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현역 군인(김광수 중령)이 쓴 손자병법을 정독해 보려고 구입했다가 몇 년 동안을 끝내 읽지 못하고, 책을 정리해 버렸던 게 떠오른다.
독서 모임 멤버들 중 의외로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을 읽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만큼 정비석의 소설은 인기가 많았고, 소설로 풀어내도 될만큼 재미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물론 소설 내용이 병법과 직접적 관련은 없었다는 건 함정. 난 소설을 1권만 읽고 그만뒀었다. 총 네 권이라는 것도 오늘 알았는데, 아마 집에서 굴러다니던 책이 1권뿐이었던 것 같다. 2권을 사달라 하거나, 구해보려고 애쓰지 않은 걸 보면, 소설도 내게는 큰 재미를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김광수 역 손자병법은 한자로 된 원문 밑에 어려운 한자를 풀이하고, 뜻을 풀이하는, 마치 교과서와 같은 일반적 구성의 책이었다. 그에 비하면 2025년 판 임용한 박사의 손자병법은 충실한 원문 해석 보다는 의역과 풍부한 사례로 승부하는 요즘 시대에 맞는 책이랄까... 그런 느낌이었다.
긴 역사를 통해 한국에서도 수없이 회자되어 왔지만, 정작 한국에서 손자병법 해석본이 출판된 건 흔치 않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매우 많은 해석본이 나왔다고 하는데, 한국에 비해 다양하고도 복잡한 전쟁을 치뤄온 그들의 역사가 더욱 치열한 재해석을 낳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광팬인 멤버조차도 2025년판 임용한 박사 번역본은 원문 해석에 충실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원문을 힘들게 읽었다는 그는 의역에 힘쓰고, 한자 원문을 아예 수록하지 않다보니, 원문의 좋은 점을 살리지 못한 부분도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야 원문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아니 원문을 읽다가 지루함에 중단해 버렸으니, 오히려 이러한 해석본에 감사해야 하지만, 저자의 광팬이자, 한 구절 정도는 마음에 새기며 인용하길 즐기는 멤버조차도 아쉬워할 정도로 확실히 원문의 깊이와 오묘함은 대단한 모양이다.
오히려 내게 아쉬운 부분은 따로 있었다. 전쟁사만 다루어도 사례가 차고 넘치고 의미 있는 얘기를 끝없이 할 수 있는 손자병법을 다루며, 기업경영은 굳이 이어 붙이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책을 읽는 내내 쫓아다녔다. 손자병법의 극의가 경영현실에도 적용되는 것을 통감한 저자의 마음은 알겠으나, 전쟁 이야기라도 충분히 재미있음
대중서라지만 400쪽이 넘는 역사책을 읽고 나니, 선명하게 보이는 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당시 손무는 정말 자기 능력을 알아줄 사람을 절실하게 찾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에 걸맞게 적절한 체험판 팸플릿을 잘 만들어냈다는 점. 이는 책에서 임용한 박사도 설명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더 선명하게 보인 건, 그렇게 자기 세일즈에 나설 만큼 절박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 엄청난 스케일의 생각을 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후반부 제12편 화공과 제13편 용간에서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는데, 화공은 요즘 기준으로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이야기이고, 용간은 정보전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기술 진보나 시대변화에 상관없이 전쟁사에서 통용될 수 있는 원리라 해석할 수 있다. 시대를 얼마나 앞서간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의사인 멤버는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하나 골랐다. 본문 189쪽을 보면 "예전에 전쟁을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승부를 쉽게 이길 수 있게 만들어놓고 이기는 자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의사로서 강의를 할 때, 환자가 큰 탈이 나서 시술이나 수술이 필요 없도록 미리미리 조언하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명의라고 꼭 언급한다고 소개했다.
건강에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요즘 깊게 공감되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엄청난 활약을 했음에도 드라마틱한 전투 승리보다는 미리미리 손을 쓰는 계책으로 손쉽게 승리를 가져온 탓에 삼국지에 존재감 제로인 전예가 떠오르게 하는 그런 이야기였고, 구절이었다.
주석을 따로 달 정도로 손자병법 좋아했던 조조, 그가 매료된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원문 자체의 탁월함도 있었겠지만, 동시다발적인 여러 전장에서의 전투 수행에 장수들을 믿고 병사들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던 조조에게는 독립부대 운용의 가이드라인으로 유용한 건 아니었을까? 실제로 삼국지 초반부 엄청난 시련과 경쟁자들을 모두 이겨내고 결국 승전으로 패업을 이룬 조조는 임기응변에도 능했지만 상황인식은 정확했고, 늘 옳은 방향으로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곤 했다.
반면 제갈량에게는 그리 유용한 책은 아니었을 것 같다. 법가 사상의 화신과도 같은 제갈량에게는 1 다음은 2 그리고 3 다음은 4로 진행되는 빡빡한 매뉴얼과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빠릿빠릿한 장수들이 필요했지만, 그 장수들에게 재량을 많이 주거나 변칙을 꾀할 여유는 없었다.
많이 불리한 상황을 한 방에 뒤집는 묘수 따위는 전장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상대가 사마의 같은 참을성 있고 똑똑한 명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손자병법의 극의와도 통하는 평범한 교훈을 제갈량은 기나긴 북벌과정에서 몸소 보여줬다. 그렇기에 병법서는 아니지만 삼국지 또한 시대를 초월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손자병법 이야기를 하다가 유쾌한 삼국지 이야기를 하면서 독서모임은 끝이 났다. 독서모임 책에 허덕댈 정도로 뭔가 나사가 풀려있었던 최근 일상에서 두꺼운 역사 대중서를 완독하고 리뷰한 건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제 다시 새로운 공부의 시작이 목전에 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올 올여름, 미리 대처한다는 손자병법의 평범한 교훈을 내 삶에서도 꼭 체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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