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강만길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내가 대학에서 역사책을 뒤적거릴 때는 이미 정년퇴직하신 후였고, 그 후로도 연구 및 저술, 그리고 대외활동을 활발히 해오셨지만, 뭐가 그리 바빴는지... 특강이라도 듣기 위해 노력해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한 권 한 권 신간이 나올 때마다 반가웠고,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현대사 인식에 대한 원칙을 지켜나가시는 모습에 든든하면서도 안도감이 들곤 했었다.
이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역사학계에 선생님을 대신할 분이 계시긴 한가.. 이런 생각이 든다. 후학 양성에 적극적이셨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분단시대'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기는 하겠으나, 강의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아쉬움은 오래 남을 것 같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책장을 뒤져보니 '고쳐 쓴 한국근대사'와 '고쳐 쓴 한국현대사'가 있다.
아무리 뒤져도 '20세기 우리 역사'를 찾을 수 없는 게 조금은 아쉬웠는데, 두 책만으로도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꼼꼼하면서도 체계적인 연구를 엿볼 수 있지만, 은퇴한 역사학자로서 젊은이들에게 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던 노력은 아무래도 '20세기 우리 역사'에서 제일 잘 드러났다.
처연한 기분으로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보니 빛이 바랜 종이만큼 내 기억도 많이 휘발되었다. 이리저리 자주 넘겨봤던 책이지만, 책장마다 가득 찬 자료와 문장들이 새롭기 그지없다.
역사학자로서 고단한 작업이었을 통사 편찬에 뛰어든 이유를 설명한 머리말이 인상적이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 『한국현대사』 책 머리에 ('고쳐 쓴 한국현대사' 7~8p)
"(중략) 해당 후 분단시대의 경우도 민족사의 불행한 부분으로서의 분단체제의 고정화과정과 그것을 극복하고 민족의 재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민족통일운동의 전개과정, 그리고 식민지 경제가 휩쓸고 간 후의 자본주의 경제의 재건과정과 그 취약점, 분단시대의 사회 및 문화 체제와 그 제약성 등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역사서술에 있어서 편년체적인 방법을 피하고 일종의 분류사적 방법을 택하는 것은 역사를 정치.외교사 중심으로 쓰는 폐단을 줄여보자는 데도 그 목적이 있지만, 그 경우 특히 어떤 사실을 '역사'로서 선택하여 쓸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우리 역사학이 동시대 연구를 적극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측의 연구성과를 역사학적으로 종합 정리하는 데도 그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아래서 해방 후의 분단시대를 역사의 시대로서 개설화 내지 시대사화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시대를 통해 민족사학자 박은식이 자기의 시대를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로 정리한 사실만을 통해서도 분단시대 역사학이 당연히 담당해야 할 부분의 연구 및 서술을 기피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의미를 굳이 적지 않아도, 근현대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로서의 결연함은 다시 읽는 언제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학자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주장해던 '자본주의 맹아론'이 바랬던 사회과학측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공격당하고, 분단시대가 재통일을 향해 나아가기는 커녕 분단이 국민들의 마음에서부터 고착화되어버린 요즘, 선생님의 별세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일생에 걸쳐, 집대성과 실천이 무엇인지 보여준 강만길 선생님, 이제는 분단시대에 대한 걱정은 후학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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