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모습 - 한국사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치욕의 역사를 다시 가정해보자

마셜 2022. 10. 2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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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아래 글은 한명기 저,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을 읽고 든 이런저런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병자호란, 그 치욕의 역사를 다시 가정해 보자. 

 병자호란만큼 한민족에게 치욕적인 역사가 있을까? 임진왜란은 결과적으로 방어에 성공을 했고, 몽골 침략도 강화를 하긴 했으나, 삼궤구고두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다만,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이 전쟁을 이토록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패배의 치욕이 깊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겨우 38년이 지난 후, 다시 치욕을 겪었기 때문이다. 
 북방을 어지럽히는 위험 존재로 전부터 규정되었던 여진족의 침공, 이 예고된 재앙을 왜 피할 수 없었을까? 많은 이유가 있고, 셀 수 없이 분석되었겠지만, 그저 40대 직장인으로서 세상을 이해하는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고, 어느 시대나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제나 더 많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탓에 그런 의문은 더욱 커져갔다. 
 역사학자가 심혈을 기울여, 대중을 위한 이야기로 풀어낸 이 책은 그 의문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날 더 큰 일탈이자 도전으로 인도했다. 
 흔히들 말한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일목요연하게 가정해보고 싶어졌다. 이랬다면, 이렇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그저 한 번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책은 훌륭하게도 그 모든 가정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실마리를 말이다.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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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문룡이 없었다면?


 저자는 모문룡을 ‘악성 종기’라 표현했다. 악성이라 하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뜻이고, 종기라 하면, 당장 그로 인해 사망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건데..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다. 
 명나라 장수로서, 인조 책봉에도 끼어들었던 모문룡은 인조와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결국 원숭환이 전격적으로 처형한 후에야 종기는 치료되는데, 그 합병증 또한 깊어서, 광해군이 궁여지책으로 내주었던 가도는 조선의 숨통을 겨누는 지정학적 요충지가 되어버렸고, 그가 죽은 후에도 후금은 가도에서의 혼란을 명분 삼아 계속해서 조선을 흔들어댔고, 조선은 마땅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병자호란은 발발, 결국 모든 것은 파국을 맞는다. 
 무장보다는 간신, 협잡꾼에 가까웠던 모문룡은 그 존재 자체로서 광해군, 인조 두 임금의 걱정거리였고, 조선을 한계로 몰아넣었지만, 조선-후금(청) 간 대결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모병이 그 대결의 흐름을 바꿀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악성 종기가 발병한 원인을 생각해 보자면, 그럴 만큼 위생상태가 불량하거나 면역력이 저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결국 모문룡은 그저 종기로서 조선을 끝없이 괴롭혔지만, 조선을 사망(패배)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3년전 평안도 국경방어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관이었던 이괄은 난을 일으킨다. 부원수로서 영변에 주둔했던 이괄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가장 실질적인 포석이었는데, 명분도 없는 전격적인 거병이었음에도 그 반란군은 1만이 넘었고, 그를 막아선 상관 도원수 장만의 병사는 3천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괄에게는 마병(馬兵)과 항왜(降倭)가 있어 돌격 전을 감행하면서 불과 20일도 안되어 서울에 입성하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우선 평안도 영변의 이괄이 동원했던 반란군이 1만이 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괄의 주둔지가 의주가 아닌 영변이었다는 점이다. 평안북도에서 국경을 맞대는 지역이 아닌, 오히려 의주-정주로 이어지는 후금군 진격로에서 한발 물러난 지역, 산성 위주일 수밖에 없는 조선 방어전략에서, 그 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예상 진격로에서 적을 저지할 수 있는 진정한 예비대가 위치하기에 적절한 요충지이다. 결국 후금에 맞설 평안도 유일한 예비대가 이괄의 부대였던 셈이다. 세 번째, 반란군에 마병과 항왜, 즉 돌격대가 있었다는 점인데, 이는 그 후 후금(청)과 이런저런 전투에서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기병이자, 숙련된 돌격부대이다. 
 결국 정리하자면, 이 반란으로 인해, 조선은 후금 침입에 대비해 양성했던 1만명 이상의 기동부대이자 숙련된 기병 포함 돌격부대를 잃었고, 호란을 겪을 때까지 전혀 재건하지 못했다. 
 호란에서 전체 조선 인구나 지방군 병사 수에 비하면 큰 규모도 아니었던 후금 정예병이 불과 며칠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일차적으로 진격을 저지할 수 있는 이런 기동부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저자가 지적했듯 반란 후, 후금으로 투항한 한윤 등은 정묘호란 시 후금의 길잡이 역할을 했고, 반란 후 다른 반역을 두려워한 조정의 과도한 기찰과 감시로 현장 지휘관들은 제대로 훈련 한 번 하지 못했다. 
 이괄의 난 자체가 당시 반정세력이 얼마나 이합집산에 불과했는지를 보여주기에, 이괄이 없었다 해도, 결국 정권에 균열은 생겼겠으나, 평안지역 유일한 기동부대를 없애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리라. 
 결론적으로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전쟁 자체를 승리로 이끌거나 예방하지는 못했겠더라도 적어도 삼궤구고두례는 없었을지 모르겠다. 

 


3. 조선 사대부가 청의 잠재력을 이해했다면?


 저자가 힘주어 설명한, 박엽(朴燁)은 흥미로웠다. 광해군의 동서였고, 반정 직후 처형당했으며, 혹리(酷吏)의 전형이었다지만, 천문/지리/중국어에 능통한 관료였다. 이런 다양한 분야에 능했다면 보기 드문 노회한 외교관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평안도관찰사로 후금 측과 실무 교섭을 담당했는데, 흥미로운 건 반정공신인 최명길이 박엽을 구명하여 계속 기용하자고 했다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 최명길과 광해군이 외교관에서 공통점이 있다 말한다. 
 ‘교전 중에도 사자가 왕래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광해군, 그리고 혹리여도 유능하니 계속 후금과 교섭을 맡기자고 주장한 최명길, 둘은 모두 그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후금이 가진 잠재력을 이해했기에 세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지막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조선 사대부 주류가 청의 잠재력을 이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장 근본적인 가정인 만큼, 애를 써도 머리 속에 그려지질 않았다. 결국 저자의 도움을 다시 받는다. 책 마지막에서 저자는 말한다. 조선의 대청인식 변화는 종전 후, 100여 년이 지나고 본격화되었다고, 어찌 보면, 진정으로 불가능한 가정임을 간결하게 입증한 그 설명에서, 국제정세 판단이 고려왕조나 조선 초기 집권층에 비해 크게 퇴보한 조선 현실이 보여 한숨짓게 된다. 
 결론적으로 애초에 조선 사대부는 청의 잠재력을 이해하기에 근원적 한계가 있었고, 그렇기에 이 가정은 너무나 불가능하다. 

 간결한 역사서를 교본 삼아, 마음껏 가정을 하며 참패로 끝난 전쟁을 되짚어 보니, 역시나 모든 전쟁과 패배는 깊은 연원이 있다. 특히 병자호란은 후금에 반드시 필요했다. 다만, 희대의 악성 종기와 내부혼란으로 인한 기동부대 폐지로 스스로 치욕을 자초한 것도 사실이다. 
 병자호란에 대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가정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친 독자에게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준 한명기 교수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교전 중에도 사자가 왕래해야 한다는 광해군의 한 마디는 여전히 유효하다. 생각이 너무 달라 통할 수 없어도, 대화를 해야 한다. 그 대화가 힘이 들어도,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는 길만 고집했을 때, 결과가 어땠는지를 가끔은 생각해야겠다. 어찌 보면 힘들어도 이어가는 대화 자체가 그 어떤 묘수보다도 내 인생에서도 큰 실패를 예방해 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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