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6일에 포천에 있는 '태국군 참전 기념비'를 보고 왔다.
사실 어릴 때부터 자주 지나쳤던 곳이다. 포천에서 철원으로 가는 대로에 위치한 곳, 하지만 전모를 보려면 꽤 높아보이는 계단을 올라야 하는 곳, 늘 일상에 쫓기고, 참전 기념비에 뭐 대단히 볼 게 있을까 싶어 늘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다.
그 날도 사실 계획에 없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운전해서 가던 길... 시간에 여유가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문득 지금 아니면 언제와볼까 싶어, 차를 세웠다. 즉흥적으로 떠오른 발상이기에, 아버지도 "왜?"라고 반문하셨지만 잠깐 보고가자는 내 말에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위치는 경기도 포천시의 문암리에 위치해 있다. 위 문화대전이 일목요연하게 지역명소로서 참전 기념비를 잘 소개하고 있지만, '시'로 승격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포천'군'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은 매우 아쉽다. 암튼 일요일 오후 아무도 없는 그런 날씨 좋은 낮시간에 잠깐 걸어서 오른 참전비는 여러모로 괜찮은 기억을 남겨주었다.
대로변에서도 잘 보이는 안내문은 약간 투박해보이지만, 나름 유서 깊은 기념비 임을 잘 보여준다. 태국군이 철수한 후, 그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기에 안내목적에 충실한 것도 당연한 것이고, 주변 환경과 더불어 나이먹어가는 문화재로서 가치도 간결하게 잘 보여준다.
참전기념비를 검색하면 대표 사진처럼 나오는 탑 형태의 구조물이다. 생각보다 큰 크기에 만들어진 지 50년이 되었음에도 나름 세련된 멋이 있다. 하늘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옆에 태국군 참전 약사도 잘 설명되어 있기에 전체적으로 돌아볼만 하다는 느낌을 준다.
탑의 옆쪽 끝을 보면, 정말 옛날식 글씨체로 또박또박 '타일랜드군 참전기념비'라는 문구가 씌여 있다. 그 옆에 있는 동상형태도 이채롭지만, 1974년 당시에 '타일랜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도 나름 신기... 지금으로봐도 대규모인 대대급 외국군이 주둔했기에 그들의 발음 그대로 국가명을 표기해준 나름의 배려가 아니었을지...
기념비에 부속된 약사와 안내문 등이 태국어-한국어-영어 로 병기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6.25 당시 한국을 도우러 왔던 태국을 배려하는 차원이겠지만, 태국어를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1970년대 건축물은 아닐까 싶다.
잠시 '답사'같은 느낌을 주었던 사진 한 장.
참전 기념비가 있는 문암리는 바로 태국군이 1972년까지 철수할 때까지 주둔지였다고 한다. 잠깐 돌아보다 발견한 탁 트인 지점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 전쟁 당시에도 그리고 휴전 후에도 전략적 요충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포천시에서 북쪽인 운천에는 1970년대까지 꽤 큰 규모의 미군이 주둔했었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북한이 침공할 경우, 예상되는 침공루트가 운천을 통해 남하해서 포천-의정부로 진격하는 길이었고, 거길 어떻게든 틀어막아야했기에 직접 미군을 주둔시키는 강수를 두었던 것이리라.
거기에서 몇 km 뒤, 그 운천이 내려다보이고, 대로의 교통상황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언덕에 태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만약 적이 기습적으로 진격해오더라도 훤히 볼 수 있는 위치에 남겨놓은 예비대가 태국군인 셈, 전략적 요충지에 예비대로서 오랜기간 주둔했고, 무엇보다 전쟁기간 1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 것을 보면, 분명 태국군은 전투에 앞장섰던 참전군이었음이 분명해보인다.
(*안내문에는 1,296명이 전사했다고 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서는 100여명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태국이지만, 한국인에게 딱히 떠오르는 양국간의 큰 역사적 사건이나 이벤트는 없다. 하지만, 대대급 전투병력을 파병했던 태국의 기억은 다른 모양이다. 기념비 옆에 있는 안내문을 보면, 1994년에 태국 총리가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고, 검색에서도 태국인 관광객들이 의외로 자주 찾는다는 보도가 나온다. 학술DB를 검색해보니, 태국인 유학생이 이 참전에 대해 쓴 최근 학위 논문이 2건이나 있다. 흥미로운 내용에 자료는 다운로드 받았지만, 내용이 너무 길어지니... 논문 등 참전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미루려고 한다.
참전비 옆에는 작은 태국식 불교 사원 건물도 있다. 찍었던 사진 중 사원을 제대로 담은 게 없어서, 한국국제교류재단 사이트 보도로 대신한다.
(*재단 사이트에 소식 형태로 참전기념비가 소개된 것은 반가운 일이나, 아세안문화 소개 차원에서 명소로 다뤄진 것 치고는 내용이 좀 빈약해서 아쉽다. 어쨌든 기념비와 사원 전경을 다룬 사진만은 다른 어떤 보도보다도 훌륭하기에 링크를 달아본다.)
사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다 보니, 명소에 가면 사진을 막 찍어대는데,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이렇게 의외의 한두컷이 남기도 한다. 이 사진도 별 생각 없이 사원 앞에서 찍은 것 같은데, 맑은 하늘과 옆에서 본 기념비가 잘 보인다. 그리고 함께 가자는 듯한 민간인과 군인 동상과 기념비가 줄을 맞춘 듯 서 있어서 단정하면서도 정말 군인들을 기념하는 듯한 각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10분 조금 넘게 머무른 것에 불과하지만, 맑은 하늘과 생각보다 오래 주둔했고 전사자도 많았던 태국군 참전사를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6.25전쟁이지만, 아직도 태국은 한국 하면 떠올리는게 한류가 아닌 이 파병일지도 모른다. 그 복잡하고도 치열했던 전쟁에 대해 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두 논문을 통해서 다음 포스팅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너무나 맑았던 그 날 하늘을 떠올리며, 앞으로도 참전기념비가 한국-태국 우호 상징으로 기억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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