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편의점의 양면성,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의 양면성
이제는 한적한 시골 마을을 가도, 대로변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편의점’
목 좋은 곳에서, 24시간 불을 켜고, 언제든 들어가면 친절하게 날 맞아주는 곳. 하지만, 수많은 자영업자를 울리는 악덕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비난받기도 하고, 때로는 비행청소년이나 취객들의 범죄 대상이 되는 곳.
이렇게 소설의 공간 자체가 양면적인 것처럼, 공간의 등장인물들도 양면적이다. 그리고 그 양면성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염여사는 세상 걱정 없을 것 같은 퇴직교사 겸 편의점 사장인데, 폭탄급 문제아 아들이 있다. 독고씨는 구제불능 노숙자였는데, 불과 한달만에 건실한 편의점 야간알바가 된다. 든든한 알바 시현은 공무원시험을 향해 착실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공무원 일도 커다란 편의점 같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 모든 양면성을 도란도란 듣다 보니, 문득 이 따뜻한 양면적 이야기가 내게 위안이 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주면, 내가 그 사람을 돕고 있구나 하면서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진다던가... 독자인 나도, 자기만의 상처를 가진 이 편의점 사람들과 단골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마치 이 사람들 얘기를 들어준 덕분에 내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2.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유대감, 그리고 각자의 사연
작가는 이야기한다. 어떤 작은 공간이든 그 곳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만의 사연이 있다고, 그리고 그 공간에서 어떤 새로운 스토리가 쓰여질지는 예단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각자의 사연에도 불구하고, 사장님과 알바들은 모두 유대감을 공유한다. 그리고 서로 말로 하지 않아도, 우리 사장님은 알바들 생계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우리 알바들은 이 편의점이 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 성실히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유대감, 그리고 이심전심이 있기에 각자의 사연이 명품 비빔밥 속의 반찬처럼 각자 맛을 낸다. 어떤 면에서는 혀를 차게 되다가도, 다음 순간 내 이야기 같다고 공감하게 되는 아픈 사연들. 그런 사연에 서서히 빠져들게 될 때 쯤, 그 사연과 곤란함을 하나하나 해결해주는 슈퍼히어로가 나타난다.
3. 상처받은 슈퍼히어로 독고씨
결국 독고씨는 슈퍼히어로였다. 불행한 과거를 가졌고, 그 때문에 알코올성 치매에 숨어 기억을 잊어버린 한 노숙자는 편의점 사장이 준 애정과 기회 속에서 서서히 그 능력을 드러낸다.
대학생 알바가 본인도 모르던 능력을 대번에 눈치채고, 유튜브 데뷔를 통해 그가 바라던 정직원의 꿈을 이루도록 조언하고, 진상짓을 일삼던 남자손님을 단번에 제압하고, 무엇보다도 사장님을 공격하던 비행청소년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훈계하는 그는 진정 슈퍼히어로다.
이쯤 되면 이 상처받은 히어로의 과거가 엄청 궁금해지는데, 본인도 잃어버린 과거는 그렇게 무심히 이야기 후반부에 되살아난 기억으로 그에게 돌아온다. 실력있는 의사였던 그는, 이야기 마지막에 보통사람에게 너무나 어려운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현장에 뛰어드는 선택을 함으로서 본인이 편의점 사람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히어로임을 증명한다.
정말 현실에 드물지만, 모든 사람이 간절히 나타나길 바라는 자가 슈퍼히어로라면, 의사로서 자신의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그가 정말 슈퍼히어로다.
4. 먼저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어떨까?
하지만, 결국 작가가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독고씨의 과거가 아니다. 슬쩍슬쩍 비춰지는 독고씨의 여러 능력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가장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자,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권하는 솔루션이 아닐까 하는데... 바로 상대방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 실망스러운 수준인데, 공격성향이 아주 높은 선숙씨도, 나름 스트레스관리를 잘해온 힘겨운 40대 가장 경만씨도... 가족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독고씨가 권하는 대로 그저 들어주자, 모두 거짓말처럼 나아진다. 애써 공감하려 하지 않아도, 묵묵히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좀 더 상황은 나아질 수 있다. 진정한 경청은 참으로 쉽지만 어려운 것인데,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단절하고 사는 것보다는 한 번 정도 경청해보는게 훨씬 쉽다는게 작가의 말이다.
세상을 편법과 위법을 넘나들며 살아온 민식조차도, 우연찮게, 아니 불순한 의도로 만든 염여사와의 술자리에서 결국 출발이 어찌되었든 서로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더니, 결국 가족은 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미소짓는다.
이러한 단순한 메시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하고 만들어내는 걸 보면, 독고씨는 슈퍼히어로인 동시에, 선생님을 의심하는 불량학생을 끝까지 교화시키는 참스승이기도 하다.
4. ‘사이다’가 아니라 ‘옥수수수염차’
많은 사람들이 ‘사이다’를 외치는 세상이다. 답답하고도 복잡한 세상.. 출산율 급락에서 볼수 있듯이 한국사회 전망은 너무나 어둡고... 어떤 이야기이던 답답하게 전개되면, 독자는, 시청자는, 댓글은, 리뷰는 모두 사이다를 갈망한다. 하지만, 우리의 슈퍼히어로 독고씨는 무심하게 계속해서 ‘옥수수수염차’를 권한다.
이 옥수수수염차 권유는 끈질겨서, 독자들에게 고구마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종이컵에 얼음과 함께 담겨있으면 살짝 양주로 보이기에 더더욱 경만씨나 선숙씨가 반복적으로 거절할 때 답답함은 심해진다.
그런데 독고씨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옥수수수염차를 권한다. 결국 독고씨의 처방을 받아들이는 경만씨와 선숙씨를 보면,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편안함과 개운함을 보면, 어쩌면 지금 한국사회를 힘들게 살아내고 있는 나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도 한 방에 체증을 풀어주는 사이다보다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옥수수수염차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외양이 양주로 위장하고 있고, 강한 탄산도 없어도, 그렇기에 몸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도 천천히 몸을 다스릴 수 있지 않겠는가. 독고씨가 염여사와 편의점 사람들 도움으로 서서히 술독에서 빠져나와 슈퍼히어로 면모를 갖춰간 걸 보면 말이다.
5. 오늘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참참참’말고 ‘옥수수수염차’를 사야겠다.
현 세태에 맞추어 재밌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작가는, 이제 아재인 내가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도 촘촘히 진열을 해줬는데, 단연 마음에 들은 건 신조어 ‘참참참’이었다. 참이슬, 참깨라면, 참치김밥이라니 혼술을 위한 훌륭한 조합임과 동시에 그 기발한 네이밍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 퇴근길에 참참참 보다는 옥수수수염차를 사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오늘 하루 혼술이나 술자리를 피해보자는 건 아니다.
당연하고 쉬워보이지만, 그래도 그 당연한 금주를 넘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날 위해 뭔가 위로가 필요하다면, 매운맛 혹은 극약처방보다는 순한 맛의 긍정에너지로 된 뭔가가 더 좋겠다라는 그런 생각 때문이다
종이컵에 얼음을 넣어 옥수수수염차를 한 잔 마시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던 내 가족, 친구, 동료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 더 맑아진 정신으로 용기를 낸다면, 하루하루의 노력이 그저 버텨냄이 아니라 행복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집 앞 편의점에 옥수수수염차가 원플러스원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미소지으면서 이 모든 작은 변화를 일으켜준 작가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해야지. 감사합니다. 김호연 작가님.
이 글은 '2022 진천의 책 전국 글쓰기 공모전' 에서 우수상을 받았던 독후감입니다.
'생각 과잉 - 단순한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53 - 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2023, 크리스 밀러) (5) | 2025.01.16 |
---|---|
독서52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2016, 김수현) (2) | 2025.01.15 |
독서50 - 로마인 이야기(2007, 시오노 나나미) (8) | 2025.01.13 |
독서49 - 알로하, 나의 엄마들(2020, 이금이) (12) | 2025.01.12 |
독서48 -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2024, 수바드라 바스) (2) | 2025.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