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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상 03] 비오는 날 4km를 걸어야 제주도 바다를 볼 수 있다면?

마셜 2023. 5. 2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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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만에 제주도 출장이었습니다. 전에는 연 1~2회 이상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 일로 갔었지만, 코로나-19 영향으로 정말 오랜만에 일 때문에 제주도에 며칠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도 같지만, 제주도는 꼭 가면 회사 일이 더 바쁜 곳입니다. 도착 첫 날도 괜히 왔나 싶을 정도로... 회사일이 밀려들더군요. 그나마 이른 비행기로 도착한 것이 전화위복이다 할 정도로, 호텔 앞 커피숍 구석에서 야근보다 집중해서 일처리를 했습니다. 사무직에게는 재앙과 다름없는 IT기기들... 간간이 울려대는 휴대폰과, 깜박거리는 메신저는 정말 내 일정에 대한 관용이라고는 없더군요. 

 어찌되었든 숨돌릴틈 없이 첫날이 지나가고, 둘째 날 짧게 시간 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자.. 조금은 억울해진 마음에 호텔과 가까운 곳 중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지 않은 시간, 생각보다 먼 거리에 위치했던 애초 후보지들은 모두 탈락... 결국 꼭 바다를 봐야겠다는 마음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바다, '도두봉'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날씨는 비가 내렸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도와주지 않았고... 거리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첫번째 선택, 4km를 걸을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면 오기였지만, 한 번 걸어서 가보자라는 마음에, 비가 그친 틈을 타 재빨리 운동화를 신고 출발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날씨는 제 편이 아니어서, 곧 다시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고, 초행길 4km 걷기에 전 그냥 차를 탈까....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가서, 어디서 쉬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걷다걷가 보니, 도두봉까지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어서... 그래 일단 도착해서 생각해 보자라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 와중에 멀리 초등학교가 보이는 어느 흔한 밭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옆 밭의 파 한 줄

  5월 중순, 이미 파를 수확하고 남겨둔 것인지,  아직 파종 전이라 밭을 비워둔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제법 넓은 밭은 뭔가 쓸쓸해 보였습니다. 멀리 보이는 나무도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것이 비 오는 날씨에 더 쓸쓸해 보여서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래도 아마도 주인이 두고두고 필요할 때마다 뽑으려고 남겨둔 것처럼 보이는 파 한 줄이 그래도 풍경을 지켜주는 듯 덜 쓸쓸하게 만들더군요. 밭 옆의 흔한 돌담도, 멀리 보이는 초등학교도 긴 거리를 걷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그래서 제게는 기억에 남을 풍경이었습니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고, 점점 고행길처럼 느껴질 무렵, 드디어 목적지인 도두봉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이 보였습니다. 바로 도두봉이 있는 마을 도두1동에 들어선 것이죠. 제법 시골 어촌 마을의 구불구불한 골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마을은 현대식 동주민센터도 있고, 비오는 날에도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 신축 건물 공사현장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부분 부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원형을 보여주는 마을 돌담길

 만져보면 손을 무너트릴 수도 있을 것 같은 현무암 돌담이 이어져있는 마을이 바로 제주공항 위 땅 끝의 도두동입니다. 도두동을 지나 바다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힘들게 걸어왔던 목적지인 도두봉이 있죠. 이미 많이 지쳤지만, 힘을 내서 스마트폰 지도를 보면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도두봉 등산로 초입

 드디어 도두봉 등산로가 시작됩니다. 사실 67m밖에 안되는 작은 봉우리라 등산이라 말하기도 어렵지만, 빗속에 이미 지쳤는지라.. 잘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많이 찾으실 법한 체력단련 시설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도두봉이 마을사람들과 긴 시간 함께 해왔음을 보여주는 '제단'이 나타납니다. 

도두봉 제단 안내문

 어디가나 뭔가 유적지에 서 있는 안내문은 반갑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단은 마을사람들이 단장한 것이라고 하니 유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올레길 일부인 이 봉우리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구나 생각이 들게 하기에는 충분한 안내문입니다. 

제단 전면

 무성한 풀과 닫혀 있는 입구가 '이제는 제단을 사용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줍니다. 궁금증이 더해져서, 뒷면으로 돌아가보니, 제법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돌담과 달리 반짝거리는 대리석 제단이 눈에 띄네요. 좋은 제단을 마련한 것이 아마도 당시 마을사람들의 정성이겠죠. 

제단 후면
제단 돌담

 야트막한 제단 돌담은 역시나 마을사람들이 직접 쌓아올렸는지, 손으로 흔들면 무너질 것처럼 약해 보입니다. 굳이 철옹성처럼 만들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 정성으로 쌓아 올린 것이 어찌 보면 제주도 자연과 바다를 거스르지 않고 함께 하려는 마을 사람들 마음 같기도 합니다.  

 

 67m 얕은 봉우리이니, 금방 정상일 것이다.. 를 되뇌이며, 걸음을 재촉합니다. 가다 보니 선명한 두 갈래 길이 선택을 강요하네요. 때마침 궂은 날씨에 다른 관광객들도 없어서, 선택은 오롯이 제 몫입니다.

선명한 두 갈래 길

 그러고 보니, 올라오기 전 안내도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을 본 것 같기도 한데...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부주의함을 후회하며,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계단길을 택합니다. 

 다행히 정말 산책과 별 차이없는 평탄한 길로 곧 넓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도두봉 정상이 나옵니다.

바다가 보이는 도두봉

 멀리 넓은 제주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도두봉, 하지만 어떤 각도를 찍어도 드론 비행 금지 안내문을 피해 갈 수는 없더군요. 오히려 그 안내문과 벤치, 그리고 멀리 보이는 건물과 도로, 포구 들이 이곳이 '한국'의 '제주도'임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야경으로 봤으면 멋졌을 법 한 드림 타워

 야경이 꽤 유명한 곳이라고 하던데, 시내 쪽을 돌아보니 그 이유가 짐작됩니다. 해지기 전에 방문한 저는 짐작만 할 수 있었지만, 밤 시간에도 안전하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니, 잠깐 공항에서 여유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들리시면 뜻밖의 야경을 만끽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봉수터 안내문

 안내문이 있으면 꼭 읽고 가야죠. 흩뿌리는 빗방울 속에서도 열심히 읽어보니, 조선시대에 봉화를 올리는 봉수터였던 모양입니다. 올리는 불의 갯수로 위급함을 표시하는 간단한 방법이 잘 설명되어 있더군요. 시계가 좋은 날은 멀리 육지의 불/연기가 보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니... 새삼 흐린 날씨가 야속합니다. 

 

밝은 빛을 비추는 도두봉 정상 초입

 그래도 편한 마음으로 바다를 둘러보고 여기 저기 사진도 찍고, 내려오다 보니, 제가 택하지 않았던 언덕길에 이런 모습이 있더군요. 마치 고생 끝에 밝은 빛을 비춰주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와 한 장 남겨봅니다. 그 사이 찾아온 커플 관광객들은 연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습니다만, 긴 거리 비 맞으며 혼자 걸어와 지친 저는 사진 한 장을 남기고 돌아섭니다. 

  내려와서 차를 탈까 다시 고민했지만, 한참 기다려야 하는 버스 시간과 택시를 부르려니 다시 앱을 깔아야 하나.... 여러 번거로움에 직면.. 결국 그냥 다시 걸어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한 번 왔던 길... 훨씬 마음은 편합니다. 여유롭게 마을 안 돌담길을 걷다 보니, 지자체에서 조성한듯한 마을 옛 사진이 전시된 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옵니다. 

마을 옛 사진

 너무나도 옛날 같은 흑백 사진이 정말 이 마을의 모습인지가 신기하더군요. 보육원이 있었다고 하니, 뭔가 슬픔의 역사도 간직한 지역인 모양입니다. 

 

 다시 4km를 걷고 걸어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평소보다는 잘 먹게되는 출장 특성상, 운동 잘했다고 위안하며 돌아오는 길은 오히려 가는 길보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공항 바로 옆길을 지날 때, 비행기 착륙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동영상으로 찍어봐도 가까이서 보는 비행기 저공비행은 뭔가 신기하네요. 

 

비오는 날 여유 있게 착륙

 참고로 도두봉에서도 비행기 이착륙을 가까이서 보는 걸 재밌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지역주민들에게는 소음이겠지만... 이제는 공항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긴 분들이니.. 일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녹초가 되어 호텔에 돌아오면서 8km 도보여행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엄청난 풍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비오는 날 끝까지 비를 뚫고 바다를 보러 갔던 기억은 제게 소중하게 남겠지요.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과정에서 의지를 찾는다면, 다른 기억을 남길 수 있다는 걸 느낀 그런 산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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