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승자가 될지는 알려주지 않는 책
세심하게 반도체 역사를 잘 설명해 주지만, 정작 제목에서 호기롭게 던진 의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는다. 미중 패권전쟁에 있어서 반도체가 주요 전쟁터이자, 핵심 무기라는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세계 현대사에서 어떻게 실리콘밸리가 반도체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와중에 어떻게 일본-대만-한국이 끼어들기 시작했는 지를 한 편의 '논픽션 스릴러' 형태로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충분하지만, 엄청난 두께의 책을 재미있게 읽고 나니... 그래서 누가 이긴다는 거지..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다는 생각에 원문 제목을 찾아보니, 'Chip War - The fight for he world;s most critical technology'이다. 오역이나 초월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의문문으로 제목 형태를 바꿔 호기심을 자극한 건 출판사 부키와 번역자의 판단일 것이고, 저자인 크리스 밀러는 이런 양자택일 식 질문에서 자유롭기에, 뭔가 자유분방하면서도 엄정하고, 빠트린 국가 혹은 회사 없이 쓰인 이 이야 가는 저자 의도에 부합하는 훌륭한 역사책으로 평가하기 충분하다.
논픽션 스릴러라는 치장은 결국 MSG
책 광고의 전면을 장식한 '논픽션 스릴러'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멤버 중 논픽션 스릴러라는 광고가 지나치치 않게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는 평을 남겼다. 저자가 국제사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것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책은 명확하게 역사책이다. 반도체 산업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국제관계에 녹아들며 영향을 주었고, 이에 따른 각국 경제는 변화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그 와중에 대단한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립하지 않으려 애쓴 듯한 느낌도 줄 정도로 대중이 읽을만한 역사책으로 애초에 포지셔닝한 그런 저작으로 느껴진다.
결국 스릴러라는 표현 또한 출판사와 언론 혹의 MSG인 듯한데, 물론 유해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 반도체산업에 종사하거나 아니면 관련 회사 주식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분이라면, 혹은 나보다 훨씬 더 반도체산업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망해갔던 반도체 회사가 연쇄살인에 희생된 피해자들처럼 느껴졌을 지도.. 어쨌든 아이가 읽을만한 추천도서를 찾다가 우연히 집어든 책 치고는 보석 같은 역사책이었기에, 2025년 첫 독서모임 책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상식에 가깝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어려웠던 소련의 실패 이유 - 젤레노그라드
소비에트 연합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 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내 세대에서는 공산주의 근본적 결함은 상식이 되었지만, 그래도 사례를 들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PART II 아메리칸 월드의 회로망'에서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소련 젤레노그라드의 급추락은 어느 정치 교과서보다도 공산주의 혹은 국가사회주의의 근본적 결함을 잘 짚었다. 결국 기업가정신과 부에 대한 욕망 없이, 베끼는 방식으로만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특히 산업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공학기술 개발은 동기가 없다면 목표(혹은) 방향에 없는 헛수고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를 누르고 있는 슈퍼 乙 TSMC의 역사
어찌 보면 한반도만큼이나 군사적 긴장이 높은 대만에 1위 파운드리 기업 TSMC가 자리 잡게 된 배경과 역사 또한 이 책을 통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중국인이었던 반도체기술자 모리스 창이 어떻게 대만을 기회의 땅으로 여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대만과 TSMC는 어떤 위기와 기회를 거쳐 지금의 세계 1위가 되었는지 얼마든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실리콘밸리의 오프셋 움직임으로부터 출발하여, 냉전 틈바구니에서 저렴하고도 우수한 노동력에 기반해서 굴지의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해 온 TSMC의 역사는 이제 한국 입장에서 반면교사로 삼기는 어렵지만, '대만'이라는 존재와 그 지정학적 위치를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도움을 준다.
분명 어찌 보면 을의 위치에 해당하지만, 갑의 힘을 압도하고 있는 TSMC는 특히 이제는 추격한다고 말하기에 격차가 벌어졌지만, 어쨌든 경쟁위치에 있는 삼성전자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뭔가 부러움과 뭘 배워야 할지 많은 그런 상위권 친구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의 TSMC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제는 한국의 반도체산업도 다른 길을 찾아야 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계속해서 R&D자금을 쏟아부어야 하고, 정부도 이에 상응하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혁신을 최고 염두에 두고 좋은 CEO를 영입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늘 하던 식의 노력을 더 한다고 해서, 다시 반도체산업 생태계를 뒤흔들만한 도약의 시기가 한국에 올 것 같지는 않다. 미중 전쟁의 향배는 알 수 없겠지만 분명 업다운이 있을 터, 그 와중에 공격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교과서에 나올법한 교훈만이 덩그러니 남은 느낌이다. 사실 글로벌 대기업 간의 싸움과 이인자가 일인자가 이길 수 있는 솔루션을 역사책 한 권 읽었다고 얻을 수 있다면, 세상일 너무 쉽지 않은가.
최고의 문장 '워싱턴과 반도체 업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세계화라는 꿀단지를 끌어안고 단물을 마셔 왔다'
오마바 정부 말기 미 반도체 산업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분석이 본격화되는 시점 기준으로 저자가 전문가들의 행태를 비판한 문장이다. 분명 특정산업에 대한 기술이지만, 인문학적인 통찰력이 엿보이는 뼈 때리는 한 문장이다. 물론 이러한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의 문장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다. 세계화가 공존공영을 부르짖는 것이긴 하나, 그 와중에 미국이 딱히 불이익을 받았다고 볼 수 없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오프쇼어링 한 결과가 다른 나라의 노력과 얽히고설켜서 반도체 산업의 패권을 일부 잃었다고 해서, 꿀단지를 끌어안고 있었다고 표현하는 건 그간 미국이 그 산업 생태계에서 취한 편리함, 이익 등을 너무 비판적으로 보는 면이 있다. 경제학적으로 생각해 보자. 물건을 사게 싸는 건 이익이다. 지정학적으로 생각해 보자. 반도체를 (가상) 적국에서 생산하긴 부담되니, 친미국가 일본, 대만, 한국에서 생산하게 했다. 전략에 충실한 이러한 결정들을 50년의 역사가 흐른 후 안주하고 있었다는 평가하는 건 너무 박절하지는 않나.. 그런 생각도 든다. 어쨌든 역사학자 크리스 밀러 교수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이 한 문장에 가장 웃음이 나면서도 예리하다는 느낌이 들어 남겨놓는다.
최고의 인물 '갑자칩의 왕, 잭 심플롯'
아쉽게도 내가 고른 최고 인물인 잭 심플롯은 등장인물 소개에 없다. 이 책 장점 중 하나가, 주요 등장인물과 주요 기술용어를 책 서두에 간략하게 소개해둔 것인데, 두 자릿수 인물을 소개한 리스트에 잭 심플롯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어떤 천재보다도 어떤 CEO보다도 잭 심플롯이 기억에 남았다. 아이다호 보이시에서 감자 납품으로 떼돈을 벌었던 이 부자는 일본과의 경쟁에서 처참하게 몰리고 있던 그 시점 마이크론이 D램 생산에 다시 뛰어들도록 한 장본인이다.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10년간의 패배 후 1승에 불과했지만, 첨단기술로 생사를 다투는 반도체산업에서도 그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는 '기업가정신'이라는 모호하고도 본능에 가까운 능력이 승부를 가를 수도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기술적 확신을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체득하지 못했어도, 다른 사람의 제안을 받은 후에도 거기서 사업의 향배를 예측할 수 있고, '돈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리고 끝까지 싸우는 진정한 기업가정신을 보여준 기업가라 여겨져서 기억에 남는다.
그 외의 (멤버들의) 의견
- 반도체산업은 이건희가 아니라 이병철이 만든 것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참 대단한 인물이다.
- 앞으로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한 이 분야에 한국이 공격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인텔이 D램에서 벗어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야말로 위대한 결정이다.
- 차세대 육성산업으로 로봇이 유망하고,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주요 부품의 중국 의존도가 너무 높다.
- 중국은 역시나 여러 산업 생태계에서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 주식을 사야 한다면, 삼성, 하이닉스보다는 TSMC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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