAI 15. 포니정의 포니 쿠페가 시장에 나온다면? – 현대자동차에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2) (42) | 2023.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