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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KSWAGEN 05. 자동차계 최고의 금손! - 포르쉐 박사 이야기

꿈꾸는 차고 2022. 12. 17.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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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이 설립되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포르쉐 가문은 회사의 경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포르쉐 박사와 그의 가족을 빼놓고서는 폭스바겐의 역사를 말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포르쉐 가문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나눠볼까 합니다. 

 

포르쉐 가문의 선조 포르쉐 박사는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헤미아 지역 Maffersdorf 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 보헤미아는 현재의 체코에 속해 있는 곳으로 전설적 록그룹 퀸의 명곡

Bohemian Rhapsody에 등장하는 그 보헤미아가 맞습니다.

떠돌이 민족인 집시들이 수 백년 전부터 그 지역에 많이 살아왔기 때문에

집시들을 다른 표현으로 보헤미안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네요.

 

아버지가 배관공 관련 일을 했었기 때문에 포르쉐 박사는

어렸을 때부터 엔지니어링 관련 부분에 흥미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집은 아마도 부유한 축에 속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처음으로 전기불이 들어온 것이 바로 자기 집이었다고 하니까요.

음....정말 그의 생가를 보니....아주~ 좋네요! 당시로선 최소 은수저 이상 아니었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배관공은 아주 돈을 잘 버는 직업인 듯 합니다. 

(저는 오늘 배관공 불러 막힌 하수구 한번 뚫는데 180불 지불했다는...) 

 

현재는 폭스바겐 산하 체코의 자동차회사 SKODA가 이 생가의 소유권을 가지고

포르쉐 박사를 기리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공개 중이라고 합니다. 

 

포르쉐 박사의 생가 (출처 : www.stuttcars.com)

 

현재의 포르쉐 박사 생가 (출처 : museum.skoda-auto.com)

 

어렸을 때부터 전기가 가진 능력과 활용성에 크게 매료당한 포르쉐 박사는

14살 때부터 스스로 전기 실험을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가업을 잇기를 원하는 아버지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집 안에 몰래 전기 실험실을 만들어 연구를 했다고 하니...

천재들은 어렸을 때 부터 뭔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18세가 되던 나이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한 전기회사에 입사하였고, 

그는 정식 대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 재직 당시

세계 최초로 허브 모터를 개발하는 천재성을 발휘합니다.

사실 내연기관과 전기동력을 같이 사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차량을

최초로 만들어낸 것도 바로 포르쉐 박사라고 합니다.

 

포르쉐 박사의 18세 시절 (출처 : www.stuttcars.com/)

 

그것도 무려 지금으로부터 120여년 전인 1900년,

그가 전기회사를 그만 두고 오스트리아의 Jacob-Lohner라는 회사에서 일할 당시의 일입니다.

로너-포르쉐라고 이름 붙여진 이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그 당시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했고, 이를 통해 그는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자동차는 무려 총인원 5천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1900년도의 프랑스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도 전시가 되었다고 하네요. 

당시 박람회에 조선도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도자기, 공예품, 가구, 악기들을 전시했다고 하죠.

그랬던 한국이 지금은 한류로 세계를 휘어잡고 있으니... 

 

아무튼 포르쉐 박사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자동차 내부의 내연기관으로 발전기를 움직이고 전기를 생산하는 아이디어로서 

현재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원리와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그는 정말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The Lohner–Porsche Mixte Hybrid (출처 : en.wikipedia.org)

 

 

그가 자동차 업계에서 화려하게 경력을 꽃피우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부터 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아우스트로 다임러에 수석 엔지니어로 재직할 당시에는

그가 제작한 레이스카가 53개의 경주 대회에 출전에 43회 우승하는 대기록을 남깁니다. 

본인이 직접 레이스에 참여한 적도 있는데, 1910년 무려 1500여 km를 

달리는 Prinz-Heinrich Race에서 당당히 우승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고성능 항공기 엔진과 대형 견인 기계, 소방 엔진, 트롤리 버스,

하이브리드 가솔린-전기 구동 시스템을 포함한 수많은 디자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포르쉐 박사는 유명세를 가지고 독일로 진출합니다.

그는 다임러 벤츠의 기술이사로 이직하여 레이스카와 양산 자동차들을 

만들어 내는데 아주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1920년대에 최고 속도가 시속 190km를 넘었던 차량을 개발했다니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SSK 모델들은 출전하는 레이싱 대회마다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다임러 벤츠의 백여년이 넘는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모델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을 한 번 보세요.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네요. 

 

 

SSK model (출처 : sportscardigest.com)
레이스 주행중인 SSK 모델 (출처 : www.supercars.net)

 

하지만 경영진과의 불화로 인해 다임러 벤츠를 사직하고 

1931년 슈트트가르트에서 본격적으로 본인의 회사를 차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포르쉐의 시작입니다.

본인이 쌓은 경력과 아들인 페리 포르쉐의 조력으로

주로 다른 자동차 업체들의 차량 설계 관련 컨설팅을 주업무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비행기나 배의 엔진 설계에도 능했던 다재 다능한 엔지니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나 어떻게 박사로 불리게 된 것일까요?

그가 지닌 자동차 분야의 최고 실력 덕분에 포르쉐 박사는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교,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던 것이죠. 

 

이러한 실력자를 나치는 가만 내버려 둘 수가 없었겠죠.

앞 편의 글에서 서술한 대로 그는 히틀러의 지시 하에 독일의 국민차 비틀의 개발과

비틀의 차체를 이용한 군용차량들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가 군용 전차 타이거P의 개발에도 깊숙히 개입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이렇게 나치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프랑스 영토에서 전범으로 몰려 투옥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프랑스 정부에 의해 투옥이 된 것일까요?

사실 전후 독일로 진주한 미국과 영국군에 의해 전범 조사를 받을땐

포르쉐 박사에게 큰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아 잘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포르쉐박사와 아들의 프랑스행이 그들을 투옥으로 이끈 함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드골 정부 때문인데요..

여기서 잠깐, 2차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들어선 프랑스 드골 정부는

프랑스 르노자동차가 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르노자동차의 창업주이자 경영자인 루이 르노를 투옥시키죠.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난번 르노 글에서 아래와 같이 다루었으니 한 번 확인해보세요! )

 

 

RENAULT 03. 피할 수 없었던 운명 - 르노와 세계 대전

세계 최초의 세단 디자인, 세계 최초의 차량 기어 활용... 르노가 가진 최초의 타이틀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기술적인 부분 이외에도 운영적인 측면에서 최초의 타이틀을 가진 게 있다면 르

george-marshall.tistory.com

 

당시 프랑스 정부는 루이 르노로부터 르노자동차를 몰수하여 국영기업으로 전환하고, 

폭스바겐처럼 프랑스판 국민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포르쉐 박사의 오랜 자동차 경험과 엔지니어링 능력을 빌리고자

프랑스 정부는 그를 공식 초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 내의 이견으로 인해 포르쉐 박사 일행은

환영 만찬장에서 체포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프랑스 정부에 의해 감금된 상황 속에서도

프랑스 국민차 르노 CV4의 개발에 동원되었다고 하네요.

귀빈으로 초청되어 체포된 후에 일을 돕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그는 아들, 사위와 함께 투옥이 되었다가 20개월만에 가까스로 자유인이 됩니다.

먼저 석방된 아들 페리 포르쉐가 회사를 다시 운영하면서

비틀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이용한 포르쉐356을 개발하고 레이싱카들을 판매하면서

아버지를 보석금으로 석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딸인 루이제도 아버지와 남편을 석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1937 포르쉐 박사와 아들 페리 포르쉐 (출처 : www.stuttcars.com)

 

석방 후에도 포르쉐 914, 944, 928, 968 등 열정적으로 자동차 개발에 매진했던 포르쉐 박사는

1951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아들인 페리 포르쉐가 회사 경영에 재능을 발휘한 덕에 포르쉐의 운영은 점차 정상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포르쉐 박사는 이처럼 당시 유럽의 자동차 업계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내가 꿈꾸는 차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가 남긴 말 속에서 자동차에 대한 그의 열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70세가 넘는 고령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을 아들과 딸.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딸은 아버지의 전범 재판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증거를 제시하고자 사력을 다했다는데요. 

 

다음 글에서는 포르쉐 박사의 아들과 딸 밑에서 나온 자손들이

포르쉐와 폭스바겐을 두고 어떻게 애증 관계가 되고 말았는지 설명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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