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MAC 06. 그래! 결심했어, 인생 극장이 따로 없네 – 리막의 초창기 (2)
어렸을 때 매주 일요일 저녁은 “일요일 일요일 밤에” 덕분에 배꼽 잡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밤”은 다음날 학교 가야되는 저의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 주는 재미난 프로그램이기도 했죠. 그 중에 제일 좋아했던 것은 바로 TV 인생극장 “그래! 결심했어!” 였습니다. 이휘재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되는 다급한 상황이 바로 이 코너의 핵심이자 클라이막스였죠. 물론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내가 이휘재라면 시나리오 A 와 B 중 어떤 선택을 했을까… 형제들과 이게 맞네, 저게 맞네 하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었던 즐거운 추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만 했던 순간이 있으셨나요? 저를 돌아보자면…두 번 정도 있었던 것 같네요...
수많은 기대감을 안고 아랍에미리트로 향했던 마테가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공식적이고 중요한 협상 자리에서, 사인 직전에 상대방의 말이 바뀐다면, 그누구도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요. 물론 다년간의 협상의 경험이 있었다면 시간을 끈다거나, 다른 제안을 추가로 해서 좀 더 좋은 결과로 만들어내는 묘수를 생각하겠지만, 세상 경험이라고는 그리 많지 않은 20대 초반의 마테에게 그 순간은 너무 가혹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랍에미리트 왕실측에서도 충분히 배짱을 부려 볼만도 했었겠지요. 아직 리막이 양산차도 나오지 않은 스타트업 인데다가 설립 초기라 체계가 부족한 회사이니, 일단 그들의 요구조건을 던져놓고 세밀한 부분을 조정해 나가면 상대방이 고개를 수그리고 들어올 것이라는 그들만의 전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아랍에미리트는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두바이라는 첨단 신도시를 건설하여 전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중동의 여러 강대국 사이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았죠. 이것은 그들이 가진 배짱과 협상 기술 덕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한국과 아랍에미리트 원전 협력 관련 과거의 비화들이 최근에 점차 공개되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뒤늦게 원전 수주전에 뛰어든 한국에 아랍에미리트가 수주를 허락하면서 원전 이외에도 한국의 군사협력까지 이끌어냈었다고 알려져서 큰 화제가 되었었죠.
잠시 아랍에미리트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1971년 영국에서 독립한 아랍에미리트는 당시엔 어업을 위주로 하는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풍부한 석유가 발견되면서 삽시간에 부국으로 발돋움합니다. 그러나 주위의 대부분 석유 부국이 그렇듯, 날로 고갈되어 가는 한정된 석유 자원이 결코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석유산업을 대체할 만한 미래 먹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아랍에미리트 정부의 강력한 의지는 점차 빛을 발해서 2020년도에는 자체 기술로 화성 탐사선 로켓까지 쏘아올렸고, 어엿한 전세계 5번째 화성 탐사국이 되었습니다. 정말 놀랍죠? 그런 의미에서 아랍에미리트의 왕실이 리막에게 회사를 자국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한 것도, 정부의 산업 유치 전략에 따른 것이라 풀이될 수도 있겠습니다.
여하튼 마테의 머릿 속에는 짧은 순간 오만 가지 고민이 스쳤을 법합니다. 돈이 먼저냐, 꿈이 먼저냐? 하지만 그는 상남자였습니다. 당시 마테의 최종 선택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고심 끝에 그는 아랍에미리트 왕실의 투자를 거절하고 크로아티아로 돌아오는 비행기 표를 끊습니다. 그가 이 엄청난 투자 제안을 거절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창업 때부터 어떻게 해서든 고향인 크로아티아에서 자동차 산업을 일구어보겠다는 큰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천재가 애국심까지 장착하다니…정말 개념 천재가 따로 없네요.
큰 제안을 거절하고 크로아티아로 귀국한 마테의 머리가 아주 복잡해졌습니다. 하늘이 내린 기회를 스스로 날린 셈이 되었으니 이제 아무리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게 된 것이구요. TV 인생 극장의 구성에 비추어보면, 그는 누구나 예상하는 편한 길을 뒤로 하고, 고난이 가득한 가시밭 길을 선택한 셈입니다. 당장 회사에 필요한 운영 비용이 부족했던 그가 그래도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보다, 장기적인 비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봤을 때, 마테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 같으면 당장 회사를 옮기겠다고 약속하고 투자를 받았을 텐데요. 하하.
그러나 오히려 그와 같은 힘든 결정이 훗날 미래를 위해 훨씬 더 좋은 선택이 되었음을 당시에는 마테뿐만 아니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을 것입니다. 큰 투자처를 잃은 뒤 이제 그는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만 했습니다.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갖은 후 그는 재빨리 또 다른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지금까지 차량 제작에만 매달리던 사업 구조를 다변화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직접적인 자동차 개발은 시간도 자본도 막대하게 소요되는 장기 프로젝트 이므로, 그는 일단 다른 자동차 회사들에게 그 동안 축적해온 전기 차량 관련 기술 및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부족한 자본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선진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인프라와 기술면에서 변방 국가인 크로아티아는 아무래도 글로벌 벤처 캐피털 투자사들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도 자동차 산업 불모지라 자동차 관련 엔지니어 및 우수 전문 인력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테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리막은 일단 다양한 배경 출신의 직원들을 선발하여 입사시키고 자동차에 대해 처음부터 새로 가르치는 전략을 취했다고 하네요. 참으로 대단한 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초부터 전부 새로 시작해야 하는 수고가 있었지만, 새로 합류한 직원들은 리막을 전기 자동차 분야에서 최고의 스포츠카 업체로 만들겠다는 야망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점차 기적적으로 성과를 내게 된 것이죠. 입사한 직원들에게 하나하나 기술을 가르치며 시작했지만, 직원들의 열정 덕분에 곧 차체, 파워트레인, 전자 시스템 등 모든 부분에서 독자적으로 차량 개발이 가능한 기술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24개의 특허를 출원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2011년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 차량을 출품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전기 수퍼카인 "컨셉원"으로서 일반 대중들에게 리막이라는 회사를 알릴 수 있었던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디자인과 디테일 면에서는 글로벌 완성 자동차 수준에는 못 미쳤지만, 창업한지 몇 년 되지 않은 회사가 내 놓은 이 새로운 모델은 압도적인 성능 때문에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자체 기술 개발에 매달렸지만, 오히려 이러한 노력이 오히려 회사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셈입니다. 리막의 기술력은 점차 고도화되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제조뿐만 아니라, 자동차, 자동차 부품, 선박, 항공 관련 산업 업체들에게 관련 솔루션 및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고, 2015년에는 회사 다변화를 위해서 고성능 전기 자전거를 제조 판매하는 그레이프를 창업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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