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수많은 도시 중 하나인 하얼빈은 한국인에게 곧 '안중근 의사'로 연결되어 기억된다. 혹은 유명한 맥주 브랜드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곧 개봉할 현빈 주연 영화를 떠올리는 영화팬도 있겠지만, 그 영화도 안중근 의사에게 그 연원을 빚지고 있는 걸 생각하면, 어쨌든 안 의사의 의거를 다룬 이 소설의 제목은 상징적이면서도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2022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카피문구가 누구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김훈 작가의 작품에 더 이상 '베스트셀러'라는 광고문구가 필요할까 싶다. 물론 비교적 다작에 속하는 이 작가의 모든 작품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대작가 반열에 오른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흔치 않지만, 진정으로 대작으로 부를 만한 소설을 만나게 되면, 의외로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서평에 남겨 놓을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한 문장 한 문장이 2023년 한국 현실에 대한 엄살을 질책하듯 엄중해보이는 이 책은 안중근의 행적을 진솔하게 짚은 것만으로도 가치 있었고, 관련 문헌과 자료를 통해 어느 역사책보다도 잘 재구성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작가의 노고가 느껴졌다.
새로운 발견, 그리고 반성 - 담배팔이 우덕순
역사 이야기를 꽤 좋아한다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덕순 의사는 이름만 알았지. 그의 행적이나 삶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하층민이었던 그가 이름뿐이었던 독립군 대장 안중근을 따라 이토 히로부미를 쏘기 위해 나서는 과정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어색하지 않았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허술하기 그지없었던 두 조선인 청년의 계획은 기적적으로 성공했고, 두 이름은 역사에 영원히 남았다.
김훈 작가도 강조했듯이, 포수와 담배팔이라는 두 청년의 직업이 한국인이나 누구나 들어봤을 이 이야기를 더 담백하고 맑게 만드는 듯 하다.
이러한 담백한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는 걸 변명해보지만, 사실 안다. 그전에 국정교과서로 국사를 배우던 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두 이름 안중근, 우덕순을 달달 외웠을지는 몰라도, 둘의 삶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걸 먼저 반성해야 한다는 걸... 겸허히 반성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역사의 한 순간, 그 순간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간 두 사람 앞에서 반성 정도를 망설일 이유는 없다.
'작가의 말'의 무게
대학생 시절 독서와 최근 독서가 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는, 학생 시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작가의 말' 등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의 김훈 작가의 담담한 자기 소회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특유의 담담한 말투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와 지난한 과정을 설명한다. 젊은 시절부터 쓰고 싶었으나 미루기만 하다가, 크게 앓은 후 서둘러 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에서 이제는 노년의 대작가의 조급함이 슬프게 와닿았다.
최근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집어든 이헌창 교수의 '김육 평전'에서도 이 교수가 본인 평생의 연구로 잠곡 김육을 택했고, 이제 노년이 되어서야 책으로 집대성하게 되었다는 솔직한 고백을 볼 수 있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대작가와 원로학자가 각각 평생을 과제로 스스로 설정하고 완성해 낸 저술을 쌓아두고 읽어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다.
시대는 변한다.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1993년 8월 21일 김수환 추기경, 안중근 추모미사에서,
- 하얼빈 282p 후기 中
하지만 시대는 변하지 않는다.
암울했던 식민지 치하, 조선인 청년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며, 부르짖었던 '동양평화'의 가치는 여전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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