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과잉 - 단순한 기록

겪은 것과 믿는 것, 사실은 어느 쪽? -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이안 감독)

마셜 2024. 4. 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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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지금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 드리죠. 아마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은 동물들을 싣고 이민을 떠나는 도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배는 침몰한다. 혼자 살아남은 파이는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올라 타지만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 그리고 오랑우탄과 함께 표류하게 된다. 하지만 모두를 놀라게 만든 진짜 주인공은 바로 보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 배고픔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이 배에 남게 되는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거대하게 빛나는 고래 바다를 빛으로 물들인 해파리, 미어캣이 사는 신비의 섬까지, 파이와 리처드 파커 앞에 그 누구도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평점
8.3 (2013.01.01 개봉)
감독
이안
출연
수라즈 샤르마, 이르판 칸, 라프 스폴, 아딜 후세인, 타부, 제라르 드파르디외

 

1. 역시 이안 감독의 영화는 뭔가 다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안 감독을 알 것이다. 나도 이안 감독의 명성을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 봤던 '결혼피로연'이 아마도 처음으로 봤던 영화였던 것 같은데,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진 않았다. 어렸던 내게는 너무 지루했달까. 그 후로 '와호장룡'과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통해서,  색상을 참 잘 이용하고, 영상미가 뛰어난 감독이라는 정도 느낌만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이 번에 본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래서 이안 감독이 거장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원작소설도 보지 않았고, 영화를 보는 감흥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흔한 검색 한 번 해보지 않았기에, 영화의 줄거리를 전혀 모르고 감상하게 되었다. 덕분에 파이의 인물 설정이나 여정의 시작부터 집중할 수 있었고, 도대체 포스터에서 봤던 호랑이는 언제 튀어나올지 조마조마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흥미로운 주인공 캐릭터를 설정하고,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조성하면서도 다양한 생각할 거리와 멋진 영상을 만들어낸 이안 감독. 역시나 명작을 여럿 남긴 거장으로 평가받을만하다. 

 

 

2. 뛰어난 영상미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개봉 후 한참이 지나, 이제서야 감상하게 된 것은 절로 아쉽지 않지만, 영화를 상영관에서 보지 못하고, TV화면으로 본 것은 상당히 아쉽다. 아마 작은 화면으로 본 관객들 대부분이 그럴 텐데, 그만큼 화려한 색채와 영상미가 뛰어나다. 물론 CG를 활용한 것이 부분 부분 티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큰 스크린으로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앞서는 걸 보면, 모든 아쉬움을 뒤덮을 만큼 화려한 영상미는 대단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검색해서 찾을 수 있는 화려한 포스터와 스킬컷으로도 영화의 영상미를 표현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인데, 위 포스터를 통해 묘사되는 바다도 참으로 두렵고 막막하지만, 그와 동시에 형형색색 너무나 아름답다. 망망대해 바다 위 보트를 다양한 색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기 위해, 감독은 해파리, 날치, 고래, 상어 등을 모두 등장시키고, 밤에는 별이 수놓는 하늘인지 바다인지 묘한 몽롱함을 주며, 그야말로 이 세상을 떠다니는 배처럼 파이의 보트는 세상에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색을 보여준다. 

 비단 바다 뿐만 아니라, 중간에 만나는 미어캣의 섬이나, 별것 아닐듯한 보트의 색상까지도 모두 총 천연색 원색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끈다. 한참 전 기억이지만, '와호장룡'에서의 대나무숲이나,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들판과 풀숲도 모두 탁 트인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천연색이 인상적이었다. 15년이 넘는 간극이 존재하지만, 그의 장기는 여전하고, 무대를 달리하며 보여주는 자연의 색은 참 다채롭다. 

 

3. 당신이 겪은 것이 사실인가? 아니면 당신이 믿는 것이 사실인가?

 이안 감독의 화려한 색채에 대한 칭찬은 여기까지로 하고, 영화에서 주는 근본적 의문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튼튼한 원작에 기댄 바가 크겠지만, 화려한 영상미와 긴장감, 충분한 반전 등에 대해, 관객들에게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기에 이 영화는 진정한 명작이다.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았다. 

경험이 사실을 만드는가? 믿음이 사실을 만드는가?

 

 당연히 생명체인 인간이 경험한 것이 사실이다. 생각이 인간의 가장 큰 무기이기는 하나, 그로 인한 왜곡 가능성은 늘 상존하기에, 겪어봐야 안다는 평범한 격언은 진리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에 이 영화는 의문을 던진다. 영화에서 1시간 넘게 공들여 보여주는, 파이가 호랑이와 함께한 표류기는 과연 사실인가? 영화의 결말에서, 이를 믿지 못하는 영사관 직원에게 파이는 믿기 쉬운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각각의 동물을 사람으로 등치 시켜서, 이걸 믿던가 하고 툭 던지듯 말한다. 할 말을 잃은 영사관 직원 둘은 서로를 마주 보지만, 이내 쉬운 선택이 아님을 표정과 태도로 말한다. 

 그래서 뭐가 사실이야!!!! 라는 궁금증에 몸을 비틀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집중해 봤지만, 영화는 속 시원하게 뭐가 사실인지를 알려주진 않는다. 물론 기록된 것은 호랑이와 함께 표류였다는 걸 살짝 보여주지만, 더 이상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두 이야기 모두 믿기 어려운 일이며, 정작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답하지 않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잔상이 오래 남은 가운데,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경험이라는 게 제한적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난 지극히 제한적인 내 경험을 무조건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해 왔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사고방식은 옳은가? 아니면 내 믿음 혹은 신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게 살아가는 게 오히려 옳은 삶은 아닐까?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 파이가 겪은 고초는 신의 가호가 없으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표류 와중에 신을 향해 절규하는 파이의 모습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결국 모든 것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파이는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며, 그저 웃음과 함께 말한다. 어느 것을 믿을지 선택은 너의 몫이라고. 어찌 보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 내 앞에 하루하루 주어지는 시련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도 결국 내 몫일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저 내가 믿는 대로 하면 된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파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성현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호랑이가 등장하는 동물 버전과 어머니와 요리사가 등장하는 사람 버전 표류기가 모두 그럴 듯 하면서도 그럴듯하지 않기에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고, 그만큼 많은 재해석이 있을 수 있기에 참 좋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셨다면 한 번 묻고 싶다. 당신은 파이가 호랑이와 표류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요리사와 표리 했다고 생각하는가?

 

4. 종교를 더 고민하게 한 고마운 영화이지만, 뭔가 명확히 알 수는 없었다. 

 최근 들어 종교에 대해 고민을 할 계기가 여러 번 있었다. 고맙게도 여러 종교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내 삶에서, 스스로 아직 어떤 것이 내 종교이고, 내게 절대자는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기에 아직도 고민만 이어가고 있는 듯 하다. 

 (*내가 왜 다양한 종교 속에서 여전히 이리저리 걷고 있는 지를 언급하면, 너무 길어지므로... 이는 다른 포스팅으로 따로 정리하고자 한다.)

(삼도천으로 가는 배에 올라탄 듯한 리처드 파커, 보트는 그대로 저승으로 갈 것 같다)(출처: 네이버 영화)

 

 이 또한 내게 내려진 시련인지, 아니면 생각거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 이 영화는 내게 종교에 대한 고민을 살짝 더 확장시켜 주었다. 영화에서 파이는 특이하게도 힌두교, 천주교를 동시에 믿는다고 소개하는데, 유년기를 돌아보면, 이슬람교에 대한 경험까지도 더해진다. 하나만 골라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가족들의 조롱과 권유에도 파이는 꿋꿋하게 특정 종교를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특이한 행보는 내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이제는 종교의 지배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대사회라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소외는 심해지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믿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너무나 쉽게 남의 말을 검증하고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폰 시대에, 기적과 신성에 기반한 종교는 합리성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시대에 어느 종교가 진짜인가? 어느 종교가 내 것인가? 에 대해 늘 고민만 해왔던 내게, 이 영화는 그리고 파이는 담담하게 그냥 네가 믿는 것이 네 것이다라고 담담하게 말해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명확히 그게 무엇이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실마리를 찾았기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위대한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위대하다라는 엄청난 수사의 기준이 무엇이지도 말하기 부담스럽고, 주변에서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을 많이 듣지도 못했다. 

 다만, 둘이 함께 본다면, 둘이 받은 느낌이 완전히 다를 수 있기에 참 좋은 영화이고, 서로 얘기할 거리가 많은 영화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탄탄하기에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다. 

 찬란한 바다 색을 한 번 보고 싶으시다면, 바다에 별이 뜨는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싶으시다면, 꼭 2시간을 투자해 보시길. 여전한 이안 감독의 영상미와 만끽함과 동시에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시련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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