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온 지 6년째가 되는 중닭 사회과학도인 내가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바로 '돈 있을 때는 서점에 가지 말자!!'다. 늘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가끔 지갑에 용도가 애매한 돈이 조금이라도 들어있을 때는 서점의 한 켠에 쌓여있는 인기도 없는 사회과학 책을 뒤적이게 되고... 결국은 그 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을 사고야 마는 실수(?)를 하고야 만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점에서 두툼한 양장본 책을 펼치는 순간, 난 가진 돈을 털어서 이 책을 사게 되고야 말았다.
가뜩이나 서구의 학문이 그대로 답습되는 사회과학계의 현실이 비판받는 한국에서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으로 미국인 정치학자의 저작을 고른 것에 대한 변명을 먼저 해야할 것 듯 싶다. 사회과학에, 특히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름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이다. 이 것은 단순히 미국에서 기침을 하면 독감이 걸리는 한국의 현실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연구와 저작이 한국현대사 서술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지금은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 그 자리를 내준 듯 보이나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한국전쟁 연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고, 개인저긍로 옮긴이가 사용한 '커밍스 컴플렉스'라는 표현도 상당부분 설득력을 가진 듯 보인다.
물론 그의 한국에 대한 연구가 깊이를 인정받는다 해도 한국의 대학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목록에 미국인 학자가 미국인 대학생들을 위해 한국현대사 강의용으로 저술한 책이 들어있다는 것은 한국현대사 연구와 저술이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을 덮을 만한 장점을 책을 읽으며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 바로 다른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커밍스' 의 경우 계속된 연구 주제가 한국과 관련된 것이었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현대 한국에 대한 판단은 학자적 자신감이 내비칠 정도로 정확하며 수많은 자료들도 그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이방인이 더 정확한 시각으로 분석해내고 짚어낼 때 느낌과, 스스로 득과 실, 성과와 한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논쟁의 소용돌이로만 기억하는 한국현대사의 굴곡을 그가 보다 객관적으로 지적할 떄의 신선함은 한국현대사에 관한 글에서는 느끼기 힘든 감정이다.
늘 그러했지만 신입생에게 한 가지만 충고를 하라면 누구의 얘기도 무조건 옳을 수는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닥치는 대로 논쟁하고 질문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알고 있다. '커밍스' 같은 학자는 한국에서 현대사를 전공하는 학자들도 알레르기와 컴플렉스를 가질 정도의 대학자라는 것을. 하지만 사회과학의 모든 이론이 현실에서 검증되어야 하듯이, 그의 저작이 아무리 예리하고 그의 저술이 유창한 한국어와 한국에서의 장기간의 체류연구 등을 통해 무장되었다 해도 한국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에게는 뭔가 2% 부족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 것을 학문적으로 지적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왜 뭔가 틀린 듯한 느낌이 들까? 뭐가 잘못된 걸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그 것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신입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요. '커밍스'가 한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덤이자 어찌 보면 신입생에게 가장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새로이 알게 될 역사적 사실들이다. 예컨대 한국전쟁 발발 전 양측 군대의 준 전시나 다름없는 교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북한정권의 형성 과정 등은 무척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더하여 재벌의 영어 표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등의 다양한 덤을 생각하면 비록 750쪽이나 되는 책이지만 그 한국사로의 여정이 그리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2003년 00대학교 총학생회에서 발간한 '새내기 책읽기 시대읽기'에 역사책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록되었던 글 중 하나입니다. 비문과 오타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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