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번역? 원제 'UNCIVILISIZED'
이쯤 되면 번역자의 초월번역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원제목 uncivilisized를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으로 번역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어울리지 않은 번역인 것 같은데, 일단 작가가 의도한, 과연 누가 문명화되었고, 누가 문명화되지 못했는가?라는 비판의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희석되는 번역이고, 번역자가 프레임이라고 칭한 과학, 교육, 문자, 법... 등등도 전부 프레임이라고 정의(혹은 구분) 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제시한 여러 신념 혹은 도구들이 세계를 움직인 것인지, 아니면 세계가 움직인 결과인지도 불분명하다. 여러 면에서 무리한 번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왜 전문지식을 갖춘 번역자는 이러한 문구를 택했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이러한 신념 혹은 도구들이 우리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 독자들의 반향을 일으키기 위한 흥행용 제목일 수도 있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저자, 수마드라 바스
열 가지 키워드를 각각의 챕터로 나누어 풍부한 사례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수마드라 바스의 가장 큰 장점은 박학다식함이 아닐까? 총 10개의 사회문화적 제도 혹은 개념이 어떻게 서구 중심으로 왜곡되어 있는지를 동서양과 고대와 현대까지를 넘나드는 예시로 풀어내는 힘은 그야말로 대단했고, 단순히 역사뿐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넘나들면서, 끝나지 않는 옛날이야기 혹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역사를 좋아하는 아저씨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 다지 새로울 것은 없었던 내러티브
멤버 중 한 명은 불만에 가득찬 좌파가 쓴 진부한 이야기라며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그 정도 비난은 마음에 없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사실 저자가 한 주장 자체가 참신하거나 예상을 벗어난 건 없었다. 물론 저자가 딱히 좌파라는 느낌은 없었다. 사실 우파나 좌파나 아무리 넓은 범위로 보더라도 좀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한다는 부분은 같은 것이고, 저자는 자신이 평생을 걸쳐 공부해 온 역사 분야에서 유럽의 통념과 너무나도 다른 사실을 많이 발견하고, 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스스로 정립한 것 같다. 과학에서 공동선에 이르는 열 가지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명이 아니며, 편견과 왜곡으로 얼룩진 것이라는 것을 지적했다고 해서 좌파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현실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지배층과 가진 자의 과오를 어떻게 청산해갈 것인지도 전혀 언급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결국 저자가 하고픈 말은 흔히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서구 중심주의에 의심을 품은 흔한 인문학자의 마인드에 가까웠고, 조목조목 배어있는 편견과 부당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지만, 기본적으로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서평 들을 읽다 보니, 저자의 첫 책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젊은 인문학자는 앞으로 더 할 말이 많을 것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세부적이고 구제적인 분야로 울리도록 집중해 나가겠지만, 아직은 다 마음에 안 들어, 다 잘못된 것이야 라고 부르짖는 느낌이라 커다란 충격을 받거나 영감을 얻을 수는 없었다. 책 자체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수많은 서평과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온 걸 보면, 나처럼 배배 틀린 아재들 빼고는 다들 깊이 있고, 신선한 관점의 책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라, 스스로도 조금은 신기했다.
과학사/과학철학사 연구자가 좀비 관련 연구결과 인용이라니?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이 멋진 말은 영어 원제로는 'Death is the great equalizer'이고 이 챕터에서 작가는 좀비가 출현했다는 기록과 연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장황하게 인용하며 설명한다. 챕터 소단원 말미에서 아마도 좀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며,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챕터 간 밸런스는 많이 무너진 후였고, 책 전체의 맥락을 흐리는 느낌까지 주었다.
의사인 멤버는 이 부분에서 책과 저자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표현했는데.... 역사를 직업으로 공부한 분이 어떤 사료를 접했을 때, 최소한의 합리성 혹은 과학적 근거로 인정받을 수 없다면, 그 부분은 과감하게 들어내버리는 게 맞지 않을까. 과학적 근거 혹은 개연성이 전혀 없는 기록을 실컷 이야기한 후,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짤막하게 덧붙이는 것은 신박하지만, 직업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분의 올바른 태도는 아닌 것 같다. 본인이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면, 그 사료는 과감하게 버려야지. 이렇게 늘어놓듯 설명하면, 이 건 그저 찾아낸 자료를 아까워하는, 아직은 아마추어 같은 느낌을 줄 뿐이다.
다음 책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이 넓은 범위를 다 둘러보고 있고, 이야기거리를 쌓아두고 있는 저자는 분명 이야기꾼이기에, 좀 더 세부적으로 깊게 파고들 다음 저작이 기대된다. 뛰어난 에세이에 가까운, 이 책처럼 포괄적인 범위를 다시 다루기엔 어렵게 보이고, 정말 역사학자답게 아주 세부적인 이야기를 준비하면, 오히려 더 명작이 나오지 않을까?
비상계엄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12월말, 민주주의는 장기적으로 기대할만한 제도인지에 대해 멤버들도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최악이 아닌 차악을 고르는 것이라는 현답이 바로 도출되었다. 그 외 다른 주제도 박학다식 작가는 할 말이 천장까지 쌓여있을 것이기에, 좀 더 전문가다운 학자로서의 면모를 더 강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생각과 성향을 풀어낼 다음 책이 더 기대된다. 각각의 챕터를 각각의 한 권의 책으로 펼쳐낼 수만 있다면, 정말 훌륭한 서구 중심주의 비판론자의 인문학 판 '아라비안 나이트'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번뜩이는 재기 발랄함이 주제에 집중되면 얼마나 '재미'와 '깊이'를 모두 잡아낼 수 있는지 기대해 보는 것만으로도, 맹비난당한 이 책을 읽었던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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