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과잉 - 단순한 기록

한국형 아포칼립스의 진화 -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엄태화 감독)

마셜 2024. 9. 17.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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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영화)

 

1. 이제는 블록버스터급 작품을 볼 수 있는 한국형 아포칼립스

 많은 이들이 한국영화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물론 개봉영화 장르 다양성이 점점 약해지고 있고, 대작이 개봉해도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는 뉴스를 쉽게 나오기에 좋지 않은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스크린쿼터를 운영하면서도 한국영화가 고사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내게, 많은 자본을 끌어모아 작가적 상상력을 상당한 정도로 구현해내는 한국영화계는 여전히 잘 작동되고 있는 산업분야이고, 블록버스터와 전 세계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를 동시에 쏟아내고 있는 한국영화계는 정말 빠르게 그리고 많이 성장해 왔다. 

 그 성장의 한 단면이 아포칼립스물의 등장이다. 헐리우드의 다양한 아포칼립스물을 보면서, 이건 뭔가 문화가 다르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 후 SF소설로부터 뿌리가 이어지는 다양한 좀비, 핵전쟁, 환경재해 등에서 기인한 아포칼립스물을 보면서, 한국에서는 왜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없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스스로 찾아내본 답은... 일단 작가적 상상력을 구현해 줄 정도로 한국영화계의 자본, 기술력이 충분하지 못했고.... 한국을 넘어선 '세계'의 위기를 이야기하기에는.. 한국사람들이 너무 바쁘고, 눈앞의 문제에 급급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세계적인 수준의 만화 플랫폼인 웹툰에서 다양한 아포칼립스물을 쏟아내고 있고, 이를 원작 삼아 다양한 영상화가 이루어졌다. 많은 작품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고, 이제는 양산형 웹툰이 쏟아지며, 비슷비슷한 얘기 때문에 외려 매력이 떨어지는 장르가 되지 않나 우려도 나오지만, 어쨌든 파격적인 설정도 훌륭한 상업영화로 만들어내는 한국영화는 엄청난 힘을 지녔고,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개봉은 그 힘의 과시처럼 느껴졌다. 

 

 

2. 부족한 건 모두 주조연 배우 연기력으로

 설정은 간단하다. 원인 모를 대지진으로 모든 세상이 무너졌는데, 한 동 짜리 황궁아파트만 멀쩡하다. 게다가 극심한 추위가 몰아닥쳐서 얼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기에... 멀쩡한 이 아파트에 추위를 피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갈등이 시작된다. 

 생각하기에도 끔찍하지만, 그렇기에 머리 속에서 쉽게 지워버리기는 어려운 이 설정은 영화의 상당 부분을 쉽게 설명해 준다. 훌륭한 CG로 만들어진 압도적인 스케일의 지진 장면과 폐허 또한 상영관에서 봤으면 훨씬 더 끔찍했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서서히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아파트 사람들의 스토리에는 극적인 반전이나 갈등 같은 건 없다. 물론 사람이 죽고 가는 생존투쟁을 극적이지 않다고 평하는 건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다소 뻔한 흐름에 극적 재미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고, 결말까지도 밋밋하게 다가왔다. 

 이 모든 걸 덮어주는 엄청난 영화의 힘은 바로 '연기력'이다. 이병헌-박서준-박보영 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캐스팅은 예고편과 포스터를 통해서도 기대감을 높여주는데, 영화에서 보여주는 연기력은 그 이상이다. 어쩌다 자리를 맡게 되고, 어쩌다 보니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주민대표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낯선 사람이 되어버리는 공무원 남편과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잃지 않는 간호원 아내... 평면적인 이 설정에 각각 투입된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은 정말 대단한 연기력으로 영화에 힘을 불어넣고... 나름의 티켓파워로 흥행에도 힘을 보탰다. 물론 캐릭터 자체가 다중적이거나 입체적이지는 않지만, 상황에 맞춰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는 연기는 흔히 보기는 어렵다.  

(모든 것을 이끄는 주민대표 이병헌, 출처: 네이버 영화)
(늘 불안하지만, 늘 최선을 다하는 두 사람 박서준과 박보영, 출처: 네이버 영화)

 

3. 한국에서 아파트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화는 묻는다. 한국에서 아파트의 의미는 무엇인가? 물론 이 물음에 적극적으로 답하고 있기에는 2시간 상영시간도 부족하다. 처참한 지진 장면부터 먹고 살기 위해 보급투쟁과 나름의 반전까지... 영화는 보여줄게 많기에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는 못하지만... 황궁아파트를 무시했던 드림팰리스... 그리고 그 집을 소유한 사람들과 전세 거주자들을 은근 차별하는 사람들... 그리고 20년이 넘게 일했어도 결국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주민이 아닌 경비원까지...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이런저런 설정은 한국에서 과연 아파트가 생존을 위한 거주지인지, 부의 상징인지, 아니면 계급을 나누기 위한 도구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폐허 속의 역게토,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 출처: 네이버 영화)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따로 분리되어 모여 살던 집단거주지역을 '게토'라 불렀다. 억압의 상징이었고, 유대인의 이동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요즘은 스스로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외부인의 방문 등을 통제하는 자생 커뮤니티를 '역게토'라 부르기도 한다. 주로 부촌에 형성되는 이런 역게토는 치안 등 사회서비스를 스스로 비용을 더 부담하며 높은 수준으로 높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데, 세상이 멸망한 극한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이 자경단을 보면서... 21세기의 역게토가 떠올랐다. 

 한국의 부촌 아파트가 결국 원하는 것은 역게토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역게토가 진화하는 형태는... 그만두자.. 상상하기 그렇게 유쾌한 주제는 아니다.  

 

4. 진정한 디스토피아인가? 아닌가?

(2시간 내내 웃지 못한 박보영,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속 서울은 디스토피아일까? 헐리우드 디스토피아물을 보면, 마지막에는 구조헬기가 온다거나... 혹은 재건 가능성을 찾는다거나, 아니면 안전지역을 찾아낸다거나 하는 예상되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라면수프 같은 중독성 있는 희망 섞인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많이 헷갈리게 한다. 어떤 구조헬기도 없고, 라디오방송도 없고, 정부 움직임도 없는 상황은 단순하고도 강한 디스토피아인가? 아니면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며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세상인가? 흥행을 위해서겠지만, 생각보다 잔인한 장면도 별로 없고... 추악한 인간 모습은 보이지만, 인간 밑바닥의 폭력까지 보여줬다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선한 사람들도 등장하는 이 세계는 참으로 간단하지는 않은 그런 세상처럼 느껴졌다. 

 확실한 건, 자신의 신념과 인간성을 잃지 않은 박보영은 영화 내내 웃지를 못했다. 선한 사람이 늘 괴롭고 웃을 수 없다면, 아마도 디스토피아가 맞을 것이다. 물론 꼬마 아이와 티키타카를 통해 극도의 선함을 잘 보여주지만, 그 외에 이야기에서 그녀는 늘 힘들고 걱정하고, 외롭다. 그런 이미지로 영화가 끝나고 나서, 찾은 촬영현장에서 환히 웃는 사진을 봤을 때 더 눈에 들어왔다. 

 

 영화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기고 끝이 났다. 엄청난 지진장면에 대한 생생한 재현과, 화려한 캐스팅 등 볼거리는 많았지만,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모양이다. 흥행영화라고는 볼 수 없는 성적표에 감독이 전하고자했던 생각할 거리가 더 기억에 남는다. 이미 많은 OTT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의 아파트의 의미를 되새겨보시지 못했다면 한 번 클릭해 보시길... 그 의미가 와닿지는 않아도, 서울을 모두 날려버린 대재앙의 흔적만으로도 한국영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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