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과잉 - 단순한 기록

좋은 소재, 아쉬운 버무림 - 모비딕(2011, 박인제 감독)

마셜 2023. 12. 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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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다음영화)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TV드라마를 꼽자면, 단연 '무빙'을 꼽을 수 있다. 
 
 우연찮게 본 영화 모비딕, 사실 재미있었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사람들이 크게 기억하는 영화도 아니지만, 느낌을 몇 줄 남기기 위해, 영화정보를 검색해 보니, 놀랍게도 감독이 박인제, 바로 '무빙'의 감독이었다. 모비딕과 무빙 사이 그 10년이 넘는 시간 시간 사이 킹덤2를 감독했다고 해도.. 두 작품의 차이는 엄청나게 느껴졌다. 물론 강산이 한 번 변할 만큼 긴 시간이었고, 두 작품의 장르도 매우 다르기는 하지만... 같은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의 차이라니.. 그 엄청난 발전에 박수를 쳐야 할지... 아니면 2011년 모비딕 제작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해야하는지 헷갈릴 정도이다. 
 
1. 허먼 멜빌의 소설에서 한 구절
 1시간 50분이 넘는 줄거리 전개보다, 영화 전체를 더 잘 설명한 한 줄, 소설 「모디빅」 중 한 줄

 실제로 그것이 그 흰 고래라는 것을 알고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 허먼 멜빌 「모비딕」 중에서 -

 
 영화 전반부를, 아니 어찌보면 영화 전체를 알듯 말듯하게 가득 채우는 거대한 음모론에 대한 조각조각난 설명보다는, 이 한 줄이 훨씬 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모르는 거대세력이 정부 위에서 교묘하게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음모론은 참 솔깃한 이야기이고, OECD 경제대국인 동시에, 북한문제, 미중갈등으로 인한 고민, 고령화&저출산 문제등이 난무하는 한국사회에서 한 방에 모든 고민을 풀어줄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000 때문이다"라는 식의 음모론은 앞으로도 매력이 있을 것이다. 
 
2. 허술한 음모론, 매력을 잃다. 
 결국 음모론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럴 듯 해서이다. 영화에서 끈질기게, 끝까지 가보고자 목숨을 거는 기자들이 파헤치는 음모론은 몇 개 플로피디스크와 해결사집단 몇 명 외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핵심적인 비밀을 손에 쥐고서 극을 이끌어야 하는 윤혁(진구 扮)은 자기가 무엇을 봤고, 왜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폭로하려 하는지, 왜 그래서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한다.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겨우, 실체가 간략히 설명되는 이 '정부 위의 정부'는 사람 목숨 정도 파리로 여기는 것은 기본이요. 언론 통제와 민간인 사찰 등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집단인데, 툭툭 끊기는 빌드업은 긴장감을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영화관에서 본 관객들은 뻔한 답답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나마 허술한 음모론이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도록 떠받쳐준건 정말 최적화된 캐스팅의 배우들의 명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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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대장' 정만식, '진행시켜' 이경영 / 출처: 다음영화)

 
 이제는 악역이 맞춤정장처럼 잘 어울리는 정만식과 이경영, 둘다 명배우이고, 늘 열연하지만, 이제는 악역 관련해서는 매너리즘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그런 위치가 되었다. 
 사실 필모그래피를 보면, 둘 다 악역만 고집하는 건 아닌데.. 묘하게도 늘 악역이 아닌 다른 캐릭터에 도전한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이런 이미지가 형성된 듯... 어쨌든 둘 다 등장하는 것만으로 악당 포스를 풀풀 풍겨주는 것은 배우로서 큰 무기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모비딕에서도 헐렁해 보이는 정부 위의 정부 멤버들 중에 유일하게 와 진짜 악당이다.. 싶었던 두 명이었다.
 
3. 그땐 그랬지 - 보안사 민간인사찰 폭로 사건(일명 '윤이병 사건')

윤석양 사건 그린 영화,윤석양이 안보는 이유는…

‘모비딕’ 보안사 민간인사찰 폭로 그려 21년 전 행적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듯 관람 꺼려

www.hani.co.kr

 
 윤이병 사건, 혹은 보안사 민간인사찰 사건도 이제 30년이 넘는 한참 전 과거 사건이 되었다. 
 아직은 군인출신 대통령인 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던 시절, 그 시절 권력을 잃은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위치였던 보안사가 저질렀던 정말 큰 스케일의 민간인 사찰 사건은 한 사병의 용기 있는 행동에 그대로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이제는 그땐 그랬지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 여파는 대단히 컸다. 꼼짝못할 증거를 앞세운 언론사 폭로에 보안사는 책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사찰 대상은 대단히 많아서,  그 후 대통령이 되는 유력 정치인, 변호사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의도도 악질적이어서, 어쨌든 정권이 어떤 연유로든 계엄령을 발동하면 즉시 군부가 무차별적인 검거를 통해 반발을 원천봉쇄한다는... 지금은 상상도 못할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2023년 한국 기준으로 보면, 분명 군부 주도의 이런 무차별적인 민간인 사찰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이런 민간인 사찰이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불법적인 것임을 사회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는... 늘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4. 결국 감독의 선택은 저널리즘 혹은 기자정신

(열일하는 두 기자 / 출처:다음영화)

 
  결국 박 감독은 영화 주 소재인 실화의 무게감 대신 저널리즘 혹은 기자정신을 택했다. 러닝타임 내내 기자정신은 강조되고, 주인공 이 기자의 폭주를 우려하는 부장은 계속해서 팩트와 기자정신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바보 사 남매 같은 기자들의 분투는 막내의 활약과, 맏형의 중꺽마 스피릿으로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예언적 특종보도로 치닫게 된다. 

(에이스 막내를 쳐다보는 바보기자 삼형제 / 출처: 다음영화)

 
 그 과정에서의 세세한 장치들은 꽤 재미있었고, 제작과정에서 실제로 사회부 기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에 공을 들였다는 후일담에 공감이 될 정도로 생생했다. 예컨대, 호프집 비밀 사무실에 녹음기를 넣기 위한 비밀작전이라던가, 정보원 보호를 위해 목숨을 거는 기자 마인드 등은 꽤 몰입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가 개봉한 2011년 기준으로 혹은 2023년 현재 기준으로 봐도, 모비딕으로 분한 영화보다는 실화 '보안사 민간인사찰 폭로 사건'이 더 재미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공포의 대상이었을 보안사가 그 후 어떻게 권력으로부터 멀어졌는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자정신으로 승부를 건 감독의 선택이 아쉬웠다. 물론 그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고, 폭로 당시에도 언론사 도움이 없었다면 이슈화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 관객동원 40만 명에서 보듯... 관객들이 철저하게 외면하고... 사람들에게 보안사 사건을 더 알리지도 못한 것을 보면, 감독이 의도했을 상업적 성공, 높은 평가 모두 달성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5. 늘 고생하는 배우 김상호

(출처: 다음영화)

 

 이제는 정말 찾아보기 힘든 구식 공중전화 앞에서 열일하는 손 기자, 배우 김상호.
 꽤나 정이 가는 배우인데, 정말 이렇게 늘 고생하는 역할로 나오는 배우도 드문 것 같다. 모비딕에서도 초반부 정말 진실의 편인가? 어디 끄나풀 악당인가?라는 의심을 주면서 텐션을 잘 올려주고, 그 후에도 계속 활약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역시 영화가 망하면서 모든 것이 묻혔다. 
 물론 그 후에도 다작으로 활동하면서, '아 그 아저씨'라는 푸근한 이미지로 관객들 뇌리에 기억되고 있지만, 아직은 '신 스틸러'까지 가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 같다. 좀 더 입체적 역할, 좀 더 주도적인 캐릭터로... 강렬하게 기억되는 신 스틸러로 한 번 등장해 주길 기원해 본다. 
 
 영화는 꽤 길고, 보안사 민간인사찰을 잘 설명해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황정민, 김상호, 진구, 김민희가 출연했다면 이유가 있기는 있는 법.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대단하고, 1990년대 초반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시절의 감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웨이브와 쿠팡플레이에서 편하게 볼 수 있으니, 황정민이 연기한 그 시절 기자정신을 접하고 싶으신 분에게는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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