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화(Tabula rasa) 정책이란?
종교개혁이 있었던 16세기 유럽에서는 ‘통치자의 종교는 곧 인민의 종교’라는 원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통념이 일반적인 선교(정책)개념으로 확산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선교개념이 바로 '백지화(Tabula rasa) 정책이다. 유럽의 그리스도교를 그대로 옮겨 심을 수 있도록 현지의 토착문화와 전통을 말살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이 정책은, 스페인·포르투갈 주도로 이루어진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건설과 선교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회가 라틴아메리카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백지화 정책과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다. 스페인·포르투갈의 적극적 해외 식민지 건설을 해외선교 기회로 여겼던 것 또한 사실이며, 당연히 현지 말살 정책에 대한 책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원주민에 대한 박해가 지나치다며 문제제기를 한 것도 예수회 선교사들이었고, 결국 유럽의 식민지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직접적인 견제 ·박해를 받은 것도 예수회였다.
그렇다면 적응주의(adaptation)란 무엇인가?
적응주의란 예수회가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펼친 선교방식이자 선교이념으로서 일방적인 선포가 아닌 현지 생활문화를 먼저 이해하고, 나아가 문화적 감수성을 공유한 가운데 선교하는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 토착 문화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찾아내어 선교의 근거이자 수단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고, 부정적인 요소들은 정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동 양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큰 틀에서 보면, '백지화 정책'과 '적응주의'는 정-반-합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지화 정책의 폐해를 지켜보며, 선교방식에 대해서 많은 학습과 고민이 이루어졌고, 동아시아 특히 중국·일본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선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큰 박해나 희생 없이 빨리 깨닫고 새로운 선교방식이자 선교이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정책변화는 최초 예수회에 의한 것이었으나, 교황청 전체의 선교방식 변화를 추동하는 정도에 이르렀고, 그 결과 가톨릭이 동서양 문화교류에 큰 기여를 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참고자료: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김혜경, 서강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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