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두 가지 눈에 띄는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우선 톱배우 하정우의 감독 데뷔작이고, 유명한 (중국)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원작으로 했다.
첫 번째 포인트는 자연스럽게 화려한 조연 캐스팅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장르가 코믹 가족드라마이다 보니, 출연한 많은 배우들이 유독 사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울고 웃는 장면 장면을 매우 강조하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영화 자체도 커다란 가족모임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정우-하지원을 필두로 많은 조연 배우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게 이 영화 큰 장점이자, 재미이다.
영화에 출연한 수많은 조연들이 한 화면에 잡히진 않았지만, 꽤나 많은 명배우들을 한 컷에 볼 수 있고,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시작된 결혼의 한 장면이었기에 꽤나 기억에 남는 결혼사진. 이 결혼을 성사시켜준 것으로 역할을 다하고 허삼관의 장인 역 이경영은 퇴장하지만, 나머지 배우들은 각자 역할에서 열연하며, 줄거리를 이끌어가는데 한 몫 한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큰 역할은 아니지만, '매혈'을 주인공 허삼관의 인생에 자리잡게 해준 은인(?)으로 등장한 김영애는 반가웠다. 아직은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또 한 명의 명배우, 때로는 매서운 인상에... 때로는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로 등장하는 김영애는 익숙한 얼굴이면서도 역할에 따라 정말 이미지가 달라지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제는 새로운 작품에서 만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마도 하정우 감독 데뷔작에 친분 때문에 우정출연을 한 듯 한데, 하정우의 넓은 인맥이 남긴 작지 않은 유산이라 하겠다.
매혈을 해봐야 사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에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구애작전에 필요한 돈을 구할 겸 도전한 매혈... 계획대로 큰 돈을 거머쥔 삼관은 그대로 그야말로 노빠꾸 직진하여 옥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당연히 실패하자, 옥란의 아버지를 찾아가 그야말로 희대의 협상가 같은 달변으로 미래 장인어른 마음을 한 방에 돌려놓는다. 즉석에서 삼관을 사위로 결정되는 과정에 당연히 옥란의 뜻 같은 건 반영되지 않고, 약간의 거짓과 MSG 등이 뒤섞인 진심어린 스토리도 하정우의 연기력에 그냥 통과된다.
오히려 이 결혼보다 더 영화의 중간, 그리고 결말에서 방점을 찍으며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건 바로 매혈이다. 사실 실제로 그 시절 이 정도로 매혈이 횡횡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기준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학 시절, 그 철 없던 시절에 대학 동기들과 찾은 야구장 앞, 헌혈버스에서는 헌혈을 하면 야구표를 준다는 훌륭한 마케팅 전략이 펼쳐지고 있었고, 별 고민 없이 우리는 팔을 걷어부쳤다. 팔에 지혈밴드 하나씩을 붙이고 본 그날 야구는 딱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동기들과 야구장을 찾은 몇 안되는 기억인데... 그게 매혈이라면 매혈이었을까.. 이제는 야구 티켓 값이 굉장히 오른 지라, 아마 헌혈 1회 기념품으로는 택도 없지 않을까 싶은데... 참고로 그 때 함께 헌혈을 했던 동기들 중에는 여자도 있었고, 그 친구는 지금 의사가 되었다.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지만,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아마 20대 초반 했던 그 헌혈이 그 친구가 했던 마지막 헌혈은 아니었을까?
티켓 한 장을 위해 헌혈을 했던 나와 달리 삼관은 결혼을 위해, 아들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그리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매혈을 하며, 인생에서 중요한 걸 찾아가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그 때마다 매혈을 한다. 원작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시대배경을 잘 살리면서도 씁슬하지만 해학을 주는 대단한 소설로 알고 있다. 한국판 삼관의 매혈은 원작만큼 그 시대배경을 절묘하게 살렸다 하기는 어렵겠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 경고 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실제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적어도 10번이 넘는 매혈을 하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병원비를 모으는 삼관의 모습에서 보이는 건 아마도, 흔히 볼 수 있지만, 그 깊이를 감히 짐작하기는 힘든 부모의 심정이자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참 어린 나이에 데뷔했지만, 워낙 오랜 기간 활동했기에 이제는 원숙미가 먼저 다가오는 하지원. 하지만, 한껏 콧대를 세우고, 눈웃음을 치면서,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내들 사이를 지나가는 모습 만으로도 명불허전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리게 했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는 아직 30대 중반이었기에, 정말 적정한 캐스팅 연령이었지만, 아들을 위해 모욕스러운 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또 아들을 위해 눈물로 다른 집으로 보내는 이별을 택하는 모습에서는, 역시 하지원은 나이를 먹어도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이 느껴져서 좋은 영화였다. 아 물론 그 옆에서 하지원에게 심통을 부리는 하정우도 공감은 되면서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던 걸 보면, 그 또한 밀리지 않는 명배우임은 분명하다.
아주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지도 못했고, 원작을 읽지 않았어도 전개와 결말이 짐작될 정도로 뻔하게 흘러가고, 무엇보다 러닝타임 124분이나 되는 제작비 300억원 초과의 시대물이기에.. 흥행은 대실패했고, 하정우의 감독 데뷔는 이제 사람들 기억에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는 김영애의 연기와 윤은혜의 변신에 가까운 다른 모습, 그리고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성동일의 감초 역할을 볼 수 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이보다는 훌륭한 많은 배우들이 다같이 하정우 데뷔작에 얼굴을 비춘, 뭔가 잔치 같은 느낌이 더 기억에 남는다. 심지어 이야기 자체도 하정우가 세 아들의 진정한 아버지로 자리잡는 게 핵심이니, 정말 잔치할 만 하지 않은가. 너무나 올드하고 클래식한 이야기지만, 명배우들의 잔치판이 궁금하다면 한 번 슬쩍 들여다보시길... 소문날만큼 큰 잔치도 아니지만, 실망할 만큼 박절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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