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사 삼성이라는 기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경제를 선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반도체산업 개편 하에서 삼성과 반도체 생태계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매우 많다.
그런 분위기에서 반도체 인재양성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사설이 나와서 눈에 띄었다.
사설 반도체 학과 거부하는 서울대…士農工商 세계관에 빠졌나 | 한경닷컴 (hankyung.com)
시간을 들여 정독해보았다.
엔데믹이 현실화되고, 미국 주도의 반도체 생태계 재편이 가시화되는 동시에, 삼성은 TSMC에 밀리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2022년, 경제신문의 논조는 절박했고, 메시지는 분명했다.
"서울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원하는 대로 반도체학과를 신설하라"
동의한다.
사실 계약학과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해보니, 수도권 대학 중 진학할 수 있는 계약학과를 정리하여 포스팅한 입시 블로그가 있을 정도.... 사실 기업 지원을 받아 대학에 신설된 학과로서, 졸업 후 해당기업으로 취업이 보장되는 학과를 지칭하는 이 제도는 공채가 폐지되고, 대학 입학 후 4년간 인턴자리를 찾아 헤매야하는 이 문송한 시대에 앞으로 더더욱 확대될 수 밖에 없는 제도이다.
사설 논조는 격정적이었고, OECD회원국 한국에서 오랜만에 들어보는 '사농공상'까지 적어가며, 서울대의 반도체학과(계약학과) 신설 보류(혹은 실패)가 얼마나 부당한지를 토로했다. 사농공상이 이러한 서울대 내 반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화가 많이 난 논조는 충분히 와닿았다.
하지만,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언급되면서 이야기는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수도권총량제(인구유발시설을 수도권에 늘리는 것을 제한하는 제도)는 수도권 내 대학 정원을 늘리는 것을 원칙적으로 막고 있고, 이는 모든 대학에게 공통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정원확대 제한 예외로서 '계약학과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생각보다는 꽤 많은 학과가 있다. 2022년 5월 기준 무려 244개 학과! 그 중 서울에 있는 학과 54개 학과에 달한다.
https://www.academyinfo.go.kr/pubinfo/pubinfo0370/selectListLink.do?gubun=schl
(검색가능한 대학 정보공시)
이렇게 이미 계약학과가 많고, 반도체학과도 서울대는 없지만, 2006년 성균관대를 필두로 다양한 학과에 신설되었다. 물론 서울대에 반도체학과가 신설되면 좋은 일이겠지만, 서울대에 신설이 안되니 수도권총량제 참 문제야... 이런 이야기 전개는 비약이 좀 심하다 느껴졌다. 생각해보자. 기업이 장학금을 대주면서 정원외로 학과를 신설해달라 해도 쉽지 않은 서울대인데, 정원을 늘릴 수 있어서, 대학자율적으로 진행이 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그건 해보기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이 정도 타이밍에서 드는 또다른 의문
왜 지방대는 안돼? 그럼 지방대는 뭐 먹고 살어?
https://news.imaeil.com/page/view/2021112516143369789
경북대 모바일공학과는 입결이 성대와 연대의 반도체 계약학과보다 높았다고 한다. 단편적인 기사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학과 운영 자체가 실패는 아닌 모양이다. 지방거점대로서 계약학과를 설치하여 모범사례를 보이는 대학이 있는데... 더하여 서울/경기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 지방지역에 90개가 넘는 대학 내 계약학과가 있는데... 지방대가 망해간다는 걱정을 언론에서도 앞다투어 한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지방대도 생존방안으로 계약학과 신설을 적극 추진할 수 있도록 하면 안되는 것일까?
수도권총량제의 취지 자체가 수도권으로의 인구 집중을 억제하여, 국가 차원에서의 비효율을 줄이고, 지방 균형성장을 유도하는 것이고.... (물론 다른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지방대 입장에서는 대기업와 손잡고 첨단분야에 학과를 신설하는 것이 몇 안되는 수도권 명문대와 싸울 수 있는 무기일지도 모른다.
경북대 사례를 보면, 법 취지를 잘 지키면서도 지방대에도 큰 도움을 주는 운영사례가 이미 있는데, 꼭 서울대를 고집해야하는 이유가 와닿지가 않는다.
아 서울대가 국내최고 명문인건 안다. 그리고 반도체산업에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한 것도 안다. 그래서 많은 계약학과가 필요한 것도 안다. 다만, 서울대에 정원 50~100명의 계약학과를 설치할 수 없으니 수도권총량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난을 하기보다는 플랜B로서 다른 대학을 찾아나서는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2022년 올해도 계약학과 신설은 활발한데 말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58252#home
꼭 서울대여야만 한다는 논리, 서울대만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논리.. 둘다 공허하면서도, 묘하게 일맥상통한다.
앞으로 서울대에 반도체학과가 신설되던, 그렇지 않던 상관 없이 수도권총량제 만은 꼭 유지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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