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년 - 전쟁 덕후

역사와 원작의 무게 - 남한산성(2017, 황동혁 감독)

마셜 2022. 8. 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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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기하다. 전쟁과 역사를 다룬 영화인데, '눈'과 '풍경'이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친구가 보내줬던 사진 한 장, 극심한 의견대립을 보이는 재상 두 명은 엄습해오는 절망감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참혹한 전쟁과 한심한 작태를 묘사하는 명연기에도 나는 이 장면과 영화에서 계속 나오는 눈 쌓인 풍경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 겨울이 조선을 전쟁에서 참패로 이끈 하나 요인이긴 했어도, 어찌되었든 모든 것이 조용한 엄동설한이 시작부터 이길 수 없었던, 오로지 끝을 향해 나아가는 한 달 이상의 고통의 시간이 쓸쓸한 겨울이었던 것 또한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가. 

 끝없이 대립했던 두 사람도 결국 서로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했고, 새로운 시작이 온다는 것도 담담하게 서로 이야기한다. 눈내리는 조선의 겨울, 손꼽히는 역사적 패배는 그렇게 쓸쓸한 겨울로 기록된다. 

 

2. 병자호란 - 조선이 스스로 '개전'하여, 스스로 '패배'한 전쟁

 정묘호란이 있은지 불과 9년, 그 결과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버텼던 조선은 또다른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직은 명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고, 만주지역의 패권을 장악해가는 수준이었지만, 결코 조선이 이길 수 없었던, 그래서 절대 전쟁을 하면 안되었던 상대 '청'

 그 청나라를 상대로 조선은 스스로 개전했다. 

 물론 그 전쟁에 이유는 있다. 재조지은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조공관계를 통한 중화 중심 유교적 세계관. 그리고 여진족에 대한 뿌리 깊은 오랑캐 천대의식, 고조되었던 군사적 긴장과 외교적 충돌. 그리고 중간에서 이 모든 사태를 악화시킨 명나라 군벌의 부스러기 모문룡

 하지만 어쨌든 조선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 청을 상대로 스스로 개전했고, 스스로 패배했다. 

 세상 모든 전쟁이 이길 것을 기대하고 일으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 외침이 기습적으로 혹은 예상치 못한 국면에서 있었던 것을 보면, 병자호란 자체는 한반도 역사에서 스스로 선택한 몇 안되는 전쟁인 셈이다. 그 패배 상처가 컸던 만큼이나  파국으로 치닫는 조선의 일련의 움직임도 한숨을 자아낸다. 

 

3. 수어사 이시백, 엄청난 무사가 되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의정까지 지낸 청빈한 문신인 명재상이 무쌍을 찍는 무사로 태어났다. 바로 배우 박휘순이 분한 수어사 이시백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위 영정과 크기만큼이나 차이 나는 수어사 이시백의 모습. 담백하게 한 문신의 일생을 요약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명재상이다 할 수 있겠는데... 역시 영화는 작가적 상상력이 필수.... 영화내내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진정한 무사는 사실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한 문신이었다. (*물론 지금 국방부장관인 병조판서도 역임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영화 속 이시백에 대한 몇 가지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군공을 세워,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 이시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수어사'를 맡고 있었다. 

 - 남한산성 전투에서 일정한 성과를 냈고, 패배도 경험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978 

 

이시백(李時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이기(李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화(李廷華)이다. 아버지는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로 증 참판

encykorea.aks.ac.kr

 

 어찌되었든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하고, 인조로부터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한다'라는 평까지 들었던 시호 충익(忠翼)에 빛나는 진정한 명재상은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한국영화에서 청나라 병사 수십도 혼자 상대할 수 있는 무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지 남한산성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던 재상에게는 그 또한 명예로운 변신이리라. 

 

4. 복받은 임금 '인조' - 죽어서라도 활로를 찾고자 하는 충신을 둘이나. 

 김상헌과 최명길은 영화 전반을 지탱한다. 이는 단순한 명배우의 혼이 담긴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 남한산성 안에서의 공허한 담론이 그나마 치열했던 것은 두 재상의 목숨을 건 호소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출처 : 네이버영화>

 그러고 보면 뭐하나 정통성, 정당성도 없이 어느날 왕이 되어,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무능한 왕 '인조'이지만, 이런 재상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는 복받은 임금이다. 남한산성에 갇혀 떨어지는 식량을 하루하루 헤아리면서, 탁상공론을 일삼았던 무능한 조정의 왕으로서, 가장 아쉬운 건 이 두 재상의 목숨을 건 호소 중 어느 것도 선택을 하지 않고 끝까지 모든 것을 미뤘다는 점이다.  결국 인조가 항복을 결심한 것도 강화도 함락을 접한 후.... 두 재상의 목숨을 건 호소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진정어린 건의와 호소도 리더가 결정을 위해 듣지 않는다면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다. 

 

 배우 김윤석과 이병헌도 영화 전반을 지탱한다. 이는 영화의 힘이 단순히 위대한 원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얼핏 지루할 수 있는 반복되는 언쟁을 선굵은 연기로 살려낸 명배우 둘에게 일정 정도 기대고 있음을 의미한다. 

 복받은 감독 황동혁, 김훈 원작 역사소설의 감독을 맡은 것 자체는 부담도 컸겠지만,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이는 명배우를 둘이나 거느리고 작품을 만든 그는 분명 복받은 감독이다. 물론 자신이 행운에만 기댄 감독이 아님을 차기작을 통해 스스로 글로벌하게 증명했다. 차기작이 궁금한 분은 바로 '오징어게임'을 향해... 

 

5. 중화사상과의 단절 - 단순한 조공체제가 아닌 종교의 변화, 곧 개종

 이길 수 없는 전쟁까지 감수하면서 버티려했던 당시 국제관계이자 사회체제인 '조공체제'는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그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 

 현실적인 이유로 항복할 수 밖에 없음을 설득하는 최명길에게 쏟아지는 비판은 모두 '오랑캐' 인식과 '재조지은' 등 시대착오적인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당장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는 것도 모자라, 한 달 후를 내다볼수 없을 정도로 식량이 부족함에도 죽을때까지 싸우자고 분연히 말하는 척화신을 보면 한숨이 나오다 못해 이해가 안될 지경인데...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병자호란을 되돌아보니... 당시 청에 대한 항복은 조선 지배층에게는 '개종'에 가까운 충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바쳐 익히고 발전시켜온 세계관이자 종교의식인 중화사상을 포기하고, 조공체제에 없었던 오랑캐를 섬겨야 하는 '항복'

 이는 단순한 정치/군사적 결단 정도가 아니라, 유교적 세계관과 조공체제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했던 조선 지배층에게는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과 같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덧붙인다 해도, 그 고집이 한심한 것에는 변함이 없고, 병자호란으로부터 200여년이 지나, 다시 척화비가 세워지고 세계변화에 저항하는 거센 움직임이 한반도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을 보면.... 

 이러한 거센 움직임의 기반이 진정한 '개종'에 버금가는 문화충격에 대한 저항인지, 아니면 인조가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살고자하는 지배층의 아집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이런 시대착오적 고집이 가져온 후폭풍을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6. 삼궤구고두례, 그리고 삼전도비

 동북아에서 중심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처음으로 타민족을 힘으로 복속시킨 '청', 항복의식을 두고도 고민이 많았다고 하는데, 결국 고전에서 찾아낸 사례에 의거, 조선 임금을 세번 무릎 꿇리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게 해서... 진정으로 모든 것을 잃게 한다. 

 당시 조선왕실이 패전을 자초했던 어쨌던 간에 한반도 역사에 유래가 없는 굴욕적 역사인 것만은 사실. 

 그리고, 그 후 영정조 시절까지도 열심히 멸망한 명나라에 몰래 제사를 지내는 조선민족의 특이한 고집을 알았는지.. 항복사실을 새긴 비석을 세워 영원히 남기고자 했는데, 그 유명한 '삼전도비'가 바로 그 기록이다. 

https://www.songpa.go.kr/culture/contents.do?key=3854& 

 

서울 삼전도비 - 문화관광

송파구 문화관광 - 서울 삼전도비 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ww.songpa.go.kr

 송파구에서 추천하는 유적지이기도 하고, 실제로 석촌호수공원에 붙어있어서 잠깐 들려보기도 괜찮다. 

 호란 직후로 돌아가보면, 위치 자체가 청나라 입장에서는 절묘한 것이, 언제든 사신을 보내 둘러보기에 멀지 않고, 특히나 조선 최고 군사요새 남한산성에서 가까워서, 실제로 삼전도비를 방문한 청 사신들은 남한산성을 들먹이면서 조선대신들을 애먹이곤 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잠실 여러 아파트에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지만, 멀리 남한산성이 보일 것도 같은 거리, 조선의 진정한 흑역사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잠시 석촌호수 근처를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특히 신기한 만주어를 비석형태로 볼수도 있다. 

 

7. 실제로 패전은 피할 수 없었는가?

  -진짜 근왕병은 비겁했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집 떠나 개고생하는 대장장이 서날쇠... 어느 대신보다도 현실을 꿰뚫고 있었던, 그래서 끝까지 벼슬아치를 믿지 않고, 그 덕분에 기어이 살아남는 그는 힘겹게 근처까지 온 근왕병 부대에 도착하지만, 그들은 서날쇠를.. 그리고 남한산성의 임금의 기대를 저버린다. 복명하지 않은 책임을 피하고자 전령을 죽이고자 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근왕병 지휘관들..

 이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실제로 관객들의 안타까움을 배가시키는 것에 큰 역할을 했지만, 실제로 역사적 사실과 가장 다른 부분이다. 오히려 제대로 된 전령을 받지 못한 채, 모여든 지방군들이 산발적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419031021 

 

[서울광장] 재평가 필요한 병자호란 승전 박의·유림/서동철 논설위원

여전한 중국 중심 조선 세계관에 묻힌 이들의 승전 부각시켜야 아픈 역사 되풀이하지 않고 동등한 한중 관계 만들 수 있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란(戰亂)의 역사를 읽다 보면 문득 궁

www.seoul.co.kr

 물론 그 산발적 승전이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고, 그 모든 승전을 상쇄하고도 남을 큰 패배도 있었으니.. 그 승전 효과를 논할 것은 못된다. 어느 정도 과장된 기록이라지만, 쌍령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부분부분 믿겨지지 않을 정도 수준인데.. 그래서인지 기사화된 기고조차 드물다. 

 

http://www.ns-times.com/news/view.php?bIdx=3159 

 

우리나라의 3대 패전 - 한국역사문화신문

우리나라의 3대 패전몽골패전, 칠천량패전, 삼전도굴욕 세 가지이다. 역사에서 우리나라 전체를 유린당한 전쟁은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

www.ns-times.com

 어쨌든 나름 용감하게 진격해왔던 근왕병에게 할 수 있는 최고 칭찬은 이것 뿐이다. 

 '그들은 비겁하지 않았다'

 

 - 강화도가 함락되지 않았다면, 남한산성은 더 버틸 수 있었을까?

 본인을 폐위시키거나, 심양으로 압송시키지 않을까 겁에 질려있었던 인조가 강화도가 온존되었다고 해도, 남한산성이 무너져 목숨이 위태로울 때까지 저항했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그는 남한산성에서의 지난한 하루하루를 결정을 미루며, 본인 왕위를 우선하며 살아낸 것 뿐인데,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오히려 강화도 함락이 짧게 해주었다는게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분석일 것이다. 

 

 - 결국 패배로 이어진 '예비대'의 부재

 지금도 머리 속을 맴도는 '이괄의 난'으로부터 이어지는 평안도 방위체제의 붕괴... 그리고 그 후로 호란을 겪기까지 전혀 재건하지 못한 기동 예비부대.. 예비대 육성은 커녕 최전방 방어기지조차도 반정으로 정권을 잡자마자 반란을 겪은 인조의 예민한 감시와 열악한 지원에 제대로 된 훈련 한 번 못해본게 당시 현실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4439759#home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사찰 때문에 군사훈련조차 못해 참패한 남이흥 장군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장렬히 전사했던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흥 장군의 영정(의령 남씨 충장공파 대종중 소장). 1627년(인조 5) 1월 21일 새벽, 청천강을 건넌 후금 군대는 안주성(安州城)을

www.joongang.co.kr

 한명기 교수 주장처럼, 모든 훈련부족이 기찰보다는 열악한 지원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뻔히 예상되는 청군의 진격로, 그것도 한 번 뚫렸던 길에 변변한 예비대를 배치못했던 것이 조선 군사력 현실이었다. 

 여차하면 왕실이 도망갈 수 있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에만 전력을 집중시킨 것이 너무나 수세적인 전략이었는지..... 근처에서 거둔 세금으로 그나마 병력을 유지하고 군량을 비축할 수 있던 두 곳과는 달리 평안도 지역은 몇 천 이상의 병력을 배치하기엔 너무나 척박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괄의 난'을 겪은 왕실의 알레르기적 기찰 탓인지... 또는 세 가지 모두 해당되는지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어찌되었던 결론은 같다. 병자호란 패배를 피할수 있었던 길은 단 하나, 평안도를 통한 청군 진격로에 기동 예비대가 있어 진격을 늦추고... 그 사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군량을 비축하고 방어를 튼튼히 하는 길 뿐이었다. 이조차도 패하지 않는 방법이지. 애초에 승리는 요원했다고 봐야한다. 

 

8. 소설 원작에 비해 떨어지는 영화장면 (+) 소설 원작을 넘어선 영화장면

 소설 남한산성을 명작으로 추앙하는 내게 이 영화는 소설과  비교가 필연적이다. 

 - 소설 원작에 비해 떨어지는 영화장면

 인조의 한 마디 "그럼 경들에게 물으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꼭 읽어보시라. 

 

 - 소설 원작을 넘어선 영화장면

 나루의 한 마디 "소녀가 먹겠사옵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꼭 보시라. 

 

<출처 : 네이버 영화>

 작가 김훈의 위대한 창작임이 분명한 '나루'는 이 처참한 47일간의 역사도 결국 사람사는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하루하루 목숨을 내놓은 기분으로 살았을 김상헌이 유일하게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법도 한 어린 아이. 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문체로도 이런 인물서사를 만들어낸 김훈 작가는 진정 위대하다. 

 

9. 손익분기점 - 384만명 / 500만명

 흥행은 대실패했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난 건 아니다. 

 역사상 손꼽히는 굴욕적 패배를 사실적으로 영화화했는데... 500만 관객을 넘겨야 한다는 건 무리다. 

 즉, 애초에 흥행 실패가 아니라, '과다 지출로 인한 손익분기점 달성 실패'가 맞는 표현은 아닐까?

 

 해외에서 반응도 좋았다고 하는데... 황감독의 차기작이 발표된 후 개봉했다면, 더 성과가 좋았을지도...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449898 

 

뒷심 부족했던 '남한산성', 해외에서는 승승장구

올 추석 연휴 개봉해 아쉬운 흥행 성적을 낸 '남한산성'이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앞서 미국, 일본, 프랑스, 대만, 싱가포르 등 해외 28개국에 판매된 영화는 순차적으로 해외 개봉 중이

news.sbs.co.kr

 

10. 순위

 제작비를 과소비했을 뿐, 나름 많은 관객에게 호평받았던 좋은 영화이지만, 그래도 혁신적이었던 '최종병기, 활'을 넘어서는 것은 힘에 부친다. 

 

  1위 : '최종병기, 활', 8.0

 

  2위 : '용의자' /  '남한산성', 7.5

  3위 : '안시성', 6.5

  4위 :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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