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모습 - 한국사

알려져 있지 않는 병자호란 승전의 역사 - 김화 백전 전투

마셜 2023. 6. 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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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병자호란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요즘, 도서관에서 생각이 닿는 데로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새로운 책을 발견했다. 특히, 개인적으로 관심이 지대한 병자호란 관련 국방태세에 대한 글이 실려 있어서, 바로 대출대를 찾았다. 
 제목도 멋진 '병자호란과 김화 백전전투(The Manchu's invasion of Joseon in 1636, The Batlle of Gimhwa Baekjeon)(丙子胡亂 金化栢田戰鬪)'
 

 영어와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범상치 않은 표지나, 태봉학회라는 필자진을 보았을 때는 미리 짐작하지 못했다. 책을 보는 내내 머리가 아플 것이라고는...
 
기대했던 데로, 책에는 병자호란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고찰이 가득 차 있었지만, 책장을 보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 요즘은 보기 드문 한자 표기가 가득했던 것..
 

본문 중 188p

 한국사에 대해 깊이있게 공부를 하려면, 이 정도 한자는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쉽게도 보는 순간 머리가 아파지는 실력이다. 그나마 짧은 한자실력과 짐작, 눈치를 섞어 괴롭지만 천천히라도 읽을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사실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네이버 렌즈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관련해서, 책을 포스팅하기 위해 온라인 서점에 들러 이런저런 정보들을 보다가 웃음이 절로 나오는 책 평가를 발견해서 그대로 옮겨본다.

 아마도 내용 중 한자가 있다면 최소한 병기되었을 것을 기대하고 책을 구매한 독자가 남긴 것이리라.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컸던 것일까. 내가 느낀 감정이 당혹감 정도였다면, 이분은 최소한의 도리(?)인 한자/한글 병기를 해주지 않은 저자와 출판사에 대해 분노를 그대로 드러냈다. 난 피식 웃었지만, 분노에 공감은 표시하고 싶다. 사실 대중이 읽기를 바라고 단행본을 출간했다면, 요즘 독자들 눈높이에 맞춰 표기해줬어야 한다. 
 
 총서 발간 이유가 충분히 공감될 수밖에 없다. 병자호란은 워낙 처참한 패배이기에, 그 과정에서 있었던 개별 전투 승전인 김화 백전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장 구글에 검색을 해봐도 '김화 전투' 혹은 '자모산성 전투'로 명칭부터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책 소개를 하려면, 책 주제인 전투 개요에 대해서는 설명을 안 할 수 없으니, 간략하게 잘 정리해 준 유튜브 동영상을 먼저 소개해본다.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세계한민족문화대전 동영상 아카이브 채널

 책의 본문에서 소개되는 당시 치열했던 전투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책 본문 297p~, '김화 백전대첩(栢田大捷) 유적의 현황과 보존대책' 중에서)
 '결과는 유림의 예측대로였다. 1차 공격은 청의 기병보다 보병위주의 공격을 목책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을 바위와 돌로 공격한 후 흩어지는 이들을 창검병이 공격하여 청군은 다수의 희생자를 냈다. 청병의 제2차, 3차 공격은 바윗돌 공격을 피하여 가파른 산으로 올라왔다. 이 전투에서는 제1선의 창검병을 제3선으로 돌리고 궁병과 총포병으로 응사하였다. 힘들게 올라와 기동력이 저하된 적 보병들을 전방 10보 내에서 사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총검병은 방어선을 뚫고 올라오는 소수의 청군을 제압하였다. 세 차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당한 청군은 병력과 무기를 보충하여 저녁에 다시 네 번째 공격을 가했으나 이번에도 유림은 적의 침입로 주변에 총병과 궁병을 매복하여 배후를 공격하자 청군은 와해되고 도주하였다. 유림은 말에서 떨어진 적장을 저격케 하여 적장 야빈대도 사살되었다. 매복해 있던 유림 본군은 당황하며 도주하는 청병을 추적하면서 사살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네 번의 전투에서 청군은 약 3천명 정도 사살되었다. 그러나 청군은 계속해서 후원군이 늘어나고 있음을 파악한 유림은 다음날 증원군이 다시 공격해 올 경우 화약과 화살이 부족하다는 점과 병사들이 사기는 높지만 지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1월 28일 밤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원래 근왕군의 목표는 남한산성의 인조대왕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과의 전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림은 파손된 총포 등에 화약과 약선을 다양하게 연결하여 청군이 보기에 유림군이 밤새도록 김화에서 전투준비를 하는 것으로 인식시켜 야습을 방지하였다.'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유림이 이끄는 병력은 3,000명으로 알려져있고, 함께 백전까지 진군해왔으나 평지에 진을 쳤다가 전멸당한  평안도관찰사 홍명구의 병력은 2,000명이었다. 어쨌든 근왕병 5,000명이 청군 3,000명을 사살했으니, 대승이긴 하나, 아군 손실도 만만찮았던 승리라 정리할 수 있겠다. 
 
 
 책은 다양한 관점에서 병자호란 전체와 백전전투를 세심하게 다룬다. 
 
병자호란에 대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학자들이 다양하게 참여한 학술대회 결과물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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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총서를 펴내며
수록 논문의 출처
 
제1부. 병자호란의 제문제
병자호란 연구의 제문제
- 조성을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明淸交替 시기 朝中關係의 추이
- 韓明基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이종호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朝鮮 政府의 捕虜 送還 노력
- 강성문 (전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교수)
 
제2부. 김화 백전전투
17세기 전반기 조선의 대북방 방어전략과 평안도 국방체제
- 노영구 (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과 교수)
 
丙子胡亂의 戰況과 金化戰鬪 一考
- 柳承宙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丙子胡亂 金化 栢田戰鬪 考察
- 권순진 (수도문물연구원 실장)
 
戰骨塚의 조성 경위와 위치 比定
- 柳在春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화 백전대첩(栢田大捷) 유적의 현황과 보존대책
- 이 재 (국방문화재연구원 원장)
 
부록
태봉학회 활동 및 철원군의 역사·문화 관련 동향
- 김영규 (태봉학회 사무국장·철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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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익숙한 한명기, 노영구 교수도 보이고, 철원 지역 향토사학자로 보이는 분도 있고, 어찌되었든 이 정도로 병자호란 관련 논문을 망라해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사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얻고자 했던 정보는 따로 있었다.

 

 물론 백전 전투의 실상도, 그 승전이 기본기와 침착함(엄격한 화기통제와 사정권 안 진입 후 발사)으로 청군기병을 제압한 것이라는 것도 다양한 학자 분석을 통해 입증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난 여전히 '이괄의 난'으로 인해 약화된 평안도 방어가 병자호란을 촉발한 가장 큰 원인이며,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에 대한 작은 근거라도 찾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엄청난 소득은 없었지만, 노영구 교수 논문 중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한 부분은 기억해둬야겠다 싶었다. 

 

 (174p~, 17세기 전반기 조선의 대북방 방어전략과 평안도 국방체제)
 '병자호란 발발 직전 조선의 방어체계는 도원수 김자점을 중심으로 서북지방 주요 접근로 상에 있는 요충지에 주요 지휘관을 임명하고 주변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삼아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의주는 청북방어사, 안주는 평안병사, 영변은 부원수, 평양은 평양감사, 황주는 도원수, 평산은 도체찰사의 입거지로 설정하였다. 도원수 김자점은 이들 각 요충지 방러를 다시금 산성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이에 의주는 백마산성, 평양은 자모산성, 황주는 정방산성, 평산은 장수산성을 각각 보수하여 방어체계를 갖추도록 하였다. 영변의 약산은 산성이었으므로 변화는 없었고 평안도 방어의 주요 거점으로 방어체제를 충실히 하고 있었던 안주는 평안병사가 그대로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안주성을 제외한 이들 산성은 대로에서 30~40리 이상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대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결국 조선이 청의 재침에 대비하여한다고 한 대비는 모두 기병 주력의 침공로인 '대로'를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셈이다. 대로에서 청군 기병을 맞아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유일한 야전군이 바로 이괄의 1만 2천 정예병이었던 셈. 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당시 평안도 방어체계는 속도를 앞세운 청군 기병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일부 산성에서의 방어전은 전쟁 양상을 전혀 바꾸지 못했다. 여전히 이러한 허술한 방어가 병자호란의 제1원인이라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관련 독서를 거듭할수록 병자호란의 원인은 방향을 달리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타와 한자 때문에 힘들었지만, 전문 학술서적 체험 치고는 즐거웠다. 
 
 태봉학회, 국방문화재연구원, 철원군에서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개별 저자의 실수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눈에 띌 정도로 책에 오타가 많다. 한자가 많아 읽기 힘든 것과 더불어 눈에 거슬렸던 부분인데, 아무래도 상업적 성공보다는 출간에 의의를 둔 학술서적이다 보니 이중, 삼중 교열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전문 학술서적을 한 권 읽어냈다는 뿌듯함은 남는다. 물론 머리에 뭐가 아주 많이 남지는 않았고, 일부 페이지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가볍게 포기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난무하는 한자에 좌절하지 않고 오랜 기간 조금씩이라도 읽어서 완독한 점은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다. 
 남한산성 관련으로 이런 책이 있으면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활발한 연구를 자랑하는 경기연구원에서 멋진 연구결과물이라도 없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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