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모습 - 한국사

동학운동인가 갑오농민전쟁인가 - 박태균 교수가 바라본 동학농민전쟁

마셜 2024. 6. 1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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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 국제대학원 홈페이지)

 
 
 몇 달 전 국방tv 방송 '역전다방'에서 갑자기 하차해서 시청자들에게 큰 아쉬움을 줬던 전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박태균 교수가 총선 직전 중앙일보에 기고를 했다. 제목은 '130년 전 동학농민전쟁이 부른 역사의 소용돌이'이고, 동학농민전쟁 그 사건보다는 그로 인해 촉발된 그 후 한반도 국제정세 변화가 얼마나 극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위정자들의 오판이 현재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130년 전 동학농민전쟁이 부른 역사의 소용돌이 | 중앙일보

시모노세키 조약의 의미 시모노세키 조약이 중요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대만을 ‘영원히’ 일본에 할여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철수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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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자로서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해온 분인 만큼,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아주 짧게 잘 요약한다. 목차만 봐도 대략 흐름이 짐작될 정도로 정묘한 글에서 애정과 내공이 느껴진다. 
 

- 동아시아의 다리, 한국.
- 동아시아를 바꾼 한반도
- 시모노세키 조약의 의미
- 이홍장의 실수
- 냉전의 기점이 된 한국전쟁
- 지금도 계속되는 불씨들

 
 국회의원들은 외교정책에 한해서는 국가 전체의 생존과 이익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결정해달라는 역사학자의 충고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1894년 농민봉기로부터 촉발된 내전(혹은 무장봉기)을 '동학농민전쟁'이라 표기했다는 점이다. 
 

 일단 현행 고교 교과서에서는 이 사건을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참조: 미래엔 고등학교 국사)

 
 동학세력이 어느 정도 주도했다는 점을 중시하되, 본질은 대규모 농민봉기였고,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사회변화를 추구했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가졌음을 두루 설명하는 명명이다. 
 

 그에 비해 박태균 교수가 사용한  '동학농민전쟁'은 사회운동 성격보다는 명확하게 전쟁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실상을 보면, 전쟁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최초 무장봉기가 촉발된 원인을 차치하더라도 전주성 점령 당시부터 농민군의 병력이 1만 명에 달했고, 그 후 우금치 전투에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참전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청.일 두 나라의 군대가 참전하면서 또 다른 전쟁을 촉발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일본 군대가 농민군을 진압한 결말을 보면, 전쟁이라는 명칭이 적절해 보인다. 물론 당시 농민군을 또 다른 국가에 준하는 세력이라 보기는 어렵고, 기본적으로 전쟁은 국가 간 충돌이라 봐야겠지만,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의 문제로 네이밍을 바라본다면, '전쟁'이라는 표현이 이 대규모 농민봉기의 의미를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는 데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옛날 옛적 교과서에는 '동학운동'이라고 불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그래도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동학운동'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학습했던 역사적 의의도 크게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당시에는 민중 혹은 피지배층과 연결지어 생각될 수 있는 '농민'자를 넣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실상을 보면 피지배층 대부분이 농민이었고, 조선 후기에 일어났던 민란들도 모두 농민들이 주축이었던 점을 생각하만, 따로 표기하지 않아도 당연히 농민 주도의 민중봉기라는 점이 전제되어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지 않지만, 1894년의 이 무장봉기는 동학이라는 당시 신흥종교의 조직이 근간이 되었고, 농민들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개선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다른 봉기와 구분될 수 있는 이 두 가지 특질을 네이밍에 반영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젊은 시절에는 '갑오농민전쟁'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만났다. 

 
 의도가 매우 뻔한 네이밍이다. 동학이라는 키워드를 배제하는 대신 농민전쟁 성격을 강조하되, 다른 무장봉기도 농민전쟁으로 보고, 1984년의 이 대규모 봉기가 농민전쟁들의 연장선상이자 클라이막스였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비친다. 당시 학계의 다수설이었다고 볼 수도 없고, 현재는 이렇게 부르는 학자들도 없는 것 같다. 프롤레타리아의 무장투쟁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marxist 스타일이 짙게 풍겨 나오는지라 이해는 쉽지만, 이제 그들이 몰락함에 따라 문헌연구나 과거 연구를 회자하는 기고에서 볼 수 있는 명칭이다. 
 

 '동학혁명'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지만, 과거에는 '동학(농민)혁명'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동학란'이라는 용어에 동의할 수 없는 만큼 혁명이라 불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위해 나선 농민들의 행동방식을 일면 혁명적이라 할 수는 있겠으나, 그들은 혁명을 꿈꾸지 않았다. 그저 조선 조정이 정신을 차리고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제대로 펼쳐주길 바랐을 뿐이다.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지도 않은 사회운동을 혁명이라 치켜세우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혁명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단초만 제공할 뿐이다. 
 

  명칭이 무엇이 되었든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박태균 교수가 잘 정리해준 것처럼 어쨌든 이 갑오동학농민전쟁(운동) 진압 과정에서 고종은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청나라 출병을 요청했고, 이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벌어진 타국 간의 전쟁은 결국 일본의 영향력을 극적으로 확대시켰고, 열강에 대한 대응준비가 형편없었던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다.
 
 

 돌아와요 박원장님

 
 당연하고도 평범한 사실이라도 되짚어서 현실을 꼬집어 줄 수 있는 게 학자, 특히 역사학자의 소명이라면, 박태균 교수는 그런 면에서 근면 성실한 분이다. 또한, 위 약력 소개에서도 나오듯 중앙일보에서도 경향신문에서도 기고를 하는 분이며, 역사비평 주간도 했지만 국방tv에도 출연하는 분이라서 더욱 기억에 남고 누구에게나 쉽게 추천할 수 있는 분이다.
 애청 프로 '역전다방'에서도 박원장 님의 빈 자리는 크다. 후임 박사의 내공도 상당하고, 애초에 박원장님의 토크 지분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대석학이 밀덕들이 주목하는 프로에서 재야고수들과 함께 토론을 임하는 건, 그 자체로 가슴뛰는 사실이었고, 실제로 토크과정에서도 맏형이자 좌장역할을 든든히 잘 수행했었다. 이제는 강의로 돌아가야할 시간인 것 같다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박원장님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모든 게 영원할 수는 없지만, 특히 프로그램 포맷 자체가 4명 전문가 패널 구성으로 특징 지워져 있기에 현 구조에서 컴백하시기가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오셔서 특유의 썰렁 개그도 거침없이 시전 하시고, 한반도 정세에 대한 역사적 시각도 잘 설명해 주시길 바란다. 
 그전까지는 다양한 칼럼, 기고, 강의로 대중과 더 소통하시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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