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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ULT 03. 피할 수 없었던 운명 - 르노와 세계 대전

꿈꾸는 차고 2022. 10. 2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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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세단 디자인, 세계 최초의  차량 기어 활용...

르노가 가진 최초의 타이틀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기술적인 부분 이외에도 운영적인 측면에서 최초의 타이틀을 가진 게 있다면

르노는 세계 최초로 해외 자동차 생산 공장을 설립한 자동차 회사라는 사실입니다. 

 

1926년 르노는 프랑스 국내의 인건비 상승을 타개할 대책으로 해외진출을 염두해둡니다.

그래서 우선 지리적으로 가까운 벨기에에 생산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1927년에는 영국에도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 등 비용절감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습니다 .

 

이처럼 환경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르노이지만 온 유럽 넘어서 전 세계를 뒤흔든 두 번의 세계대전의 여파를 피할 순 없었죠.

1차세계대전의 상황은 좀 나았습니다.

르노는 1914년 프랑스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수 관련 제조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래서 항공기 엔진, 구급차, 탱크 등을 제조하여 정부에 납품하게 됩니다.

그런데 르노의 혁신적인 기술 개발 능력은 군수산업에도 빛을 발해서,

자체 생산한 FT-17전차에 세계 최초로 회전식 포탑을 개발하여 적용시킴으로써 현대적인 전차 형태의 선구자가 됩니다. 

 

르노 FT-17 전차 (출처 : commons.wikimedia.org)

1914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무렵의 일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철저하게 전쟁 준비를 해왔던 독일이 파죽지세로 프랑스를 향해 진격하여 

드디어 파리에서 37킬로 떨어진 곳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집니다.

 

수도가 함락될 수도 있는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프랑스가 해야만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프랑스 군본부의 판단은 즉각 예비 병력을 전투 지역으로 보내어 독일군의 진격을 약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엄청난 포격으로 인해 철도 인프라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철도를 이용할 수가 없으니 딱히 대안이 없었습니다.

적들이 진용을 제대로 갖추기 전에 작전을 실행해야 했었기에 구식 마차에 의지하거나 행군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파리의 방위사령관 갈리아니 장군은 고심 끝에 파리에서 운행중인 택시에 대해 긴급 동원령을 내립니다.

이 때 징발 당하거나 스스로 모여든 600여대의 택시는 대부분 르노 브랜드였습니다.

이들은 약 이틀의 시간 동안 6천여명의 병력과 전쟁물자를 신속하게 마른 강의 전투 지역까지 실어 나름으로 해서 프랑스군이 가까스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 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른바 “마른의 택시(Taxis of the Marne)” 사건입니다. 

 

파리의 광장에 모여든 르노 택시들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당시 2기통 9마력 정도의 힘을 가진 르노 택시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한몫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급파된 프랑스군의 규모를 확인하고 어떻게 많은 인원이 이동할 있었는지 독일군들이 어리둥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당시 파리의 택시 운전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전장까지 병사들을 실어 날랐을까요?

비록 대에 병사들을 5 밖에 실을 없었던 작은 택시들이었으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나아가 사건은 군용 운송의 주된 수단이 마차에서 내연 기관 자동차로 바뀌는 상징적인 시점이 됩니다.

전쟁에서 기동력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시킨 사건이기도 합니다.

 

택시기사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독일의 진격을 한동안 멈추어 1 세계대전을 연합군에게 유리한 양상으로 이끄는데 성공했고, 때부터 서부전선은 참호를 중심으로 장기전으로 대치하게 됩니다.

1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정부는 적극적으로 군수산업에 동참한 루이 르노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공적을 기렸습니다. 이와 더불어 재건 되는 프랑스의 경제 속에서 특수를 누렸습니다. 

전국의 수많은 자동차 수요 덕분에 자동차를 적극적으로 공급하며 회사의 규모를 크게 성장시킬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르노가 생산한 장갑차량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러나 운명의 장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르노에게 2차세계대전은 1차세계대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다가 왔습니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이 순식간에 르노의 공장들이 있던 지역을 점령하는 바람에,

르노는 이에 저항하거나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독일군의 위협으로 르노는 그들을 위해 필요한 트럭과 군용 차량 등을 제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회사의 규모도 이전보다 훨씬 커진 터라 회사 노동자들에 대한 안정적인 고용을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회사를 운영해야 했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1차 세계대전의 애국자에서 순식간에 나치의 부역자로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폭격을 맞아 르노의 많은 공장들이 파괴 되었고, 결국 종전 후 나치 협력을 이유로 루이 르노는 투옥되게 됩니다.

마음의 병이 깊었던 탓일까요?

안타깝게도 루이 르노는 투옥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르노 가문에는 나치에 부역했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보상도 없이 자신들의 회사가 정부 소유의 국영기업이 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0년의 루이 르노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협력이냐 저항이냐?

유사시 주위 환경과 회사의 운영 사이에서 힘든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경영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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